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Ritournelle > 기술 속 사상 #5: 기술(비인간)도 인간과 같이 행동한다

[기술속사상] 기술(비인간)도 인간과 같이 행동한다/홍성욱
총(비인간)과 사람이 만났을 때
» 요르단강 서안 헤브론에서 총을 겨누고 있는 이스라엘군 병사 앞으로 팔레스타인 어린이가 지나가고 있다. 사람들은 총이 사람을 죽이는가 아니면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가를 놓고 논쟁하곤 했다. 라투르는 총과 사람을 따로따로 생각하는 것을 비판하면서 ‘총을 쥔 사람’이라는 잡종적 존재가 사람과 총 모두의 목적을 바꾸면서 새로운 행위 가능성을 열어준다고 갈파했다. 헤브론/ 로이터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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쏘는 행위는 총도 사람도 아닌
총과 사람의 합체인 새 ‘행위자’가 하는 것
사회결정론·기술결정론 모두 비판
인간과 기술, 주체-객체 아닌 대칭관계로

기술 속 사상/⑤ 급진주의자-브뤼노 라투르

기술은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인간은 의지를 가진 살아 있는 주체이고 기술은 자체 생명력이 없는 기계덩어리다. 인간은 자신의 뜻에 따라서 기술을 바꾸고 목적을 위해 기술을 사용한다. 그렇지만 하이데거가 간파했듯이 어떤 기술은 인간을 옭죄고 지배한다. 미국의 기술철학자 랭던 위너는 이렇게 자체 생명력을 가진 기술을 ‘자율적 기술’이라고 명명했다.

프랑스의 과학기술학(STS)자인 브루노 라투르(Bruno Latour)는 기술이 사회적 필요에 따라서 마음대로 바뀔 수 있다고 보는 시각과 기술이 자율성을 가지고 인간을 지배한다는 시각을 모두 비판한다. 전자는 기술이 사회적 필요에 따라서 전적으로 구성된다는 사회구성주의적 시각이고 후자는 기술이 거꾸로 인간의 필요와 행동을 결정한다는 기술결정론적인 시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라투르의 비판은 이 두 입장의 중간을 취하는 식이 아니다. 그는 기술을 이해하는 훨씬 더 급진적 시각을 제공하는데, 그것은 기술과 같은 비인간(nonhuman)을 인간과 같은 행위자(actor)로 보는 것이다.

과속방지턱 고통경찰 대체

라투르가 좋아하는 예는 우리가 아파트 단지나 학교 앞에서 자주 보는 과속방지용 둔턱이다. 마음이 급한 운전자들은 “이웃이나 학생들을 위해서 과속을 하지 맙시다”라는 도덕적인 문구가 씌어진 표지판을 무시하고 속도를 내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고 골목골목마다 교통경찰을 배치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래서 발명된 것이 과속방지용 둔턱인데, 운전자들은 둔턱 앞에서 자연스럽게 속도를 줄인다. 그런데 운전자가 이렇게 속도를 줄이는 이유는 그가 이웃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속도를 내서 둔턱을 넘었다가는 자기 차의 서스펜션에 무리가 가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즉 둔턱은 “이웃이나 학생들을 위해서 과속을 하면 안된다”라는 (사람들이 잘 지키지 않는) 도덕적 심성을 “과속을 하면 내 차의 서스펜션이 고장날 수도 있다”라는 (사람들이 잘 지키는) 이기적 태도로 바꾸는 역할을 한다.

둔턱의 역할은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라투어는 둔턱을 “잠자는 경찰”이라고 부르는데, 여기서 볼 수 있듯이 둔턱은 교통경찰이 했던 역할을 대신한다. 그 결과 교통경찰은 다른 일을 하거나 다른 곳에 투입될 수 있다. 또 둔턱은 훌륭한 도덕선생님의 역할도 수행한다. 아파트 단지 내에서 과속을 하는 운전자들과 주민 사이의 갈등과 싸움을 미연에 방지하는 역할도 수행한다. 이렇게 기술은 인간이 했던 역할을 대신 수행하고 이를 통해 인간의 역할을 바꿈으로써 우리 사회의 훌륭한 행위자가 되는 것이다.

라투르는 총기의 예도 즐겨 사용한다. 미국에서 총기의 사용을 엄격하게 규제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총이 사람을 죽인다”라고 외친다. 총이 없으면 일어나지 않을 살인 사건이 총 때문에 발생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총기 사용의 규제에 반대하는 그룹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 총이 아니라 사람이라고 강조하는데, 이들의 얘기는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총은 중립적인 도구이고 용도에 따라서 좋은 목적으로도 혹은 나쁜 목적으로도 사용될 수 있기 때문에, 문제는 총이 아니라 사람에 있다는 것이다.

