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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6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이방인을 위한 시지프 신화: 이방인 그리고 시지프 신화 (1) - 알베르 카뮈
길고 긴 길을 돌아와 이제 본격적으로 『이방인』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먼저 『이방인』의 내용은 아주 간단합니다. <1부> 시작에서 주인공 뫼르소는 요양원에 계신 어머니의 부고를 듣습니다. 장례식을 치르고 다음날 전 직장에서 알던 ‘마리’라는 여자를 만납니다. 같은 층에 사는 이웃 ‘레몽’과 친해집니다. 레몽 친구의 초대로 마리와 뫼르소, 레몽, 레몽의 친구 부부는 바닷가에서 놀기로 합니다. 태양이 내리쬐는 그곳에서 레몽과 사이가 좋지 않은 아랍인 무리를 마주칩니다. 약간의 다툼이 발생합니다. 이후 혼자 떨어져 해변을 거닐던 뫼르소가 다시 아랍인을 마주칩니다. 햇볕이 내리쬡니다. 뫼르소가 아랍인을 향해 총을 발사합니다. 한 발. 그리고 잠깐의 휴지. 다시 네 발. <1부>가 끝납니다. <2부>에서 뫼르소는 재판을 받습니다. 1년을 걸친 재판 끝에 뫼르소에게 사형 선고가 납니다. 사제가 뫼르소를 찾아옵니다. 뫼르소는 화를 냅니다. 그리고 이야기가 끝납니다.
그렇죠. 이야기는 참 어려울 게 없습니다. 하지만 앞서 말한 대로 뫼르소의 언행은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많습니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양로원으로부터 전보를 한 통 받았다. ‘모친 사망, 명일 장례식. 근조(謹弔).’ 그것만으로써는 아무런 뜻이 없다. 아마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커피를 마셨다. 그러자 담배가 피우고 싶어졌다. 그러나 나는 엄마의 시신 앞에서 담배를 피워도 좋을지 어떨지 몰라 망설였다. 생각해 보니, 조금도 꺼릴 이유는 없었다.
아름다운 하루가 시작되려는 참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야외에 나가 본 일이 없었다. 그래서 엄마 일만 없었다면 산책하기에 얼마나 즐거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일요일이 또 하루 지나갔고, 엄마의 장례식도 이제는 끝났고, 내일은 다시 일을 시작해야 하겠고, 그러니 결국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을 했다.
초반부의 몇 구절만 뽑아보았습니다. 어떤가요? 뫼르소가 조금 이상해 보이시나요?
뫼르소의 이러한 언행은 작품 전체를 관통합니다. 엄마가 죽었는데 특별히 슬퍼하는 티를 내지 않습니다. 상사가 좋은 기회를 주어도 관심 두지 않습니다. 마리와 함께하지만, 마리를 사랑한다고 이야기하진 않습니다. 갑작스레 살인을 저지릅니다. 심문 과정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행위를 후회하거나 감옥 생활을 크게 괴로워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이방인』을 읽고 나서 오죽하면 뫼르소가 제정신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는 분들도 많습니다. 정말 그런 걸까요? 뫼르소는 무정한 인간일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뫼르소는 무정한 인간이 아닙니다. 그 역시도 감정을 느낍니다. 다만 그 감정을 겉으로 티 내지 않는 사람일 뿐입니다. 그리고 과장해서 말하는 법 없이 느낀 그대로 생각하고 말하죠. 다시 한번 뫼르소의 생각을 살펴보죠.
나는, 일요일이 또 하루 지나갔고, 엄마의 장례식도 이제는 끝났고, 내일은 다시 일을 시작해야 하겠고, 그러니 결국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을 했다.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물리적으로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죠. 엄마의 장례식이 끝나고 다시 뫼르소는 일상으로 복귀하여 이전과 같이 일을 하겠죠. 하지만 이 말이 뫼르소의 내적인 변화 역시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살라마노 영감이 개를 잃어버려 우는 소리를 들었을 때 뫼르소는 엄마를 떠올립니다. 뫼르소는 특정한 의미를 부여하여 설명하지 않을 뿐입니다.
그날 마음이 아팠냐고 그는 나에게 물었다. 이 질문은 나를 몹시 놀라게 했다. 만약에 내가 그런 질문을 해야만 할 입장이었다면 나는 매우 거북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자문해 보는 습관을 좀 잃어버려서, 정확하게 설명하기는 어렵다고 대답했다. 물론 나는 엄마를 사랑했지만 그러나 그런 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거다.
분명 뫼르소는 엄마를 사랑했습니다. 실제 그렇게 말하기도 하고요. 그건 남들과 다를 게 없는 부분이죠. 다만 뫼르소가 이 부분에서 놀란 것은 엄마의 죽음이 슬픈 것은 당연한데도 그런 질문을 듣는 것이 아무래도 이상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죠.
그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원망하고 있었다. 나는 내가 다른 사람들과 다를 게 없다는 것, 조금도 다를 게 없다는 것을 그에게 딱 부러지게 말하고 싶었다.
