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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걸음으로 가다
귄터 그라스 지음, 장희창 옮김 / 민음사 / 2002년 5월
평점 :
품절
아우슈비츠 이후 연애시를 쓴다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는 말도 자주 듣는다. 물론 이런 말은 조금 과장된 면이 적지 않지만 네루다가 아닌 이상 낙관적이거나 낭만적인 언어는 힘을 얻기 힘들다. 소설의 경우도 그건 마찬가지다. 왠만한 장면으로는 위대한 독자분들께서 충격받지 않는 시대에 들어서 있다. 그렇다고 해서 엽기나 이유없는 광란을 끌어들이는 것은 곤란하지만 적어도 소설 속에서 도덕군자의 향연에 취하기에는 힘든 시대에 돌입해 있다는 것을 아마도 대다수의 작가들은 의식하고 있을 것이다.
독일의 도면으로 만든 러시아 잠수함이 독일 민간 여객선을 파괴시킨 이야기. 좌파와 우파와의 대립은 어느 시대 어느 국가에게서도 발견되는 현상이다. 이상하게도 국가, 민족을 주장하는 인간들이 국민들에게는 더 설득적으로 다가서고, 인류 전체의 공통된 고민을 말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냉소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도 인간의 모습인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그라스는 독일 내에서 존경만큼이나 미움도 많이 받는 작가에 속할 것이다.
전쟁이란 무엇일까?
전쟁은 적어도 5가지 이상의 층위에서 해석이 가능하다. 먼저 오늘날에는 사라져가고 있는 시선으로 바라보자. 전쟁은 게임이다, 라는 식으로... 정말 전쟁은 게임이나 도박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 이성적인 태도로 상대측의 감정을 부추긴다. 이긴다는 확률이 제로에 가까워도 국민 전체의 감정을 부추기면 '성전'은 시작되는 것이다. 게임이 시작되면 내기를 거는 당사자들의 문제를 벗어나 아이들과 동물들까지도 판돈에 대한 시달림을 받는다는 사실도 유사하다. 일그러진 욕망을 억누르기 위해 이성적으로 세계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은 단지 당위성을 주장하는 것과 다름이 아니다, 라는 생각도 들기 시작한다.
실제로 19세기 작가들은 전쟁 자체를 옹호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톨스토이는 전쟁의 순기능을 말한 마지막 거장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톨스토이를 비난할 수 없다. 19세기인들의 보편적 시각, 인류를 개조하는 한 가지 방법이라는 전쟁에 대한 시각을 말했기 때문에 톨스토이는 위대한 작가인 것이다.
그리고 지금 21세기, 21세기 문학에서 전쟁의 순기능을 말하는 작가는 이제 찾아보기 힘든 세상이 되었다.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라는 문제에 대해서 그라스는 말한다.
그것은 인간을 어떻게 묘사해야 할 것인가? 라는 문제를 말하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인간이 진술하는 언어를 어디까지 믿어야 할 것인가, 그리고 심리묘사가 오늘날 가능한 것인가, 그렇다면 현상학을 전면 수용할 것인가, 또한 그렇게 수용된다면 수사적 발언들은 모두 어디로 갈 것인가가 거장들이 고민하는 공통된 과제인 것 같다.
또한 진실과 미학간의 조율은 어디까지 가능한 것인가, 라는 화두를 계속 던져준다.
이 작가 지나치게 냉혹한 작가는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인간의 냉혹한 본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강력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