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터
유즈키 아사코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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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 cm의 큰 키에 50킬로가 넘지 않는 마른 체형의 기자 리카는 <주간 슈메이>의 기자다. 세 남성을 살해했다는 혐의로 구속된 가지이를 인터뷰하기 위해 갖은 방법을 고심하던 그녀는 친구 레이코의 조언에 따라 ‘레시피’를 빌미로 그녀와 만나는 데에 성공하게 되고 그렇게 이야기는 시작된다. 매번 특종을 터트리는 실력 있는 기자, 리카는 첫 여성 데스크가 되는 것이 목표이다. 삼십 대 중반의 여자이자 남자친구도 있지만, 결혼이라는 것, 아이의 엄마가 된다는 것보다는 기자로서의 성공과 성취를 지향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래서 근 600쪽에 달하는 긴 소설 속에서 집안일을 잘 하고 요리를 잘 하고 싱크대를 잘 닦는 여성들과 리카가 비교되어 보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리카의 요리도 어쩌면 그런 맥락에서 그녀에게 만족감을 주는 건지도 모른다. 어느 누군가가 아닌 나를 위한 파스타, 나의 만족을 위한 초대 말이다.


가지이는 세 남자를 죽음으로 내몬 마성의 여자이다. 아니, 외로움이라는 구덩이에 빠져 허우적대는 결핍이 가득한 존재이다. 아니, 어쩌면 그 어떤 다른 무언가일 수도 있다. 작가의 의도대로 가지이에 대한 나의 감상이 바뀌었는지, 다른 독자들도 나처럼 다른 감정을 느꼈는지, 아니면 나만 그런 감정을 느끼는지는 모르겠지만, 가지이는 리카가 그녀를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점차 다른 인상을 주는 인물이었다. 처음엔 사건의 진실이 궁금했고, 중간에는 리카를, 레이코를, 또 다른 사람들을 자신의 생각대로 움직이게 하는 그 마성의 매력(?)이 궁금했으며, 마지막에는 그럼 그렇지 하다가도 괘씸한 마음이 들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실감 나는 음식 묘사는 절로 입맛을 다시게 한다. 그녀의 레시피를 따라 파스타 면을 삶고 싶어지고, 또 버터를 입안 가득 머금고 싶어진다.


리카가 50킬로에서 55킬로, 56킬로, 59킬로가 되면서 맞닥뜨려야 하는 사람들의 시선과 일본 사회의 통념을 깨부수는 것, 그리고 어떤 점에서 보면 완벽한 커리어 우먼이었던 과거의 자신을 또 다른 방식으로 성장시키는 리카의 모습은 참 흥미롭다. 그녀를 둘러싼 모든 이들, 특히 자신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해주는 친구의 존재에 감사하다 말하지만, 어쩌면 그런 관계를 만들고 유지하고 계속될 수 있도록 유지하는 것은 그녀 자신이 아니었나 싶다. 누가 부탁한다고 그 부탁을 척 다 들어주지 않는다는 것,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제일 잘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니던가.


가지이와 '버터'를 중심으로 한 요리들을 통해 리카가, 또 리카의 주변인들이 겪는 일들, 또 가까웠던 관계가 멀어지고 얽혔던 관계가 풀어지는 것,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스스로를 억압하고 있던 트라우마를 벗어던지는 주인공의 성장기를 보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봤으면 좋겠다. 



리카는 리카가 없는 곳에서 리카를 아는 사람들끼리 친해져서 새로운 관계가 생겨도, 여러 방향에서 리카 얘기를 해도 별로 신경 쓰이지 않지? 그런 사람 상당히 드물어. 다들 손해 보지 않으려고, 자기가 갖고 있는 것을 지키는 데 필사적이잖아. - P450

당신 대신에 내가 먹고, 느끼고, 봐요. 당신 몸의 일부가 되어 세상과 만나고 있어요. 내가 이곳에 오는 한, 당신은 적어도 영혼만은 자유예요. - P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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