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가는 대로
수산나 타마로 지음, 최정화 옮김 / 밀리언하우스 / 2009년 4월
평점 :
절판


  

 

                      
                               - 밀리언하우스 <마음 가는 대로>
  

 

 

아주 잠시동안, 그 애의 껍데기가 벌어졌고, 그 좁은 틈으로 내가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기회였지.
그럴 수만 있었다면 그 애의 인생에서 흔들리지 않는 중심이 되어 줄 수 있었을 텐데.

아주 희미한 금이 있을 뿐이였어.
그걸 넘느냐 넘지 않느냐는 한순간의 선택이였어.
그 순간이 지난 후에야 선택의 중요성을 깨닫고 결국 후회하게 되지.
사랑은 때로 아주 정확하고 단호한 행동을 필요로 하지.
 
나이가 들어서야 운명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구나.
먼 훗날에야 길은 원래부터 있었고, 누군가 나를 위해 흔적까지 남겨 두었다는 걸 알게 될 테지.
                                   - 밀리언하우스 <마음 가는 대로>의 본문(p73~74) 중에서.

 
 

   짧은 금발, 영혼이 비칠 것만 같은 눈동자와 깊이를 짐작할 수 없는 미소, 나는 수산나 타마로를 처음 만났다. 그녀의 모습도, 그녀의 분위기도 그녀의 작품들도 내게는 모두 첫 경험이다. 그녀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이 낯선 것이지만, 그녀의 작품만은 내게 낯설지 않다. 마치, 소박한 울타리로 둘러싸인 뜰을 지나, 작은 문을 열고 들어서면 따뜻한 저녁준비로 한창인 그녀를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은, 오래된 익숙함들을 지녔다. 익숙한 냄새와 익숙한 평온함을 준다. 그것이 무엇에서 기인하는 것인지 나는 모른다. 내 기억이나 경험이 가진 무엇이 그것들과 연결되어 있는지 나는 아직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의 글은 나조차도 잊고 살았을지 모르지만, 내 과거나 심장의 어딘가에 품고 살았을, 흉터가 되어 딱딱하게 굳어져버린 차가운 기억이나  괴롭고 아픈 마음의 상처들을 들여다 볼 수 있게 한다. 나는 잠시, 나를 평온하게 하는 기억들과 흐트러지지 않은 호흡으로 많은 것들을 마주할 수 있고, 때로 그것들을 어루만지거나 다독일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나는 지금 부엌에 앉아 네가 쓰던 낡은 연습장을 펼쳤어.
유언장을 쓰는 거냐고? 그건 아니야.
내가 필요할 때마다 네가 꺼내 볼 수 있는
몇 년이 지나도 네 곁에 머물 수 있는 글을 쓰려 한단다.
                      - 밀리언하우스 <마음 가는 대로>의 처음(p13) 중에서.

 
   모두가 떠나버린 집에 홀로 남겨진 그녀는, 그렇게 처음 이 글을 시작한다. 그녀와 손녀가 경험했던 거리는, 엄마와 딸의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와 단절과 외로움보다 더 크고 깊을지도 모를 일이다. 서로의 차이를 쉽게 극복할 수 없었던 두 사람의 외로움과 슬픔과 단절은 분노와 이별로 치달았다. 서로에게 편지조차 허락하지 않았지만,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느낀 그녀는 부쳐지지 않을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오래된 연습장 속에서 차곡차곡 쌓여서, 이 낡은 집과 정원과 늙은 개와 특별한 장미 한 그루처럼 그녀의 일부가 되어, 그녀의 일상의 기록이 되어 남겨지게 될 것이다. 그것이 자신의 죽음을 알리는 일보다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언젠가 손녀가 이 익숙하고 오래된 옛집을 다시 찾아 왔을때, 그 고마운 방문을 환영할 수 있는 '가장 따뜻한 방법'이라고 믿는 것이다.

