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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신, 가난한 사람들 ㅣ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1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석영중 옮김 / 열린책들 / 2007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중요한 것은 그의 주인공이 이 세계에서 어떻게 보이느냐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이 세계가 주인공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그리고 주인공이 자기 자신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하는 점이다-바흐찐
아까끼 아까끼예비치는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더이상의 희망조차 가지지 않은 인물이다. 외투에 대한 열망을 욕망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그에게는 욕망도 좌절도 배어나오지 않는다. 숨을 쉬는 모습조차 그려지지 않는다. 단지 그 자리에 놓여 있을 뿐이다. 그와 외투의 존재감은 아주 미미하다.
하지만 마까르 제부쉬킨에게는 어떤 욕망이 꿈틀거린다. 잘린 가지에서 새 순(시인이 되고픈 욕망, 바르바레에게 잘 보이고 싶은 욕망)이 서서히 자라나고 있다.
나의 천사여, 거듭 말하지만 내가 이런 방에 들었다고 해서 이상한 추측은 하지 말아 주십시오. (가난한 사람들)
외투의 인물 아까끼의 정서를 파악하는 것은 작가의 판단(독단)에 독자는 구속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의 인물은 그 자신이 스스로 말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고골리의 서술체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서간체가 가질 수 있는 장점이자 한계이다. 이는고골의 서술체가 작가의 육성이 보다 더 쉽게 독자에게 전달될 수 있는 장점을 가질 수 있는 반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서간체는 독자에게 몇몇 가지 허위정보들을 산재해 둘 수 있다는 점과 인물의 내부로 용이하게 침투해 들어갈 수 있다는 잇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제부쉬낀)는 끝임없이 세상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어떤 시각으로 바라볼 것인지 고통스러워한다. 또한 이 문장에서 보듯이 자신의 존재를 상대에게 이해시키고자 (그러면서 동정심과 연민을 유발시키기 위해서) 욕망한다. (애처롭고 귀엽고 안타까운 표현인데, 이런 효과는 고골리의 "제발 날 그냥 가만 놔 둬요"의 패러디적인 문장 같아도 보인다) 단적으로 두 작가의 세게를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정서를 하는 자(아까끼)와 정서만(제부쉬낀) 하는 자이다. 어느 정도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아까끼와 자신의 초라한 모습 때문에 끊임없이 고통을 느끼는 제부시킨의 차이는 명백하다. 하지만 두 인물 중 누가 더 불행한지는 쉽게 단정지을 수 없다. 어쩌면 극히 기본적인 삶조차 가지지 못해서 아까끼의 욕망이 좌절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제부쉬낀에게는 작은 구멍(창문)으로 세상에 대한 숨통이 어느 정도 열려 있다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영원히 알 수 없는 하나의 숙제와도 같은 질문인가?)
<가난한 사람들>은 확실히 고골이 가진 한계를 극복하고자 노력한 작품 같다. 고골의 <외투>의 인물보다 더 좌절감을 가진 인물을 그리고자 도스토예프스키는 노력한 것이다. 이로서 19세기 러시아 소설의 하나의 특징인 "전당포 문학"의 계보를 이어나간 것이다. (난 고골의 <외투>의 작품 속에는 상징적인 의미의 전당포가 내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이게 처녀작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이 작품 도저에 흐르고 있는 "감상성"이라는 약간은 부정적인 흔적을 남기고 있다는 것은 아쉬운 점이라고 할 것이다.
아까끼는 하나의 <선>의 상징이다. 그는 가난한 소시민이다.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타인의 어떤 견해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삶에 충실하게 영위해나간다. 작품만을 본다면 아까끼는 정말 선한 인물이다. 고골은 그에 대한 연민을 끝없이 자극한다.
그러면 제부쉬낀은 선한 인간인가? 아니다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그는 동정심이 넘치는 인물이다. 그러면 그 동정심이 단순히 한 일개의 인간에게 주어지는 그런 순수한 선인가? 그건 정말 아닐 수도 있다. 외투에서 보이는 무성을 매개로 한 것이 아니라, 그의 동정은 이성을 향해 있기 때문에 이미 집필시부터 한계를 드러낸 출발이었다.
거장의 출현을 서서히 알리는 작품이라기에는 아직 감상성이 느껴지지만, 그럼에도 독자들을 강렬한 파토스의 세계로 이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