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Ritournelle > * 그리스 시민은 동성애가 명예: 러브, 섹스, 그리고 비극

* 한겨레(2006. 12. 22) /  그리스 시민은 동성애가 명예

후대는 왜 그리스적인 것에 집착할까
사랑·결혼·비극·민주주의 등 오늘의 일상 곳곳에 자취
보편적이던 동성애는 사랑의 자연스러움을
준엄한 법질서는 오늘날의 정치적 혼란을 일깨워
» <러브 섹스 그리고 비극> 사이먼 골드힐 지음. 김영선 옮김. 예경 펴냄. 1만9800원
프로이트가 살아있는 동안 고전 고고학은 가장 인기있는 최신 유행 학문 분야의 하나였다. 슐레이만은 트로이와 미케네를 발굴했고 아서 에반스는 크레타섬에서 미노스왕의 궁전을 발견했다. 고대의 진실을 향해 파내려가는 발굴이라는 모델은 프로이트를 자극했음이 틀림없다. 그리스 땅에 묻혀있던 문화재의 발견에 대한 매혹은 인간의 마음속 탐사 작업으로 전이되었고 자신의 새로운 연구방식을 구현하기 위해 고대 그리스의 모델에 관심을 돌리게 되었다. 그가 발견한 심리현상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이름을 얻었고 그것은 고전의 후광을 입어 곧바로 권위를 갖게 되었다.

19세기 사람들은 모든 그리스적인 것에 집착했고 이런 강박관념은 몸 문화를 변화시켰다. 특히 독일에서 몸 예찬이 무성했다. 집단 도보여행을 하고 운동과 수영을 하거나 함께 훈련을 했다. 그리스문화에 열광한 독일인들은 운동을 독일 국가사회주의의의 열렬한 이상으로 삼았다. 몸에 대한 예찬은 도를 넘어 국가주의와 더불어 아리아인들의 공격성을 조장했다. 극렬 아리아인들은 몸 예찬을 나치 이데올로기와 연관시켰는데 이러한 열성과 19세기의 그리스에 대한 낭만적 애호를 연결짓는데 가장 유력한 근거를 제공한 것이 프리드리히 니체였다.

<러브 섹스 그리고 비극>(예경 펴냄)은 우리 현대인의 자아와 정치사에 대한 사고의 역사가 밀접하게 뒤얽혀 있는 그리스의 일상 속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그리스 시대에는 완벽한 몸의 기준이 되는 것은 남성이었다. 여성의 몸은 일종의 기형으로, 혈액과 체액에 흐르는 관이 서로 연결된 항아리와 같다고 간주되었다. 몸속 관들이 잘 뚫려 있어야 임신할 수 있다고 진단되었다. 그 방법은 여성의 질 속에 밤새 마늘조각을 넣어두었다가 이튿날 아침 입을 통해 냄새가 올라오는가를 살펴보는 희한한 것이었다.

“날 사랑해?” 이 말은 그리스 남성이 여성에게 할 말이 아니었다. 가족의 유지를 위해 결혼생활은 기본이었지만 아내에게 욕망을 느끼는 것은 비극적이거나 희극적인 착오였을 따름이다. 세네카 왈, “아내와 연인처럼 같이 자는 것은 간통만큼이나 혐오스런 짓이다.” 소크라테스는 임종의 침상에서 울고있는 아내를 내보내고 마지막 순간을 남성 친구들과 토론하며 보냈다.

여성의 몸은 기형으로 간주

아테네 시민 성인에게 동성애는 보편적이었으며 일종의 명예로움에 속했다. 대상은 사춘기가 지나 턱수염이 나기 직전의 미소년. “카르미데스의 신장이나 아름다움은 놀라웠으며 모두가 그를 마음에 둔 것 같았다. 사람들은 그 소년이 체육관에 들어섰을 때 벼락을 맞은 듯 눈을 흡뜨면서 혼란스러웠다. 모든 이들이 그를 조각상처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때 나는 소년의 망또 안을 얼핏 보고 흥분해서 더 이상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나는 야수에게 사로잡힌 것 같았다.”(소크라테스) 여성끼리의 구애는 기원전 6세기 초 레스보스 섬에서 연애시를 쓴 사포가 유일하게 전한다. 그리스의 사랑은 자연스러움이 무엇인지, 그런 생각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생각하게 한다.

