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 끝에서 세상에 안기다 - 암을 치유하며 써내려간 용기와 희망의 선언
이브 엔슬러 지음, 정소영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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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엄마의 몸과 다른 내 몸을 경멸했다. 아빠가 그 안으로 밀고 들어와 더럽혔을 때 내가 비워낼 수밖에 없었던 내 몸. 그래서 나는 계속 내달리고 성취하도록 프로그래밍이 된 숨 가쁘고 탐욕스러운 기계가 되어 살았다.”(p. 15) 이 책을 손에 들고 책장을 넘긴 지 얼마 되지 않아 이 문장을 만났을 때, 나는 내 몸을 곧추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저자 이브 엔슬러에 대해 아는 건 없었다. 이번에 이 책을 만나고 나서야 베스트셀러 [버자이너 모놀로그]의 작가이며, 국내에 이미 몇 권의 저서가 번역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뿐. 그런 이브 엔슬러의 자궁에서 암세포가 발견된 날이 2010년 3월 17일이라니, 거의 5년이 다 되어간다. [절망의 끝에서 세상에 안기다]는 암에 걸린 이브 엔슬러가 자신의 암 치료 과정에서 경험한 바를, 정말이지, 질릴 정도로 사실적으로 기록한 책이다.

 

저자 스스로가 “스캐닝”이란 표현을 쓰기도 했지만, 이브 엔슬러의 글쓰기는 놀라울 정도로 솔직하다. 어쩌면 이렇게 솔직할 수 있을까. 나는 익명으로 글을 쓰는 이 인터넷공간에서도 감추고 싶은 것은 어떻게 해서는 에둘러 쓸 때가 많은데 말이다. 저자는 아빠에게 당한 성폭력의 경험이나 젊은 시절 난잡한 성생활까지 숨기지 않고 모두 보여준다. 자신의 수술 과정을 묘사하는 대목들도 그 과정이 그대로 머릿속에서 재생될 수 있을 만큼 생생하다. 가령 의사가 관을 삽입해 농양을 빼내는 장면을 묘사한 대목. “미처 알아채기도 전에 도간이 딸린 두꺼운 바늘을 내 수술 부위에 찔러 넣는다. 비명을 지르며 너무 아프다고 말하지만, 그는 멈출 생각도 없고, 제대로 진통제를 놓지도 않고, 내 말을 듣는 것 같지도 않다. 계속 비명을 질러대지만 그는 그저 자신의 일을 계속할 뿐이다.”(p. 87) 이 대목을 읽을 땐 마치 바늘이 내 몸을 뚫고 지나가는 느낌이 들어 내 몸도 아팠다.

 

이브 엔슬러가 이 고단하고 지난한 수술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그녀 곁을 굳건히 지켜준 사람들 덕분이다. 먼저 실제 이브 곁을 지키지 못했지만 정신적으로 함께 했을 콩고 여성들. 강간 때문에 누공이 생긴 콩고 여성들처럼 이브의 몸속에도 누공이 생긴다. 그래서 이브는 수술을 받는 와중에도 “약물이나 컴퓨터 단층촬영, 주머니 같은 호사는 누릴 수도 없는 콩고의 여성들”을 생각한다. 콩고 여성들의 고통과 자신의 고통이 비로소 일치되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여동생 루, 여덟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 의붓아들, 친구 라다, 오빠 같은 제임스 등이 이브와 함께 해주었지만, 역시 ‘방귀 산파’ 신디를 언급해야겠다. 인공 항문주머니를 제거한 후 이브는 방귀를 뀔 수 있을지 두려워한다. “똥 폐소공포증. 내 몸 안의 모든 게 꽉 막혀서 밖으로 나올 방도가 없고 종국에는 터져버리고 말거라는.” 오래 기다려도 방귀가 나오지 않자, 그런 이브를 위해 찾아온 자원봉사자 신디는 이렇게 말한다. “방귀는 내 귀에는 음악 같아요. 나는 방귀가 아주 반갑답니다. 그래서 내가 온 거예요. 부끄러워할 것 없어요. 방귀를 뀌어봐요.”(p. 211) 신디의 극진한 안마로 이브가 그렇게 기다리던 “뽕” 소리를 듣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자신이 인간에 대한 믿음을 여전히 지닐 수 있었다면 그건 위대한 인물들 덕분이 아니라 경제적 보상에 대한 기대 없이 약한 이들을 돌보는 신디들 덕분이라고 이브는 말한다.

