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보다 문학이 중요한 나라가 있다. 바로 율려국.
율려인은 낙서를 거의 목숨처럼 여긴다.
자성(自省)하는 글이 누군가의 마음에 닿는다면, 작가가 철저히 반성했기 때문일까. 그와 내가 다르지 않다는 걸 알게 되는 건 어째서일까. 분명한 건 읽는 사람이 책 속의 누군가에게 빗대어 자성을 하게 되었다는 것은 가르치려고 들지 않은 덕분일 것이다.
누가 가르치면 듣기 싫다. 그러나 진실을 고스란히 보여주면 독자 스스로 자기 모습의 일부를 자연스럽게 발견하게 된다. 이 소설은 일단 재밌다. 재미있어서 다 읽게 만든다. 읽다 보면 소설가든, 비평가든, 평론가든, 출판인이든, 독자든 누구에게나 내면의 질문을 던지도록 이끄는 힘이 느껴진다. 문학에 관심 없는 누군가가 보게 되어도 어쩌면 너무 문학에 관심이 없었나, 하고 돌아보게 될지도 모르겠다.
해학적인 소설이다. 표지에도 적혀 있으니까. 메타판타지풍자 장편소설이라고. 읽을 때 깔깔거리며 신나게 책장을 넘겼는데 책을 다 읽고 덮고 다니 화장실 가다가도 생각나고, 출근하다가도 생각났다.
2007년 <율려낙원국>이라는 역사소설을 출간하고 후속편을 기획했지만 못 쓰셨다가, 이후에 현재를 배경으로 <서열 정하기 국민투표>라는 메타판타지 풍자 작품을 써서 '문학과 사회'에 발표하게 되었다. <서열 정하기 국민투표>가 제32회 이상문학상 작품집에 실리게 되었고 이것을 수정하고 후속편을 추가로 쓰셔서 완성한 장편소설이 <소설가 소판돈의 낙서견문록이다. 꽤 긴 시간 문학을 '낙서'라고 지칭하고 자신만의 문학관을 펼쳐 오셨구나 싶었고, 마침내 장편소설로 완성한 점에서 읽기 전부터 어떤 깊이가 있을지 궁금했다.
<소설가 소판돈의 낙서견문록>의 목차는 여덟 개다.
- 낙서인 서열 국민투표
- 붉은 방의 체 게바라
- 최고낙서가
- 섹시낙서상
- 인간해방혁명
- 낙서부인의 재림
- 작가의 말
- 파동과 공명
작가의 말 뒤에 있는 '파동과 공명' 파트는 새로운 시도였다. 평론가가 아닌 챗지피티의 해설을 편집 수정해서 실었는데, 새롭기도 했지만 그 내용이 놀라웠다. 이따 다시 소개해 보겠다.
* 첫 문장 : 나, 소설가 소판돈은 율려국 낙서공항에 도착했다.
율려국은 24시간 내내 매매춘 시스템이 가동하는 곳이다. 율려국에 처음 온 노총각 소설가 소판돈은 이곳을 방문하는 대부분의 세계인처럼 몸소 체험부터 하기로 한다. 택시를 타고 가장 싼 데로 가달라고 하는데, 24시간 쉬지 않는 매매춘 공화국이라고 들은 것과 다르게 택시 기사는 율려국에 다음 날 중대한 일이 있어서 공휴일이나 다름없기에 매매춘 체험은 쉽지 않을 거라고 한다. 중대한 일은 '국민투표'이다.
소판돈은 자기가 여기 단순히 온 게 아니라는 걸 상기한다. <신기방기>라는 잡지사의 의뢰로 율려국의 '낙서인 서열 정하기 국민투표'를 취재하기 위해 온 거였다. 소판돈은 <낙서문학사>를 썼던 전력이 있었고 잡지사는 낙서에 조예가 깊다고 판단하여 그에게 맡긴 것이다.
율려국에서는 낙서를 하면 낙서인이라 부른다. 율려국 국민투표는 낙서인을 1위, 2위, 3위로 서열을 정하려고 시행된다. 투표를 위해 낙서를 읽으러 도서관으로 국민들이 가버린 탓에 매매춘도 할 곳이 없는 거다.