   살아가며서 우리는, 때때로 자신에게 온 기회들을 너무 쉽게 놓쳐버리는 경향이 있다. 사랑한다거나 미안하다는 말을 할 기회, 말없이 따뜻하게 안아주고 믿고 있다는 확신을 보여 줄 수 있는 기회, 내가 쏟아내는 말이나 무심함보다 더 복잡한 내면의 생각들을 보여줄 기회들을 잃어 버리거나, 혹은 스스로 놓아 버리기도 한다. 망설이고 주저하고, 때로는 감추고 껍데기를 닫아버리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비겁했다거나 무심했다는 것을 깨닫는 일은 쉽지 않다. 스스로 지혜롭고 따뜻한 사람이기를 원하지만, 그것은 쉽지 않다. 때 늦은 후회를 할 때라야 비로소 그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 순간이였는지, 얼마나 절실한 순간이였는지를 깨닫는 것이다. 
 
   가족에 대해 생각한다. 내 삶의 과거와 추억들을 가슴에서 꺼내보고 더듬어 본다. 어리고 약한 어린시절의 기억과 감정을 기억해내고, 내 어머니와 할머니의 삶을 어렴풋이 퍼즐 조각처럼 이리저리 맞대어 본다. 마치 한 사람의 삶은 긴 물줄기처럼 어머니와 딸에게로 끊임없이 되물림되는 것을 조심스럽게 그려본다. 자신이 가야 할 길을 혼자 닦아 나가는 일꾼처럼 자신을 여기다가, 수산나 타마로 그녀의 말처럼, 나는 때때로 운명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앞으로 나아가는 일 뿐이라는 것을, 그것이 가장 최선임을,

   사람이니까, 가족이니까 대립과 갈등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지도 모른다. 서로 다른 세대의 시간과 외모와 가치 속에 살아가는 우리가 그것들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음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정말로 두려워 해야 할 일은 단절이 아닐까. 사랑한다는 것을 말할 기회, 믿고 있음을 말할 기회, 기다리고 있음을 말할 기회와 그것들을 잃어버리는 일은 아닐까. 각자 자신의 삶에서 치열하고 바쁘게 살아가는 동안, 자신의 삶과 가치 안에서 많은 것들이 새로 이루어지고 허물어지고 투쟁하고 깨닫는 동안, 그것이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고 열심히 살아가는 일이라고 확신하는 동안, 그럼에도 우리 가슴은 왜 때때로 외롭고 무겁고 허전하다고 느끼는 것일까. 수산나 타마로는 스스로 묻는다. 우리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아주 심각학 변해버린 것은 아닌지. 그렇다고 해서 이제껏 겉으로 드러난 빈곤하고 결핍된 삶에 눈을 뜨기만 한다면 그것에 대한 어떤 질문이나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될 것인지. 마치 술에 취했을 때처럼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제 자리로 되돌아 올 수 있을 것인지. 
 
   그녀는 지혜로웠다. 그녀가 살아서 보여 주고 들려 주었을 많은 모습들만이 그녀의 진정한 모습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녀에게서 내 어머니와 할머니를 보았다. 또한 언젠가는 그것이 내 모습이기도 간절히 바란다. 그녀가 그 오래된 집에 남겨 두었을 편지들은, 바로 세상의 모든 딸들에게 남기는 것이였으리라. 소박한 울타리를 지나 작은 문을 열고 들어서면 저녁식사 준비로 분주한 그녀를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았던 것은, 그 빈 집이 내 마음 속 어딘가에도 존재하기 때문은 아니였을까. 비어 있으리라는 생각, 그 황량하고 고독한 순간들과 마주할 자신이 없어 기억속에서 잊혀지길 기다리며 묻어버린 내 기억들의 조각은 아니였을까. 나를 기다리고 있었을 그 오래된 빈 집으로 향하는 길을 미처 찾아내기도 전에, 내가 너무 먼 길을 돌아 온 것은 아니기를 바란다.
 

네 앞에 수많은 길들이 열려 있을 때, 그리고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할지 모를 때, 그냥 아무 길이나 들어서진 마.
내가 세상에 나오던 날 그랬듯이, 자신있는 깊은 숨을 들이쉬며 잠시 기다려 보렴.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말고, 조금만 더 기다리고 또 기다려.
네 마음에 가만히 귀를 기울여 봐.
그러다 네 마음이 말을 할 때, 그때 일어나 마음 가는 대로 가거라.
                                       - 밀리언하우스 <마음 가는 대로>의 본문(p225~226)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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