라투르는 전자를 기술결정론, 후자를 사회결정론으로 분류하면서 이 두 가지 입장을 모두 비판한다. 그의 해법은 사람이 총을 가짐으로써 사람도 바뀌고 총도 바뀐다는 것이다. 총을 가진 사람은 총을 가지지 않은 사람에 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달라지고, 마찬가지로 총도 사람의 손에 쥐어짐으로써 옷장 속에 있는 총과는 다른 존재가 된다. 즉 총과 사람의 합체라는 잡종이 새로운 행위자로 등장하며, 이 잡종 행위자는 이전에 사람이 가졌던 목표와는 다른 목표를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원래는 다른 사람에게 겁만 주려 했는데, 총이 손에 쥐어져 있기 때문에 살인을 저지르게 되는 식이다.

‘비인간’의 번식 깨닫는 게 근대

라투르는 서양의 학문이 자연, 사회, 인간만을 다루어왔다는 것을 강하게 비판한다. 자연과학은 자연을 대상으로 하고, 사회과학은 (자연의 일부로서의) 사회를 다루고, 철학과 같은 인문학은 인간을 탐구했는데, 라투르에 따르면 여기에는 모두 기술과 같은 ‘비인간’이 빠져 있다. 과학은 자연을 탐구하기 위해서 인간이 만든 기기와 실험실에 의존한다. 사회를 구성하는 요소들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기술인데, 사회과학자들은 기술에는 관심이 거의 없다. 철학자들은 주체/객체의 이분법에 빠져서, 기술을 저급하고 수동적인 대상으로만 취급한다.

기술과 같은 비인간이 빠져버린 자연과 사회는 ‘근대성’의 골자이다. 결국 라투르에게 기술의 목소리를 복원하고 행위자로서의 이들의 능동적인 역할을 드러내는 것은 서구의 ‘근대적’ 과학과 철학이 범했던 자연/사회, 주체/객체, 인간/비인간의 양분법을 극복하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라투르에게 근대를 극복하는 방법은, 탈근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근대가 시작되던 시점부터 자연과 사회 모두에 기술과 같은 비인간이 엄청난 속도로 번식했음을 인식하는 것, 즉 “우리가 근대인 적이 없었다”(We have never been modern!)는 것을 깨닫는 것부터 시작한다.

과학/기술의 이분법도 라투르의 비판의 화살이 꽂히는 과녁이다. 라투르는 과학과 기술을 대체하는 용어로 ‘테크노사이언스’(technoscience)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기술이 과학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과학과 엔지니어링의 접점이 확산되는 것을 생각하면 과학/기술의 구분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라투르는 주체/객체의 구별도 비판한다. 사람은 대상과 관계를 맺고 대상은 사람과 관계를 맺을 때에만 진정한 의미의 행위자가 되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을 주체, 대상을 객체라고 부르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액터’(actor, 행위자)라는 말 대신에 ‘액탄트’(actant)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이분법 외려 강화했다 비판도

프랑스 과학기술학자 라투르는 미국 소크 연구소에서의 인류학적인 관찰 경험을 바탕으로 1979년에 <실험실 생활>이라는 책을 출판함으로써 화려하게 학계에 데뷔했고, 이후 <행동하는 과학> <우리는 근대인 적이 없었다> <아라미스> <판도라의 희망> <자연의 정치학> 등 주목받는 연구업적을 끊임없이 출판했다. 최근에 그는 인간과 사물이 관계를 맺는 방식에 집중한 예술전시 기획을 총괄하기도 했고, 그 결과를 <아이코노클래시>라는 책으로 출판했다. 안타깝게도 라투르의 책은 국내에 번역되어 소개된 것이 없다.

라투르의 관심은 실험실의 민속지학에서 파리의 실패한 지하철 프로젝트를 거쳐 아마존의 열대림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다. 그렇지만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비판하는 그의 입장은 초기 연구에서 가장 최근의 연구까지를 관통하고 있다. 물론 그의 주장에 대한 비판도 많이 제기되었다. 라투르는 기술이 마치 자기 목소리를 가지고 자신을 대변하는 주체처럼 서술하지만, 사실 그런 서술은 라투르라는 인간이 기술에게 부여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 비판의 핵심이다. 라투르가 기술에게 부여한 특성은 ‘인간다운’ 특성, 즉 마치 인간처럼 행동하고, 반응하고, 실행하는 특성이라는 것이다. 비판가들은 라투르의 이러한 시도가 인간의 역할을 더 강조함으로써 라투르가 부숴버리려고 했던 주체/객체의 구분을 더 강화한다고 주장한다.

라투르의 기술철학은 아직 미완이다. 그의 업적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사람들도 인간/비인간의 구별을 없애고 이 둘을 대칭적으로 생각하자는 라투르의 주장을 충분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렇지만 그의 주장이 인간/기계의 경계가 허물어져서 사이보그들이 급속도로 번식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가 잘 보여주는 것은 인간사회가 기술 없이는 구성될 수도 없고 유지될 수도 없다는 사실이다. 사람은 사람들과의 관계(인간관계, 권력관계) 속에서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물건과, 기술과, 무생물과, 비인간과도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우리가 더 민주적이고 더 바람직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기술의 기능과 역할에, 즉 “물건의 정치학”(politics of things)에 훨씬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데, 이점이 라투르의 기술철학이 우리에게 던지는 핵심 메시지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12461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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