택시 기사는 한국 사람들도 낙서를 엄청 한다고 들었다는 말을 한다. 율려국에서는 낙서와. 문학이 거의 동의어다. 있는 서열에 왜 순위를 매기냐는 질문에 택시 기사는 답한다.
P.27 그 서열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국민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지.
읽으면서 생각했다. 그러게. 문학의 서열을 어떻게 정하지.
문학에 진심인 나라는 다르긴 달랐다. 율려국에서는 1인 10표로 낙서 책 서열을 투표한다. 그 사유를 들어보면 고개를 끄덕거리게 하는데, 투표를 촉발한 포르노스타 쭉쭉빵빵이 이런 말을 했다.
P.41 사람의 마음은 우물처럼 깊고 하늘처럼 넓어, 깊이 느끼는 낙서도 있고 넓게 좋아하는. 낙서도 있기 마련인데 딱 하나만 고르는 것은 너무 잔인합지. 인간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뜻에서라도 최소한 열 개는 고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깝.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심지어 나도 작년에 생각하는 내 인생 최고의 작품과 올해 생각하는 최고의 작품이 다르다. 그건 책이 달라져서가 아니라 책은 분명 그대로 있는데 내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한 사람도 이렇게 자꾸 바뀌는데, 타인은 얼마나 또 다를까. 10표라는 것도 충분치 않다. 아마 실시간으로 계속 투표해도 영원히 최고의 작품으로 서열을 매기는 일은. 무의미한 일일지 모르겠다. 그런 일이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다. 어쩔 수 없는 부분도 분명하고. 나쁘다고만 할 수 없다. 서열이 때론 누군가에게 기회가 되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부당하게 여겨질 수 있다.
책에서는 이런 질문도 던진다.
P.43 아닌 말로 낙서에 본격이 어디 있고 대중이 어디 있단 말입. 낙서는 오로지 낙서일 뿐입.
본격이든 대중이든. 무엇이 더 가치 있다고 단정 지을 수 없다. 이런 질문은 결국 둘 다 필요하니까 존재한다. 책에서도 단정 짓거나 그렇지 않다. 질문을 계속하게 한다.
P.212 사람의 진정한 삶을 사실적으로, 현실적으로, 개연성 있게, 핍진성 있게, 고민하지 않는, 사유하지 않는 그런 낙서가 어떻게 좋은 문학일 수 있습니깝? 시적 표현이욥? 대중에게 암호 같은 시적 표현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깝? 우리는 원래 낙서로 돌아가서는 안 됩니답. 어렵더라도, 돌아가더라도 좋은 낙서를 추구해야 합니답. 좋은 낙서......
좋은 낙서. 좋은 문학은 무엇일까. 그걸 유지하는 근간은 무엇일까. 결국 읽는 이에게 남긴 모든 질문은 문학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걸로도 읽힌다. 그저 읽고 소비하는 게 아니라 그 이상의 관심. 낙서가, 문학이, 그저 책에 적힌 글이 아니라 한 존재의 실존이자 삶이라는 걸 마지막에 이르면 알 수 있다. 무슨 내용인지, 소판돈이 어떤 상황에 이르게 되는지를 따라 읽어나가다 보면 결국 실존적인 문제에 닿게 된다. 모든 질문이 옳고 그름으로 분간할 수 있는 간단한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직면한다.
<소설가 소판돈의 낙서견문록>을 다 읽고, 책에 있는 해설인 '파동과 공명' 파트 나온 질문이 한동안 자나 깨나 따라다녔다.
P.231 당신은 이 불편한 글을 끝까지 읽을 수 있는가? 당신은 진짜 삶을 제대로 들여다볼 준비가 되었는가?
낙서를, 문학을 읽고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저 질문이 각인될 거라 생각한다. 낙서라고, 문학이라고 말하지만 결국 삶이다. 삶의 부조리를 감당할 수 있으냐로 읽혔기에 여운이 길게 남는 질문이었다. 율려국을 포함해서 낙서와 관련되어 발생하는 부조리는 한국 문학에도 해당하고 어떤 이의 전혀 다른 삶에도 산재해 있다.