뫼르소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하고, 기뻐하고, 화낼 줄 아는 사람입니다. 다만 그 표현이 매우 서툴 뿐이죠. 뫼르소는 무정한 인간이 아닙니다. 그 역시 우리와 같은 인간입니다.
그리하여 짤막하고 요란한 소리와 함께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나는 땀과 태양을 떨쳐 버렸다. 나는 한낮의 균형과, 내가 행복을 느끼고 있던 바닷가의 예외적인 침묵을 깨뜨려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나는 그 움직이지 않는 몸뚱이에 다시 네 방을 쏘았다. 총탄은 깊이, 보이지도 않게 들어박혔다. 그것은 마치, 내가 불행의 문을 두드리는 네 번의 짧은 노크 소리와도 같은 것이었다.
처음 읽고 나면 가장 의문이 드는 부분입니다. 도대체 뫼르소는 왜 총을 쏜 것일까요? 그리고 왜 첫 발과 둘째 발 사이에 잠깐 멈추었을까요? 이유를 묻는 판사에게 뫼르소는 대답하지 않습니다.
다시 한 번 붉은 바닷가 모래밭이 눈에 선하게 떠올랐고 이마 위에 타는 듯 뜨거운 햇살이 느껴졌다. 이번에는 그러나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뫼르소는 그럴듯한 근거를 들어 총을 쏜 이유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애당초 뫼르소는 그런 인간이 아니니까요. 다만 그가 생각나는 것은 붉은 모래밭과 뜨거운 햇살입니다. 그러나 모래밭과 햇살을 이유로 말하는 것은 스스로 생각해도 좀 이상하죠. 그래서 뫼르소는 그냥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뫼르소가 무정하고 악한 인간이라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이후 재판에서 이유를 말해보지만 역시 웃음만 살 뿐입니다.
나는 빨리 좀 뒤죽박죽이 된 말로, 그리고 우스꽝스러운 말인 줄 알면서도, 그것은 태양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장내에서 웃음이 터졌다.
뫼르소는 부조리한 인간입니다. 그는 어떤 것이 옳고 그르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해석하거나, 평가하거나,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런 행위는 주어진 것을 인간적인 언어로 치환하여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일 뿐입니다. 『시지프 신화』에서 읽었듯 부조리한 인간은 평준화의 방식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부조리한 인간은 있는 그대로를 말하고 보는 인간입니다. 유달리 독특하여 무정하게까지 보이던 뫼르소 언행의 이유입니다.
세상에 산재하는 부조리를 느끼지 못한 이들의 눈에는 뫼르소는 이해 가지 않는 사람이지요. 대표적으로 뫼르소의 유죄를 주장하는 검사가 그렇습니다. 그는 종교를 믿고 삶의 이유를 가진 인물입니다. 검사는 어떻게 해서든 뫼르소의 행동에 의미와 동기를 부여합니다. 그리하여 뫼르소의 살인이 어머니의 죽음에서부터 모두 예고된 그리고 의도를 가진 범행이라고 주장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뫼르소가 보기에 그건 말도 안 되는 말입니다. 어머니의 죽음에서 자신이 눈물을 흘리지 않았던 것과 이후의 살인은 하등의 인과관계는 없는 것입니다. 살인은 그저 태양 때문이었습니다.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오직 셀레스트만이 뫼르소를 조금 이해했을까요?
다시, 나의 범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자 그는 증언대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뭔가 할 말을 미리 준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 생각으로는 그건 하나의 불운입니다. 불운이 어떤 것인지는 누구나 압니다. 불운이라는 건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에, 또! 내가 볼 때 그건 하나의 불운입니다.”
어찌할 도리가 없는 불운. 빠져나갈 수 없는 부조리. 누구도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 그러니 뫼르소는 스스로를 이방인이라 느낍니다.
또, 내가 어쩐지 침입자 같고 남아도는 존재인 것 같다는 기묘한 느낌도 들었다.
그 선고가 내려진 순간부터 그 결과는, 내가 몸뚱이를 비벼 대고 있던 그 벽의 존재와 마찬가지로 확실하고 심각한 것이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뫼르소에게 사형 선고가 내려집니다. 법정은 뫼르소를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오히려 소설과도 같은 검사의 말에 동조하여 사형 선고를 내리죠. 사형 선고가 내려진 이후 뫼르소에게 죽음은 단단한 벽처럼 실재합니다.
뫼르소는 알고 있습니다. 삶에 의미 따위는 없고 죽음은 인간인 이상 누구에게나 예고된 결말이라는 것을.
그러나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결국, 서른 살에 죽든지 예순 살에 죽든지 별로 다름이 없다는 것을 나도 모르는 바 아니었다.
사형을 기다리고 있는 뫼르소에게 부속 사제가 찾아옵니다. 사제는 뫼르소에게 신을 믿으라고 종용하죠. 하지만 우리는 이제 알고 있습니다. 부조리한 인간은 그런 ‘비약’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절망한 것이 아니라고 그에게 설명했다. 다만 나는 두려울 뿐이었고 그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렇지만 당신이 당장 죽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장차는 죽을 것입니다. 그때 가서도 같은 문제가 생길 것이오. 그 무서운 시련을 당신은 어떻게 맞을 것입니까?” 나는, 내가 지금 맞고 있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그 시련을 맞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당신은 그럼 아무 희망도 없이, 죽으면 완전히 없어져버린다는 생각으로 살고 있습니까?” 하고 말했을 때, 그 목소리 또한 떨리지 않았다. “그렇습니다.” 하고 나는 대답했다.
