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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의 파시즘
임지현.권혁범 외 지음 / 삼인 / 200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안의 파시즘- 임지현외
나는 '누가' 혹은 '우리'가 권력을 잡으면 세상이 바뀐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것들을 바꾸지 않으면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전통의 이름으로 혹은 민족의 이름으로 아니면 민중의 이름으로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깊이 뿌리 내린 일상적 파시즘을 고사시키지 않는 한, 진정한 변혁은 불가능하다.(45쪽)
정치적 민주화마저 온전히 이루지 못한 시기에 일상의 파시즘에 대한 문제제기는 일종의 금기였다.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은 당연시 됐고 '의인'들의 모임에서 '또다른 정의'를 외치는 사람들은 빠른 속도로 배제되어졌다.
진보를 표방하는 운동권에서마저 ‘주요모순/정치적 문제' 해결을 위해 내부의 성차별이나 군대식 위계 같은 상대적 악은 대의를 위한 희생이라는데 암묵적 동의가 이루어졌었다.
우리안에 있는 일상의 차별과 부정의를 제거하려고 했던 사람들은 오히려 전선을 약화시키고 내부분열을 촉진하다는 이유로 비판받았다.
98년 8월, 울산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은 사측의 정리해고에 맞서 공장을 점거한 채 총파업을 벌였다. 하지만 결국 현대차 노조는 사측과 277명의 정리해고에 대해서 합의를 했다.
그러나 이 일은 대상 인원을 조직 별로 할당하거나 부서를 통폐합하는 따위의 수고로움은 필요하지 않았다. 대다수가 남성으로 이루어진 자동차 생산 현장이 아닌 식당에서 일하는 여성노동자들 276명을 모조리 '정리'하면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른바'진보' 진영 내에서의 성차별과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차별속에서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을 빌미로 4만여 조합원들의 일자리 보전을 위해 제물이 된 식당 여성노동자 중 남은 144명의 긴 싸움은 그날이 시작이었다.
(이들의 수난과 투쟁은 다큐 밥· 꽃· 양에서 처절히 보여준다.).
일상적 파시즘의 희생자는 사회의 권력 구조가 바뀐다고 해서 줄어들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일상적 파시즘에 문제제기를 시작한 임지현 교수는 “법제적 민주화가 겉으로 드러나는 사회적 무늬라면 파시즘은 물밑에서 살아 움직이는 한국사회의 결”이라고 진단한다.
그는 이러한 집단심성은 “제국주의가 강제한 식민지 규율 체제, 뒤이은 분단과 냉전, 한국전쟁이 결과한 반공규율 체제, 유신독재와 1980년대 신군부 집권에 따른 긴 어둠의 터널에 대한 경험”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분석한다.
그리고 이러한 뿌리는 전체주의적 심성과 위계질서를 구조화하는 언어생활과 복종과 규율을 내면화시키는 학교교육, 여성을 내적 식민지로 만드는 가부장제 등으로 재생산되고 있다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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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의 유산은 우리 안에 넓고 깊숙이 잔존해 있다.
권력자만이 아니라 그에 저항하는 자들까지도 매료시키고 사로잡는 권력의 위력. 모든 것을 가격으로 환산해야 직성이 풀리는 물신주의. 살아 남기 위한 나날의 각박한 생존 경쟁. 승리자가 되지 않고는 삶을 영위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초조함과, 승리하면 모든 것을 짓밟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권위주의. 이 모든 것 속에 파시즘은 오늘도 살아 있다.(25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