 

“타인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는가.” 이 오래되고 낡아빠진 질문. 그러나 이 질문을 나는 머릿속에서 다시 꺼내보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저자가 말하는 “깊이 욱신거리는 질의 고통”을 알지 못한다. 나는 이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몸이 떨린다고 말하고 상상하기조차 저어하고 있다. 그러면서 혹시 나 자신은 안도하고 있는 건 아닌가. 이 책의 저자가 겪어야 했던 고통이, 콩고의 수십 만 여성들이 감내해야 했던 고통이 동아시아의 중진국에서 태어난 남성인 나 자신에게는 해당되지 않으니 다행이라고 안도하고 있지는 않는가. 사실 이러한 내 자기 검열마저도 고통의 당사자들에게는 얼마나 먼 이야기일 것인가. “나는 피였고 똥, 오줌, 고름이었다.”(p. 20) “콩고에서 누공은 강간 때문에 생긴다. 특히 집단 강간이나, 병이나 나무 막대기 같은 이물질을 사용한 강간.”(p. 57) 이런 문장과 마주했을 때, 기가 질리지 않기는 어렵다. 상상하는 순간 그 이미지는 섬뜩한 공포가 되어 내 가슴을 비수처럼 찌른다. 여성들의 학대 받는 몸에 대해 나는 얼마나 무감각했던가. 수많은 오락영화 속에서 여성의 몸이 전시되고 폭력의 대상이 될 때, 나는 그 광경을 낄낄거리며 보지는 않았나.

 

이 책을 읽으며 나는 계속 약한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작은 것, 부드러운 것, 부서지기 쉬운 것, 연약한 것. 나는 무슨 거대한 것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거나, 내가 거창한 일을 해야만 누군가를 도와줄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아마 세상 살이에 좀 지쳐 있었나 보다. 그러나 이브 엔슬러의 이야기를 읽고는 내 생각이 틀렸음을 확인한다. 이브 엔슬러가 수많은 여성들에게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것은 그녀가 위대한 인물이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약함을 숨기지 않고 그 약함으로 약한 자들을 돕기 때문이다. 이브 엔슬러의 마지막 당부는 이 것이다. “동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강의 일부임을 아는 사람들로부터 변화는 생겨날 것이다. 당신의 질병을 이겨내고 싶다면 아픈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라. 배고픔을 잊고 싶다면 친구에게 먹을 것을 줘라.”(p. 240) 그것을 잊지 말자. 지금 내 현실에 불평하지 말고, 쓸 데 없는 일에 시간 낭비하지 말자. 그리고 그 사람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 이것이 이 고통스런 책을 다 읽고 난 나 자신과 하는 약속이다. 지금, 이 시간, 어딘가에는 지옥을 경험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인간에 대한 믿음을 여전히 지닐 수 있었다면 그건 위대한 발명가나 예언자적 시인 때문도 아니고 뇌수술 전문의나 심지어 간디 같은 인물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신디 같은 이들, 매일 아침 일어나 가족의 식사를 챙겨주거나 병약한 부모님을 돌봐준 뒤, 눈 덮인 시골길이나 매연 가득한 고속도로를 달려 병원이나 요양원, 정신병원, 고아원 등을 찾는, 눈에 띄지 않고 조용한, 보통 보수가 전혀 없거나 형편없는 보수를 받는 신디들이다. 보통 인정도 못 받는 채 그들은 가난한 이, 잘난 이, 누추한 이, 병든 이, 타락한 이를 돌보는 것이다. p.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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