부조리한 인간.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아는 인간. 뫼르소는 비약을 거부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그럴듯하게 바꾸는, 마치 희망이 있는 것처럼 말하는 사제를 그리고 그가 말하는 것을 뫼르소는 거부합니다.
그는 또 하느님 이야기를 꺼내려고 했지만 나는 그에게로 다가가며, 나에게는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는 것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설명하려 했다. 나는 하느님 이야기로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뫼르소는 처음으로 격정적으로 폭발하여 외칩니다.
그의 신념이란 건 모두 여자의 머리카락 한 올만 한 가치도 없어. 그는 죽은 사람처럼 살고 있으니,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한 확신조차 그에게는 없지 않느냐? 보기에는 내가 맨주먹 같을지 모르나, 나에게는 확신이 있어. 나 자신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확신. 그보다 더한 확신이 있어. 나의 인생과, 닥쳐올 이 죽음에 대한 확신이 있어. 그렇다, 나한테는 이것밖에 없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이 진리를, 그것이 나를 붙들고 놓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굳게 붙들고 있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중요한 것은 없다. 나는 그 까닭을 알고 있다. 그 역시 그 까닭을 알고 있는 것이다. 내가 살아온 이 부조리한 전 생애 동안, 내 미래의 저 밑바닥으로부터 항시 한 줄기 어두운 바람이, 아직도 오지 않은 세월을 거슬러 내게로 불어 올라오고 있었다.
죽음에 대한 확신. 희망이 없다는 확신. 부조리의 존재에 대한 확신. 이 모든 것으로부터 뫼르소는 자유를 느낍니다. 부조리에 일관된 자세로 반항합니다. 오직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소진하겠다는 열정만을 느낍니다.
나도 또한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마치 그 커다란 분노가 나의 고뇌를 씻어 주고 희망을 가시게 해주었다는 듯, 신호들과 별들이 가득한 그 밤을 앞에 두고,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가 그렇게도 나와 닮아서 마침내는 형제 같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는 것을 느꼈다. 모든 것이 완성되도록, 내가 덜 외롭게 느껴지도록, 나에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사형 집행을 받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뿐이었다.
너무 자극적인가요? 하지만 사실입니다. 궁극적으로 인간은 모두 사형수입니다. 태어난 이상 인간에게 죽음은 예고된 결말로 언제나 공고히 서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불로장생을 꿈꾸며 죽음을 피하려 했던 어떤 이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같은 결론을 피할 수는 없었죠.
궁극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는 아이러니하게도 매일 내일이 오기를 고대합니다. 반복되는 삶. 정해진 죽음. 내일을 바라는 마음. 인간은 부조리를 느낍니다. 카뮈는 부조리를 결론이 아닌 출발점으로 삼았죠.
지금까지는 부조리가 결론으로 간주되어 왔지만 이 논고에서는 그것을 하나의 출발점으로 삼는다는 점을 지적해 두는 것이 좋겠다.
『시지프 신화』에서 이야기하고, 『이방인』에서 보여주었습니다.
이 모든 이야기가 이해가 가시나요? 이해가 가지 않으신다면 앞서 말한 것처럼 저의 능력 부족이라고 생각해주시길 바랍니다. 열심히 준비하였다고 생각하지만, 저 역시 전문가가 아닌 한 독자로서 부족한 점이 있음은 분명하니까요. 다만 바라건대 찾아가기 어려운 길에 최소한 틀린 방향을 제공하지 않고 카뮈가 생각했던 그 무언가의 테두리에라도 닿을 수 있는 정도의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물론 이해했다고 하여도 동의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생에 대한 카뮈의 시각과 부조리에 대한 이야기에 무작정 고개를 끄덕일 수는 없죠. 동의하는 부분도 있을 것이고, 그렇지 못한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좀 더 생각이 필요한 부분에서 우리 나름대로 카뮈의 입장에서 혹은 다른 입장에서 논지를 이어갈 수도 있겠죠. 그 어느 쪽이든 좋습니다. 생에 대한 고민은 생에 대한 시각을 넓혀주고 보지 못했던 인식의 어두운 구석에서 낯선 야생화 한 송이 발견할지도 모르니까요.
그러니 언제나 좋은 책을 읽는 것은 정말 설레는 일입니다. 보지 못했던 것을 보고, 보았던 것을 새로이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생각의 저변을 넓히고 ‘나’라는 것을 읽기 전보다는 조금 더 단단하게 만들어가는 느낌입니다.
『이방인』을 읽어보지 못했던 분들과 『이방인』을 이미 읽어보셨던 분들 모두 뫼르소의 마지막을 지켜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부조리, 자유, 반항, 열정. 카뮈의 『시지프 신화』와 『이방인』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