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군벌 전쟁 - 현대 중국을 연 군웅의 천하 쟁탈전 1895~1930
권성욱 지음 / 미지북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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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군벌 전쟁의 표지와 1910년대의 중국 지도

우리에게 가장 유명한 중국의 군벌시대라고 하면 삼국지의 초반 배경이 되는 "후한 말"일 것입니다.
그런데 후한 말 이후에도 중국사에는 다시 군벌시대가 도래하는데 바로 청말민국초로 흔히 군벌시대라고 하면 이 시기를 뜻합니다.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이 책의 내용에 대해 살펴보죠.


중국 군벌 전쟁은 중화민국의 군벌시대라고 불리는 1916년에서 1930년의 이전인 우창봉기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우창봉기는 1911년, 노동자 출신이던 슝빙쿵이라는 병졸 한 명이 일으킨 사건으로 당시 중국 민중들은 부패하고 무능했으며 쇠락한 청나라 조정에게 반기를 든 우창봉기에 호응을 가지고 우창봉기의 여파는 전국으로 확대되는데 봉기가 일어난지 2일 뒤인 10월 12일, 청나라 조정에서도 우창봉기에 대해 보고되고 조정에서는 변방에서 신군 병사들이 산발적으로 일으킨 반란, 쓰촨성의 보로운동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판단했고 어린 황제인 푸이를 대신해 섭정하던 푸이의 아버지인 짜이펑은 육군대신 인창을 시켜 관군 최고의 정예부대를 보내 봉기를 진압하려 했지만 관군 지휘관들은 우창봉기 다음날 한양에서의 봉기가 일어나자 겁을 먹고 도망갈 정도로 무능했고 혁명군은 리위안홍을 도독으로 하는 후베이 군정부를 수립하면서 우창봉기는 혁명전쟁으로 확대됩니다.
그러나 혁명군에는 유능하고 실전 경험이 풍부한 장교가 부족해 관군에게 밀리게 됩니다.
하지만 인창의 지휘도 무능하긴 마찬가지여서 그는 우물쭈물하다가 혁명군을 진압할 기회를 놓쳤고 심지어는 도망칠 생각까지 품었습니다.
결국 인창은 해임되고 짜이펑은 당시 고향에 은거하던 위안스카이가 그 후임으로 임명됩니다(위안스카이는 이 책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인물 중 하나로 자세한 내용은 뒤에서 다루겠습니다).
하지만 위안스카이는 그동안 자신을 무시하고 목숨까지 위협한 짜이펑에게 충성을 다할 필요가 없었고 발의 병이 낮지 않았다면서 집에서 칩거하고 반란은 점차 각지로 확산됩니다.
짜이펑은 조급해져 위안스카이를 달래볼 요량으로 그에게 모든 군권을 맡기는데 그제서야 조정의 응답에 호응했고 서두르지 않고 혁명은 점차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광시성의 선빙쿤, 푸젠성의 쉬충즈, 산둥성의 쑨바오치, 항저우의 장제스 등의 남방의 성들과 그 성의 장교들이 청나라로부터 혁명을 지지하고 독립을 선언하고 혁명은 전국으로 확대됩니다.
이로 인해 청나라는 멸망 직전까지 내몰리게 되고 남방과의 대화를 위해 위안스카이를 파견하지만 위안스카이 측의 대표 탕사오이와 혁명파 측의 대표 우팅팡이 청나라를 멸망시키고 공화정을 건립하자고 타협해 청나라는 멸망합니다.
여기서 멸망 당시 청나라의 조정 인사들을 살펴보면 34세의 젊은 황실의 종친이자 유능한 군재였던 량비를 제외하면 대부분 겁많고 놀기 좋아하고 뇌물 수수에만 뛰어났습니다.
즉,청나라의 멸망에는 조정의 무능함도 큰 영향을 미쳤고 앞서 말한 량비도 혁명파의 폭탄 테러로 사망하면서 청나라의 멸망은 가속화될 수 밖에 없던 것입니다.
청나라가 멸망하고 중화민국이 세워진 후, 위안스카이가 대총통으로 취임하지만 그는 혁명정부에 권력을 넘겨줄 생각이 없을더러 자신이 새로운 황제로 즉위하려고까지 합니다.
위안스카이가 공화파와의 약속을 배신하고 자신이 황제로 즉위하려는 야심을 드러낸 모습으로 인해 일반적으로 위안스카이를 중국사의 역적 중 하나로 손꼽히는 "동탁"에 비유하고 있지만 저자는 위안스카이가 동탁보다는 "조조"에 가까운 인물이라고 평가합니다.
위안스카이는 겉으로 야심을 드러내지 않고 속으론 철저한 권모술수와 처세술을 지니고 있었고 아편전쟁 이후로 중국의 오래되고 심각한 사회적 문제였던 아편 근절, 무상 교육 확대, 현대적 사법제도 도입 등의 업적을 남겼고 이는 조조의 모습과도 어느 정도 일치하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위안스카이는 당시 국가 부채 문제로 파산 위기에 처했던 중국의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래전부터 중국을 침공할 계획을 세운 일본에게 차관을 대출하고 일본의 21개조 요구를 받아들였고 일본의 침략을 가속화했고 후계 구도를 제대로 정립하지 못했기에 훗날 더 큰 혼돈인 "군벌시대"를 야기하게 됩니다.


위안스카이 사후, 위안스카이 집권 당시의 부총통이었던 리위안훙이 총통 자리에 오르는데 그는 북양파도 남방 출신도 아니었기에 합의를 통해 총통으로 취임하면서 중화민국은 안정을 되찾는가 싶었습니다.
그러나 리위안훙은 정치적 역랑과 카리스마가 부족했고 남방의 혁명 세력인 황싱과 차이어가 죽자 남방은 분열되어 군벌 세력이 남방 각지에 난립하고 북양군도 리위안홍이 부총통으로 임명한 펑궈장을 지지하는 즈리파와 국무총리로 임명한 돤치루이를 지지하는 안후이파로 나뉘고 중립을 지키는 세력, 자신의 독자적인 세력으로 그 자리에 오른 장쭤린 등의 수많은 세력으로 나뉩니다.
이로서 본격적으로 중국의 군벌시대가 열리게 되고 군벌시대는 1930년, 그런 군벌 중 하나였던 장제스의 중원대전까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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