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랑 나랑 노랑 - 시인 오은, 그림을 가지고 놀다!
오은 지음 / 난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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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림책을 좋아한다. 그림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 도무지 표현되지 않는 것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느끼게 해준다. 표정 하나로 온 우주를 표현할 수도 있다. 우리 존재가 온 우주이듯이. 여러 종류의 그림책을 읽었는데, '색'그림책은 처음이었다. 색으로 그림들을 나누고, 그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색과 연결되어 있는 특이한 책.

 

 

Red

 이 요상한 책을 처음에는 잘 집중을 못했었다. 첫 페이지엔 앙리 마티스의 <붉은 조화> 그림이 떡하니 있고, '생기 있게 식탁을 차리는 방법'이란 제목으로 인생의 정점을 표현하는 레드라는 색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 다음엔 활활 타올랐다가 광기에 휩싸였다가 급기야는 붉은 열정으로 댄스, 댄스, 댄스, 춤을 추고 있었다.

 

 나에게도 레드로 가득했던 시간들이 있었을까. 빨강을 떠올리면 주저없이 떠오르는 크리스마스. 너는 손수 뜨개질을 했다며 동그란 통에 말아넣어 선물해 주었던 빨간 목도리. 난 그걸 받고도 시무룩했고, 너는 얼른 목에 둘러 보라고 손짓했고, 그것이 싫어 내팽겨쳤다가 데굴데굴 굴러가버린 빨간 목도리. 마치 올이 풀린 것처럼 너의 마음도 비실비실 땅바닥을 구르고 있었던. 마음에서 피가 흐르는 것처럼 뚝뚝 눈물을 흘렸던 그 때. 아픈 줄도 모르고 건드렸다가 지어지지 않는 상처를 남겼던 철없고 이기적이었던 나 그리고 한없이 너그럽고 레드처럼 따뜻했던 너.

 

 

Blue

 메리 커셋의 <파란 안락의자의 소녀>를 바라본다. 세상에서 가장 편안하고 나른한 자세로 무언가를 응시하고 있다. 소녀가 응시하고 있는 건 맞은 편 의자에 앉아 있는 고양이가 아니다. 이곳이 아닌 저곳. 다른 세계다. 소녀가 꿈꾸는 세계다. 꿈꾸기 위해 소녀에게 필요한 건 단지 공간을 가득 채울 파란 안락의자였다. 나는 얼른 소녀에게로 다가가 그녀의 세계에 가닿는다. 꿈을 꾼다. 내 꿈이 닿는 어떤 지점을 향해 손을 뻗는다. 나른해진다. 햇살이 비춰지고 행복한 미소가 떠오른다. 좋다. 나는 소녀가 되고, 소녀는 내가 된다. 그리고 우리가 되었다가 타인이 되었다가 나는 현실로 돌아온다.

 

 나는 그 파란 의자를 시작으로 블루의 세계 속으로, 듬뿍 빠져 들었다. 오은 시인이 그려낸 <파란색 크레파스로, 사랑해> 꼭지를 읽으며 눈물이 났다. 다섯 살이 되었다가 일곱 살이 되었다가 열여덟, 스물일곱이 되면서 순간순간 어떤 때를 그려놓았는데, 난 그의 시선을 따라 과거로 갔다가 현재로 왔다가 하다가 그만 슬픔이 목에 걸려 버린 것이다.

 

누군가에게 길들여지고 있었을 때

.......

유혹을 감당하기 힘들었을 때

.......

상처를 감당하는 게

삶의 커다란 부분임을 깨달았을 때

.............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도 없었을 때

.........

몇 개의 달성되지 않은 다짐들이 튀어나왔을 때

그것들이 살아야 할 이유로 둔갑했을 때

........

파랗게, 파랗게 웃으며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로 시퍼렇게 아득해질 때 (p.88- 92) 

 

 

푸르스름한 공기가 번진 저녁. 조금씩 더욱 짙어져 검푸른 저녁하늘을 나는 무척 좋아했다. 그 때부터 나는 사람들에게 가장 좋아하는 색이 파랑이라고 말했던 것 같다. 하늘에 보이는 그 짙은 파랑. 저녁과 밤 사이 보이는 그 짙은 파랑은 늘 새초롬한 달과 함께여서 더 좋았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저녁이면, 만나고 싶지만 보지 못하는 밤이면 언제나 그렇게 내 머리 위에서 나를 내려다 봐 주는. 그래서 덜 외롭다여겼던 그런 저녁과 밤, 밤과 저녁의 사이가 있었다.

 

 

 Yellow

 빈센트 반 고흐 <수확하는 사람>. 노랑의 반란 같다. 금세라도 모든 일렁임이 내게로 밀물처럼 쳐들어 올 것 같은 느낌. 고흐의 그림은 언제나 떨림을 간직하고 있다. 바라보고 있으면 이상하게도 설레고 가슴이 두근두근거린다. 속이 울렁거리고 세계가 흔들린다. 입가엔 미소가 눈가엔 눈물이 맺힌다. 아름다운 것들은 늘 그렇게 떨림으로 다가온다. 환한 빛으로 다가오는 노랑. 너무도 눈이 부셔서 눈앞에 있어도 보이지 않고, 만지면 사라질 것 같은 불안같은 그림 오딜롱 르동의 <베아트리체>. 시인은 어느새 베아트리체를 사랑하는 한 남성으로 변신하여 그녀에게 구애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사랑으로 눈 먼 베아트리체를 향한 사랑의 갈구를 노랑으로 표현한다.

