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의 습관 - 돈을 끌어당기는 사람들의 작은 차이
가야 게이치 지음, 김지윤 옮김 / 비즈니스북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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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에게 있어서 핵심은 아니라 자유 시간이다.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는 자신만의 시간과 자유를 갖게 되는 것이 부자의 핵심이다. 간단하게 생각해보면 직장인들이 부자가 없는 이유는 하루 24시간 동안 자신만의 시간과 자유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부자의 기준은 얼마만큼 돈을 벌었느냐가 아니다. 얼마만큼 자유와 시간을 누리느냐에 있다.

 

 

관점에서 생각해 , 부자의 습관 한층 가까이 다가온다. 1장에는 돈을 쓰는 이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여러분들은 택시를 타는 이유가 무엇인가? 나는 가끔씩 시간 제약이 있을 , 대중교통 보다 빨리 가기 위해 이용한다. 부자들은 단순히 돈이 많아서 택시를 타는 것이 아니다. 택시를 타는 이유를 들어보면 사람이 부자인지 아닌지 측정할 있는 하나의 지표가 된다고 한다. 부자들은 붐비는 곳을 피해 혼자만의 공간을 확보하려고 택시를 탄다고 했다. 혹은 사람이 많은 공간에서 질병이 옮을까봐 택시를 타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아마 출근 시간에 택시를 타는 사람도 있을 텐데 경우에는 지각을 모면하고자 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경우에는 다른 대체 수단이 있다. 일찍 일어나서 출근 준비를 하면 늦지 않게 대중교통을 타고 있다.  돈을 소비하는 행동의 원인과 기준에 대해 꼼꼼히 분석을 해봐야 한다는 뜻이다.

 

 

지금까지 부자와 관련된 수많은 책들이 나왔고, 중에 권은 직접 읽어 보기도 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결론은 하나로 도출해 있다. 현재의 자신의 모습에 만족하지 않는다면 지금까지의 생활 습관과 행동 패턴을 바꾸지 않는 이상 1 뒤에도 혹은 10 뒤에도 아니면 죽기 직전까지 자신의 모습은 변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지금 부자가 아니라면 지금까지 살아온 패턴으로는 부자가 없다. 부자가 되려면 당신의 인생을 바꿔야 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잠깐, 시간을 내어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자. 아무리 잘못된 습관을 바꾸고, 나은 나로 변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더라도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서는 본래 자신이 가지고 있던 본성으로 수렴하는 인간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최근에 약간 충격적인 소식을 접했다. 전혀 어울리지 않았던 사람이 결혼을 했다는 얘기였다. 사귀는 것도 아니고 결혼을 한다니! 다만, 전부터 사람에게서 풍겼던 이미지는 집안을 중요시한다는 분위기가 있었다. 서로 경제력이 어느 정도 있었고,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는가 싶었는데 서로 눈이 맞았나 싶었다. 여기서 자신의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혹자는 운명, 사주, 팔자라고 수도 있겠다) 갱신하지 않고는 『부자의 습관』을 읽어도 어느 정도 성공을 일궈내겠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자신의 처음으로 회귀할 수 밖에 없다. 마치 부메랑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왜 그런 말도 있지 않느냐. 아버지가 나에게 이렇게 하는 것이 정말 싫었는데 내가 커서 어느 순간 보니 아버지와 똑같이 행동하고 있었다고.

 

 

 

 인생의 중요한 사건들을 마주했을 때, 자신을 돌아봐보자. 수능을 보고 나서 대학을 선택했을 때라던가, 취직할 때, 연인을 만날 때, 결혼할 때 등등 인생의 굵직한 사건들에서 자신의 선택을 살펴보면 본인의 타고난 부족함을 채우려 하지 않았는가? 나도 그랬고, 내 주변 사람들도 그랬고, 유명한 사람들을 봐도 그렇다. 최근에 친척동생이 수능을 봤는데 인천교대와 이화여대 사범대학을 붙어서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내 개인적인 바람으로는 이대에 갔으면 했지만 친척 동생은 부모님과 인천교대로 결정을 내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이 선택의 기준이 비용의 많고, 적음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물론 비용도 선택을 함에 있어 상당한 비율을 차지하긴 하지만)

 

 

 

 

비단 부자가 되려는 목표 뿐만 아니라 무언가를 할 때, 가장 중요한 핵심은 갱신이다. 단순히 외적인 갱신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각인, 뿌리, 체질을 바꾸는 갱신이 일어나야 진정한 삶의 개선이 시작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원상태로 회귀한다. 왜냐? 그게 원래 자신의 모습이며 인간의 본성이니까.

 

 

 

원래 쓰려던 글의 방향과는 많이 틀어졌다. 리뷰를 쓰기 전에 다른 사람들이 쓴 리뷰를 종종 읽어보곤 하는데 『부자의 습관』과 관련하여 회의적인 내용이 있었다. 그래서 책에 쓰여진 내용에 집중하기 보다는 근본적인 사실에 집중하여 글을 작성했다. 전부터 말하긴 했지만 가끔씩 누군가는 이 인생의 대단한 변화를 불러 일으키는 것처럼 말하는데(빌 게이츠를 만든 것은 동네 도서관이었다 등등) 나는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심지어 독서는 사소한 변화마저 일으키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책의 내용과 책을 쓴 저자 그리고 우리의 삶에는 큰 괴리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책을 꾸준히 읽어 나가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뿌리를 바꾸는 작업을 해나가야 한다. 이 작업을 하는데 있어서 개인적으로는 글쓰기와 메모, 묵상 등이 도움이 됐다