 

» 레즈비언 하면 떠올리는 레스보스 섬의 연애시인 사포는 그 명성에 비해 알려진 사실은 매우 적다. 그런 탓에 현대인의 섹슈얼리티를 투영하는 캔버스로 적절한 기능을 하게 되었다. 1881년에 그려진 앨머 태디머의 ‘사포’는 여성의 여성에 대한 사랑과 남성에 대한 사랑 사이의 긴장을 암시함으로써 빅토리아 여왕시대의 보수적인 시선을 비켜갔다. 예경 제공
소크라테스도 미소년에 반해

그리스 예술과 철학은 그리스도교에서 철저하게 재활용되었다. 키가 크고 품위있게 차려입고 날개를 가진 천사의 이미지는 승리의 여신 니케의 상에서 영향을 받았다. 로마 미술에서 소년으로 표현되는 욕망의 신인 푸티(큐피드) 역시 그리스도교의 표현양식 안으로 들어왔다. 영혼이 몸의 족쇄에서 풀려 불멸하는 삶을 위해 더좋은 곳으로 가므로 죽음이 두렵지 않다는 소크라테스는 그리스도교인이 보기에 순교자의 선구였다. 그리스도교의 은둔자와 순교자에 관한 많은 이야기는 견유학파의 그것과 아주 흡사하다. 단 섹스는 빼놓고. 장터에서 자위행위를 하다가 들킨 디오게네스는 “배고픔이 이렇게 간단히 해소될 수 있었으면 싶네”라고 눙치며 곤경을 빠져나갔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은 플라톤의 <공화국>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응답이었다.

그리스-로마 문화가 격렬하게 부활한 르네상스. 그 소용돌이 한가운데 에라스무스가 있다. 그가 매혹된 사람은 성서 번역자인 성 히에로니무스. 그의 서간집을 편집하면서 에라스무스는 그리스어판 복음서로 눈길을 주었다. “하늘에서 증거하시는 이가 세분이시니,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이시요, 이 세분은 하나이시라.” 삼위일체의 근거가 되는 <요한1서>의 이 구절을 고대사본에서 찾지 못한 그는 다른 누군가 덧붙인 것이라고 판단해 자신의 판본에서는 그 구절을 빼버렸다.

민주주의 하면 두말할 것 없이 그리스. 페르시아 왕 크세르크세스 대군이 소수의 스파르타군과 대치했을 때. “저들을 복종케하는 왕이 있다면 모르지만 자유민이라는 사람들이 어째서 필사적으로 덤비는가?” 스파르타인 부관의 답. “그들은 자유롭다. 하지만 그들에게 법이라는 지배자가 있다. 그들은 왕보다 법을 두려워한다. 그 지배자가 명령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한다. 그리고 그의 명령은 변덕스럽게 바뀌지 않는다.” 발언의 자유, 법 앞에서의 평등, 책임이 민주주의의 세 뼈대. 아테네의 직접민주주의에서 정치참여는 곧 의사결정 행위였고 실행은 자신에게 부과되었다. 아테네에서 공직을 갖지않은 시민(Idiotes)은 멍청이(Idiot)였다.

니케, 기독교 천사 이미지에 영향

배심원 일과 해군에서 노 젓는 일에 비용을 지불했듯이 연극관람료도 주어졌다. 육체노동 하루 품삯인 은화 두 닢. 그해 시민봉사자 표창, 동맹국에서 보낸 순은막대기 회람, 전쟁고아들의 행진이 끝나면 연극의 막이 오른다. 바람직한 도시국가상을 설파하고 개인의 자아성찰로까지 이어지는 내용이다. 상하 일체였던 연극행위는 시간과 함께 변질되어 19세기 나치 국가주의의 대중조작을 거쳐 할리우드에 이르면 고도의 상업주의 성격을 띤다.

개인과 대기업은 이익만 챙기려들 뿐 책임을 지지 않으려 하고 정부는 권위를 잃고 법 질서가 흐트러진 요즈음, 원형의 고향 그리스를 떠올리면 가슴이 먹먹하다. 몸짱열풍, 찜질방 문화를 그리스시대와 견줘보는 것도 재미있다. 얼핏 추리소설 같은 표지를 들추기가 망서려지지 일단 책을 펴들면 줄줄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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