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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 상 - 도스또예프스끼 전집 ㅣ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이대우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1월
평점 :
절판
츠바이크가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해서 말하길, ‘여러 대립쌍들을 신성한 조화 속으로 구속시키기보다는, 그들을 신과 악마로 나누고, 그 사이의 세계를 더욱 팽팽하게 대립시켜 놓았다.’ ‘인물들은 영원히 미완성으로 남아 있고, 그 때문에 이중성을 띤다.’
공포와 불안 속에서 성장하고 생활했던 이 불우한 천재의 작품에 대한 더 이상의 단어는 없을 듯하다.
그에게 있어 고통은 쾌감이고, 모멸당한 자존심은 순교자라는 새로운 자존심을 갖는다. 그의 작품 어디에도, 그 인물들 중 누가 앉고, 먹고, 마시고 하는지는 거의 씌어져 있지 않다. 그들은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생존하는 것이다. 그들은 느끼고 말하고 투쟁할 뿐이다. 통찰력의 형안을 가지고 꿈을 꾸기 때문에 그들을 결코 잠자지 않는다. 또한 쉬지도 않으며, 언제나 열병을 앓고, 생각에 잠긴다. 모두다 예지자의 능력을 조금씩 가지고 있고 어느 누구의 사상에도 쉽사리 굴복하지 않는다.
그의 위대한 작품의 배경이 봄인지 여름인지 알 수 없다. 이를테면 8월의 어느 날이었다, 라는 식으로 날짜를 못박은 뒤 관심을 인물로 돌려버리는 식이다. 독자들은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 호흡하지도, 냄새맡지도, 감지하거나 체험하지도 못한다. 그의 작품들은 인식의 번갯불이 갑작스레 밝혀주는 마음의 어두운 곳만을 배경으로 삼는다. 그렇다, 작중 인물들은 어둠 속에서 부나비처럼 빛을 희구한다. 그리고 빛에 다가설 수 없다는 좌절을 느끼며 고통받고 일단 빛 속으로 뛰어드는 순간 쾌락과 고통을 동시에 경험하는 인물들이다.
극단적으로 집중된 감정은 고통스러우며 혼란스럽다. 나는 그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호흡이 가빠져 온다. 소설 속 인물들은 절대로 안정감을 가지고 있는 적이 없다. 그의 구조가 모험 소설의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지도 모른다. 가만 보면 도스토예프스키는 발자크의 후계자가 아니라 세르반테스의 확장형 같아도 보인다. 그것은 감정적인 카니발이요, 한편으로 관념적이고 철학적이기도 한 다성적인 카니발이다. 모두다 열정에 들뜬 상태에서 마음의 심지에다 저마다의 불꽃을 활활 태우고 있다. 그의 인물은 삶에 대해 권태에 빠진 인물은 거의, 아니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폭탄을 이고 불 속으로 뛰어들거나, 물 속에 빠져 스스로 헤엄쳐 나오려고 한다. 그 모든 인물들은 도스토예프스키와 닮아 있다. 빚쟁이에 허덕이면서 끊임없이 원고 저편으로 도망치려했던, 도박으로 한판을 벌여 부자가 되겠다는 순진한 욕망을 가진 인간 도스토예프스키의 분신들이다. (자신의 문학적 스승 중 한 사람인 발자크에게 그는 문체적 영향도 받은 듯하지만, 살아가는 행동의 양식까지 그대로 본받고 있다는 느낌 또한 지울 수 없다)
그는 지극히 이질적인 두 가지 요소를 결합시키는데 천부적인 소질을 가지고 있다.