 

 노란색 알전구 하나로 작은 상에 환한 빛을 뿌린다. 잘 구워진 고등어 하나에 둘러싸인 밥그릇들이 반질거린다. 그곳에서 옹기종기 모여 한 숟갈 뜨고, 고기 한 점 먹고, 벌레 한 마리 잡고, 환하게 웃고, 그곳에서 우리 가족은 내내 행복했으면 싶었던 어떤 때를 떠올렸다.

 

White

 알프레드 시슬레의 <루브시엔느의 설경>. 눈 내리는 풍경이 펼쳐진다. 하나의 길이 나있고, 그 길로 검정색 옷을 입은 한 사람이 멀리 사라져 가고 있다. 눈은 수북히 쌓이고, 바람 한 점 없는 겨울이다.

 

 봄이 올 때까지, 오늘이라는 달이 저물 때까지, 내일이라는 태양이 떠오를 때까지, 내 몸에서 울컥 어떤 물질이 치솟을 때까지, 그 물질로 두 손을 바득바득 씻을 때까지. (p.161)

 

 누군가 흰 색은 모든 걸 품고 있는 색이라 했다. 또 누군가는 흰색은 우유부단한 색이라고도 했다. 모든 색이 숨어 있을 것도 같고, 누군가 건드리면 금세 다른 색으로 물들어 버릴 것도 같은 색. 하양. 그런 하양이 난 좋다. 금방 더럽혀지더라도 흰색 티셔츠가 좋고, 청소하기 힘들고 지저분해지더라도 눈이 수북히 내리고 또 내리는 것이 좋다. 온 세상이 하얗게 된다면 더욱 좋다. 그냥 그렇게 하얗게 하얗게 하얘지고 나면 내 마음도 깨끗해질 것만 같다. 눈 오는 날엔 왠지 눈물조차도 따뜻하게만 느껴진다. 눈이 물로 만들어졌기 때문일지도.

 

 

Green

 움베르토 보초니의 <마음의 상태 - 떠나는 사람들>. 그의 거친 붓질을 오은 시인은 '숲은 달린다'고 표현했다. 그리고 그림은 곧 그에 의해 시가 되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억울하지 않았다

혼자인데도 쓸쓸하지 않았다

나에게만 중요한 중간이었고,

나는 조금 이기적으로 이기죽거렸다(p.276)

 

바람을 이기고 소용돌이를 창조하는 것

나무를 쓰러뜨리고 그 위에 우뚝 서는 것

남들이 감히 꿈꾸지 못한 곳으로

전속력으로 달려가는 것(p.279)

 

 질주하는 숲속 풍경을 바라보고 그려보면서 나는 단 한 번도 초록인 적이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속력으로 어디론가 내달린 적은 있었는지, 어떤 곳으로 휩쓸려 간 적은 있었는지, 자연 속으로 완전히 들어가 본 적이 있었는지 도무지 떠오르는 것들이 없었다. 다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새벽 속으로 질주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Black

 에드바르드 뭉크의 <키스>. 이 키스는 어둠 속에서 이루어진다. 대부분의 키스가 그렇듯이. 다비스 시케이로스의 <절규의 메아리>. 이토록 처절한 슬픔이 있을까. 커다란 아이얼굴의 이마주름이 일그러지고 그 아이 입으로 또다른 아이가 튀어나온다. 주변은 캐캐한 매연과 쓰레기더미. 블랙의 부정적인 면을 부각시킨 것 같다.

 

 

 블랙하면 대부분 부정적인 이미지를 떠올린다. 나에게 블랙은 어둠과도 같은 의미다. 그러나 내겐 부정과 긍정이 함께 온다. 처음으로 느꼈던 따뜻한 어둠을 기억한다. 누군가는 울고 울었을, 혹은 수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을 바다였다. 그 바다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완벽히 어둠이 찾아왔을 때, 주변에 있는 사물과 사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들리는 건 밀려갔다가 쓸려오는 파도소리 뿐이었다. 그게 난 좋았다. 어둠에 휘감겨 포옹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때만큼은 완벽하게 외롭지가 않았다. 그 날 이후로 어둠 속에서 음악을 듣는 걸 좋아하게 되었다. 하지만 가끔씩은 그 어둠이 지독히 부정적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가족들을 기다릴 때, 깜깜한 집에서는 바람소리에도 소스라치게 놀란다. 어둔 밤 골목길에서 뒤따라 오는 사내의 구두소리, 먹이를 찾아 쓰레기를 뒤지러 다니는 밤의 여왕 검정 고양이까지..... 색 하나에도 이렇게 좋은 것과 나쁜 것이 함께 공존하는 듯하다.

 

너와 나 함께 놀다!

 책을 읽는 동안 색과 그림이라는 조합으로 한 편의 시가, 동화가, 인터뷰가 되기도 했고, 그림 속에 주인공이 되었다가 그림 속에 여인을 사랑하는 남자가 되었다가 그림 자체가 되었다가 화가가 되었다가 했던 오은 시인의 상상력과 표현력에 놀라고 감탄했다. 또한 마지막 책을 덮었을 때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묵직한 가능성까지 선물 받은 느낌이었다.

 

 가벼워졌다가 무거워졌다가 차가웠다가 뜨거워졌다가 했던, 고민이 떠오르면 펜을 들고 공부하듯 읽었다가 어느 새 빠져들어 놀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색과 그림을 통해 시와 이야기를 통해 나는 내 마음 언저리에 있던, 언젠가 꽁꽁 숨겨두었던 아픔들을 치유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따뜻했고 한편으론 시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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