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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전11권 ㅣ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창석 옮김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2001년 7월
평점 :
절판
(절판되기 전에 사 둬서 정말 다행이다...)
1. 빛
‘광선’에 집착한 몇 명의 작가들이 있다. ‘태양인’이라 불리웠던 알베르 까뮈가 있고, 플로베르, 그리고 프루스트다. 하지만 세 명의 작가는 중요한 방향의 차이가 보인다. 먼저 까뮈는 태양에서 비추고 발생하는 빛이 아니라 그 존재 자체인 태양에 대한 천착을 보인다는 것이다. (어떤 평론인은 까뮈가 태양에 집착하는 그가 예전 기상대에 근무한 것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 것은 아닌가 라고 추정했다. 나는 그의 견해에 대해 부정적이다. 왜냐하면 빛에 대한 집착은 이미 프랑스 문학의 전통이기 때문이다) 플로베르에게서 강한 영향을 받은 프루스트는 묘사에 대한 중요한 인식의 차이가 보이는데, ‘무감동성’을 최고의 가치로 삼았던 플로베르는 당연히 거의 대부분의 묘사가 카메라처럼 객관적인 묘사를 지향한다. 반면, 프루스트는 자기의 주변에 있는 모든 대상은 자신의 머리 속에서 (심지어 관념까지도) 부수어져 다시 재조립한 후에 정교한 붓질을 하는 것이다.
*우리가 레오니 고모 방에 들어가서 문안하는 동안 그 햇빛은 서서히 기울어지면서 창에 스쳐, 좌우로 거둔 안쪽의 커튼과 그것을 묶는 끈 사이에 일단 멈추었다가, 갈라져 분리되고 여과되어, 옷장의 레몬나무 판에 잔 금박을 박으면서, 숲 밑의 풀에 비칠 때의 섬세함과 더불어 방을 비스듬히 밝혔다. 그러나 날에 따라 매우 드물게, 우리가 돌아왔을 때, 옷장이 한순간의 금박을 잃은 지 오래였는데, 그럴 때는 우리가 생 테스프리 거리에 도달해도, 창유리에 펼치는 낙조의 반사도 보이지 않으며, 십자가가 서 있는 언덕 숲 기슭의 늪도 그 붉은 기를 잃어버려, 때로는 벌써 유백색을 띠고 있어, 한 줄기의 긴 달빛이 넓어져 가면서 멀리까지 비쳐, 잔물결 사이사이에 갈라지면서 온 수면을 가로건너고 있었다. 그럴 때는 집 근처에 이르러, 우리는 대문의 돌층계 위에 그림자를 알아본다. *
세상을 재창조한 빛은 일시적인 금무늬를 없애고 유백색이 되었다가 수면을 건너간다. 다시 말하면 모든 세상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여졌던 하나의 시간의 흐름을 결합하는 자인 프루스트의 창조에 의해 변해간다. 물론 단 하나의 문장(소설적 시간)속에 엄청난 ‘현실 속의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다.
이미 그의 문장을 보면 느껴지지만 그의 문장은 증상이 심각하다고 할 정도의 만연체이다. 그럼 만연체의 효과는 도대체 무엇일까? 하나의 의미에 대한 대조와 전복이 수없이 반복되면서 뱀의 몸뚱이처럼 굴절되는 그의 문장 속에도, 이따금 흐르고 있는 유머러스한 표현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그의 만연체 속에 간간히 드러나는 그런 유머러스함이 전편을 흐르는 진지한 분위기로 인해 가벼운 웃음을 유발하기를 거부하는, 보다 진지한 방향으로 일관되게 하는 효과를 가지는 것이다. 또 서로 상반되는 이미지들이 (프루스트가 채집한 것이 분명한) 어떤 유사성으로 인해 유형화되어 동질성을 획득하기도 한다.
2. 1편 1부의 줄거리
간단한, 정말 간단하게 얘기한다면 콩브레에서 보낸 어린시절을 회상하는 것이다. 작가에 대한 열망을 품고 있던 프루스트의 독서에 대한 일화와 자신의 재능에 대한 의혹을 품는다는 아주 일상적인 일화들의 묶음이다. 2부 스완의 사랑이 나오기 전까지 이렇다할 사건은 존재하지 않는다. (정작 프루스트마저도 자신의 작품이 출판될 시점에 이르러서 수필이나 소설, 회고록 등 많은 장르 중에서 어디에 분류해야 할지 의심을 품을 정도로) 프루스트의 사소한 일상을 기록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단순한 기록문학의 유형인 수필과 회고록과는 다른 소설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과 상황들은 모두다 프루스트에 의해 변조되고 깎이고 재조립된 것이기 때문이다.(실제 소설 속에는 친할머니와 외할머니가 같은 집에서 사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는데, 이런 부분들이 소설임을 확인시켜 주는 한 가지 중요한 근거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