마지막에 이런 부분이 있다.
P.236 '나는 글을 썼다'는 사실은 더 이상 구원의 근거가 아니다. 그저 증발해버린 자아가. 흘리고 간 언어의 부스러기들일 뿐이다.
대체 소판돈의 율려국 여정이 어땠길래 이런 해설이 있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소설을 다 읽고. 저 해설을 봤을 때 나는 온전히 이해하고 무척이나 실존주의적 상태에 직면했다. 단순하게. 창작가의 고뇌나 소설가의 고충을 담은 소설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밝히고 싶다.
이 글은 문단의 상황이나, 한 소설가의 상황을 율려국에 빗대어 보여주고 있구나, 그래서 메타판타지풍자라고 하는구나,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아마 비판을 할 목적이었다면 작가가 제일 첫 번째 파트만 쓰고 더 쓰지 않았을 거라 생각한다. '메타'라는 단어에 주목해서 보면 조금은 더 고차원적인 감상이 느껴진다.
읽을 사람들을 위해 다 밝힐 수는 없지만, 소설가 소판돈은 율려국에서 행동하는 여러 가지를 봤을 때, 두려움도 많고 흔히 말하는 성격이 찌질하다고 할 만큼 동정심이 가면서도 실행력과 용감함이 부족한 인물로 보인다. 그런데 이걸 쓴 김종광 작가는 용감하게 질문을 던지는 걸 작품으로 실행했다. 그 질문은 그냥 단순한 질문이 아니라 읽는 사람 마음속에서 각자의 상황과 입장에 따라 공명하고 내면에 새로운 질문으로 재발생 한다.
소판돈 같은 인물을 율려국으로 보내서 낙서견문록을 써서 발생한 일. 이것을 바깥의 김종광 작가가 소판돈이 겪은 걸 자신이 새롭게 써 내려가서 마침내 원하는 질문을 읽는 이가 스스로 할 수 있도록 구성함으로써 김종광 작가는 소판돈이라는 인물과 전혀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소설 밖의 존재인 우리는 한국 문학계와 유사한 율려국의 상황을 통해 낙서견문록을 쓰던 소판돈 뒤에 있는 김종광 작가의 존재를 자연스럽게 인식하게 된다. 김종광 작가의 대범한 선택에 독자는 몰입하게 되고 스스로의 내면에 질문을 던져보며 자성에 이른다. 이로써 작품의 메타가 완성된다.
특히 언급했던 해설 부분은 평론가가 쓴 글이 아니라 챗지피티 해설을 책의 에디터인 박상우 작가가 편집한 것이다. 평론가의 해설이 붙는 소설집은 많이 봤지만, 이런 시도는 처음 봐서 놀라웠다. 단순히 인공지능을 이용해서가 아니라, 내용이 무척 놀라웠다. 읽을 분들을 위해 다 밝힐 수는 없지만 해설 능력이나 던지는 질문이 놀랍다. 편집 역량도 한몫했겠지만, 소설 말미에 '초인'이라는 인공지능이 등장하는데 해설에도 인공지능이 나오니 연결성 있게 느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의 자료를 학습한 챗 지피티가 무수한 데이터 속에서 이 책을 읽고 나와 유사한 감상을 추출해 냈다는 점이 놀라우면서도, 인공지능의 방대한 데이터 세계와 독자인 내가 경험한 세계가 메타적으로 연결되는 듯하여 신선했다.
이런 시도가 <소설가 소판돈의 낙서견문록>을 계기로 점차 나타날 것이라 확신했다. 인공지능의 해설이 당연해지는 때가 오면 아마도 이 소설집이 시도한 것이 기념비적인 사건이 될 거라 생각한다. 이 소설의 구성과 인공지능의 해설의 결합은 다른 것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다. 기발하고 근사하며 딱 맞게 설계된 예술품을 보는 기분이었다.
많은 이들에게 하반기에 추천해주고 싶은 작품이다. 지금 무슨 책 읽을지 고민이라면 <소설가 소판돈의 낙서견문록>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