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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존재에 대해 사과하지 말 것 - 삶, 사랑, 관계에 닿기 위한 자폐인 과학자의 인간 탐구기
카밀라 팡 지음, 김보은 옮김 / 푸른숲 / 2023년 4월
평점 :
5학년 2학기 후반쯤 함께 공부하게 된 학생이 있어요. 처음엔 왜 이렇게 저학년처럼 구는지 이해하기가 어려웠고 기억력이 짧은 것도 숙제를 안 해 오는 것도 노력 부족이라고만 생각했어요. 몇 달이 지나서야 학생의 엄마는 조심히 얘기를 하더군요. 아이가 몇 해 전 ADHD를 진단받았다고. 그 후로 약을 복용중이라고요. 아..
학생의 상황을 알았다고 딱히 제가 해 줄 건 없었지만 녀석의 행동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계기가 되었고 반복에 반복으로 하나씩 하나씩 저장할 것들이 늘어갈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자신의 존재에 대해 사과하지 말 것>
제목부터 범상치 않은 이 책은 ADHD 뿐 아니라 자폐스펙트럼장애를 진단받고, 오랜시간 범불안장애, 강박장애, 감각처리장애를 가진 저자가 쓴 책이라 해서 들여다 보게 되었습니다. 혹여나 제가 가르치는 학생에게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 궁금했거든요. (실은 이런 장애에도 불구하고 박사가 된 분이 있으니 놀라는 대신 우리도 해보자고 얘기해 주고 싶었거든요.)
** p.173
내가 겪어 왔던 모든 고통스러운 경험이 가치 있는 보물이 되고, 내가 배운 교훈이 타인과 나를 연결해주는 공감의 화폐가 된다. 한때 나와 인류의 양립할 수 없는 차이점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이제는 내 섬과 다른 사람의 섬을 잇는 도구가 되었다.
이 책에서는 머신러닝을 통해 가장 좋은 선택지를 고르는 법을, 단백질 결합과 파동이론을 통해 다른 사람과 관계 맺는 법을, 열역학을 통해 완벽주의를 극복하는 법을, 양자물리학을 통해 목표를 이루는 법을, 딥러닝을 통해 실수에서 배우는 법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렇게만 소개해서는 대체 이 책을 누가 읽을까 싶으실 거에요. 얼핏 보아서는 과학 전공 서적 같기도 하니까요. 의학적으로 저자와 같은 병명을 가진 이들(자폐, ADHD, 범불안장애, 강박장애, 감각처리장애..)과 그들을 곁에서 지켜야 하는 이들에게 참 좋은 안내서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관계의 어려움 혹은 존재의 이유마저 난감해 하는 이들에겐 과학적으로 설명되는 부분 혹은 과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다는 걸 저자의 이야기를 통해 (평범한 독자는) 알게 되었거든요.
사용된 용어와 이론이 매우 몹시 많이 어렵지만 저자가 겪어낸 상황들과 생각들을 과학에 적용시켜 전하는 글은, (철저히 문과 출신인 저도) 꽤 흥미롭게 읽어나갈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의 시작은 사실.. 저자의 박사학위 논문이었다고 해요.
지도 교수는 훌륭한 글이지만 논문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지만 카밀라는 관찰과 계산, 실험을 통해 삶과 관계를 이해하는 과정을 <자신의 존재에 대해 사과하지 말 것>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했습니다. 자신에게 필요한 ‘인간 사용 설명서’ 뿐 아니라 분명 누군가에게도 도움이 될 만한 과학을 품은 에세이를요.
감수성 없는 그녀가 지구에서 살아남기 위해 절망하는 대신 선택한 과학. 그것은 인간 관계를 재조명해 설명하기에 충분했고 전문적이되 유머를 잃지 않은 그녀의 문장 솜씨 덕에 읽는 이는 지적인 만족감마저 얻어봅니다. 아주 많이 매우 몹시 매력적인 책.
다른 책들과 확연히 구별되는 그녀의 이야기.
어렵지만 어렵지만은
<자신의 존재에 대해 사과하지 말 것> 추천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