증오, 사랑, 환락, 나약함, 허영심, 금지, 지배욕, 겸손, 경외심 등 모든 본능은 영원한 변화 속에서 서로 얽혀 있다. 영혼은 하나의 혼란이며 신성한 카오스이다. 그의 작품에는 순수를 순수를 향한 동경으로 인한 술고래, 복수를 열망하는 범죄자, 순결을 존중하는 소녀 능욕자, 종교적 욕망으로 인한 신성 모독자 등이 있다. 그들의 반항은 다만 감추어진 수치심일 뿐이며 그들의 사랑은 위축된 증오이고, 그들의 증오는 감추어진 사랑일 뿐이다. 그의 작품에는 고통에 대한 열망으로 말미암은 탕아, 쾌락에 대한 열망으로 인한 자기학대자가 있으며, 그들은 욕망 속에서 이미 향락을 즐기며, 향락 속에서 혐오를 맛보고, 행위 속에서 또다시 회한을, 회한 속에서 다시 감정을 돌이켜보며 행위를 즐긴다. 그들의 손으로 저지른 행위는 마음의 행위가 아니며, 그들의 입으로 하는 말은 마음의 말이 아니다. 그의 경우 결코 감정의 일치를 포착할 수 없다.
하나의 행동을 유발하는 인간의 동기는 결코 단순하지도, 자신만의 감정적인 결정으로 인한 것도 아니다.
그의 작품은 소설이라기보다는 희곡에 가깝게 느껴진다. 오늘날 소설의 기준에서 보았을 때, 느슨하게만 보이는 희극적 대화들은 인물간의 관계를 생생하게 드러낸다. 그는 결코 대화자의 변명, 거짓, 자의식 등 실제 서사의 진행방식을 일견 중단시키는 듯한, 서성거리는 대화를 체로 걸러내지 않는다. 마치 실제 대화를 하는 듯한, 녹음기를 그대로 틀어놓은 듯한 모습을 그리는 것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이상적 예술관으로 비춰진다. 실제 그 대화 속에서 무수한 반복들, 대화자의 더듬거림, 말줄임표 등은 도스토예프스키적 리얼리즘의 특징 중 하나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인물들의 말(대화)에는 도스토예프스키적인 가장 뚜렷한 특징을 하나 발견할 수 있다. 거의 모든 인물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거울처럼 바라본다. 그 거울을 비춰 본 당사자는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힌다. 중심인물 대부분은 매저키스트이다. 아니, 새디스트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거나, 학대적인 행위를 한 적이 있는 현재의 매저키스트로 존재한다.
그는 결코 인간을 단정적으로 판단하지 않으며, 판단을 한다면 독자를 잠깐 희롱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는 잠깐 인물의 외부에서 멈칫거리다가 복서처럼 인물의 머릿 속으로 직접적으로 파고든다. 그러다 아무런 개연성 없이, (개연성 따위는 똥을 쳐발라버리고) 모든 인물들을 한 자리에 모아둔 채 일종의 카니발을 벌린다.(이것을 구성적으로만 본다면 얼마나 작위적인가! 백치의 1부만 본다면, 그들은 아무도 잠자지 않고 오직 하루종일 만나서 대화하고 신분의 변화가 일어나고 중요한 인물, 나스타샤를 아는 인물은 모두 한 자리에 모아둔 상태에서 백치의 1부가 끝이 난다. 죄와 벌 역시 개연성과는 거리가 먼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도입부에 쇼냐의 아버지를 만나는 부분부터가 우연의 산물이다. 그는 상황의 자연스러움 따위에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인물의 심리를 파헤치고 중요한 사건들을 굴비를 꿰기 위해서 작위적인 부분을 서슴치 않고 집어넣었다. 얼마든지 달라붙어도 상관없는 것이다. 그에게는 더 중요한 무언가가 있었다. 그는 인물의 정신을 샅샅히 파헤치기 위해서는 염탐, 소문, 그밖에 어떤 못된 짓도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언제나 그렇지만 그의 작품을 읽을때면 알 수 없는, 하지만 저 지층에서부터 솟아오르는 존경심과 독단적이며 다소 폭력적이기까지 한, 인물의 성격에 대한 과감한 단정과 부정(그 과감한 단정을 어느 순간 부정하는 모습을 그는 묘사한다. 묘사해 낸다. 소설을 읽는 동안 독자는 소설 속의 인물을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으며 이는 소설을 읽고 난 뒤에도 마찬가지다)을 하는 그에 대해 거부감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그래서 소설을 읽는 동안 작가에 대한 혐오감과 존경심이 교차한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 그에 대한 평가는 어떻게 내려야 할지 나로서도 알 길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