아직 내 현재 모습에 만족하지 못하니 그 과업을 끝내지 못했다는 반증일지도 모르겠다. 여러분의 2016년은 어떠했는가? 2017년에는 자신들이 바라는 자아상에 한 발자국 더 다가가는 시간이 되길 바라며 『부자의 습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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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투자의 정석 - 10년 후에도 변하지 않을
김원철 지음 / 알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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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키 출판가의 재테크 서적들이 모두 알차기 때문에 당연히 관심이 가는 책! 그런데 내가 관심갖지 않아도 이 책을 10년 전부터 눈여겨 본 사람들이 넘쳐나는 것 같다. 내가 늦은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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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의 미래, 중년파산 - 열심히 일하고도 버림받는 하류중년 보고서
아마미야 가린 외 지음, 류두진 옮김, 오찬호 / 위즈덤하우스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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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삶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손을 들어보자. 그 반면에 현재의 삶이 팍팍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손을 내리자. 여러분들은 전자인가? 후자인가? 『중년 파산』이라는 책을 읽으며 가장 많이 한 생각은 이것이다. ‘아니 대체 어쩌다가 우리 세대(20대~40대)가 이렇게 된거지?’ 호빵님의 강의에서도 언급되었던 것처럼 왜 현재 우리 세대가 그리고 일본 세대가 먹고 살기 힘든건지 그 흐름이 파악되지 않았다. (이유를 알지 못해서 당하는 거라는 호빵님의 말이 퍼뜩 떠올랐다.) 현재 일본의 20대는 취업난이라는 것이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입사 원서를 내면 모두 합격이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실제로 신문 기사로도 나왔다.) 이 내용은 한근태 저자님의 특강에서도 언급된 내용인데 일본의 사회 구조를 따라가는 한국의 특성상, 우리 나라도 몇 년 뒤면 취업난이라는 단어가 아예 사라질 거라고 예측했다.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도구 중에 하나가 바로 인구론을 공부하면 된다고도 하셨다. 그래서 나는 더더욱 억울했다. 왜 하필 열심히 살면 그래도 살아졌던 우리 부모 세대와 우리 후대에게 낀 세대로 가장 팍팍한 삶을 이어가야 하는 우리가 안쓰럽게 느껴졌다. 책에서는 중년 파산이라고 선언했지만 그 뒤를 잇는 청년들의 삶도 밝지만은 않다고 느꼈다.

 

 수치는 상대적 빈곤율로, 국민 상위 50%인 사람의 절반도 벌지 못하는 사람이 차지하는 비율이다

 

많은 신문 기사에서 ‘고령사회’에 대한 문제를 지적한다. 그런데 실상을 살펴보면 고령자의 상황은 개선되고 있다는 것이 일본의 현실이라고. 다만, 곤란에 처한 고령자도 있고, 월 평균 400만원의 연금을 수령하는 사람도 있기에 그 격차가 크지만 전체적으로 고령자의 빈곤 문제는 개선되는 추세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내용은 고령자들의 어려운 상황이 매번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때, 정작 진실로 힘들어지고 있는 세대는 바로 30~49, 50~64세라는 것이다. 이제 고령자들보다 청년, 중년 층의 파산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는 시기가 온 것이다.

 

 

이 책은 총 4장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첫번째 장에서는 현재 중년세대를 사회적인 관점에서 분석하고 있다. 과거의 모습은 어떠했는지 그리고 그 세대가 어떻게 이어져왔고, 앞으로는 어떻게 펼쳐질지 그 담론에 대한 이야기다. 1장의 제목은 '누가 중년에게 파산을 선고했는가'였지만 지금 나의 상황에 대입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는 내용들이었다. 일본의 기업들이 그러는 것처럼 한국에서도 대기업들은 일종의 '신'으로 군림하고 있다. 70년대 경제개발 시절 정부의 도움으로 발돋움했던 기업들이 대부분 현재의 대기업들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데 경제 개발 시기에는 지원자가 입사 원서만 내면 합격이었다. 신의 직장에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갈 수가 있는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경제 성장률 둔화 시기에 접어들자 기업 성장률이 조금씩 줄어들면서 취업문이 좁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장 좁아진 시기가 아마 내가 졸업한 무렵 그 언저리가 아니었나 싶다. 그러면 우리의 미래는 발랄한가? 그렇지 않다. 인간의 '일'이 사라진 시대가 우리의 미래다. 로봇이 이젠 인간의 대체 노동력으로 부상할 것이기 때문이다.

 

 

 

2장은 '고단한 삶의 끝은 어디인가'다. 잃어버린 세대라고 불리는 일본의 '로스트 제너레이션'이 자신들의 실제 삶에 대한 담화를 글로 적어놓은 부분이다. 잃어버린 세대에 대한 정확한 의미는 취직의 씨가 말라버린 시기에 대학을 졸업하면서 취직이 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계약 사원이나 파견직으로 버텨 온 사람들을 의미한다. 2015년에 이들의 숫자가 일본에 273만 명이 있다고 보았으며 버블 붕괴 후 1994 ~ 2005년 무렵 취업 대란 시기에 구직 활동을 했던 잃어버린 세대들은 어느덧 40대를 넘긴 중년이 되었다. 과연 중년이 된 그들의 삶은 청년 세대에 비해 많이 발전하고 변화했을까? 안타깝게도 현실은 전혀 변화하지 않았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너무나 힘든 시대였기 때문에 일본 사람들 가운데서 IS 입단을 우스개소리로 한 사람도 있다고 했다. (2015년 일본인이 직접 참수된 후로는 IS 입단 이야기는 쏙 들어갔다고 한다.) 그런데 이 모습이 어째 낯설지만은 않아 보였다. 재작년쯤에 북한이 남한을 공격할 듯한 분위기로 매일같이 뉴스가 나오던 시기가 있었다. 내 옆에 근무하고 있던 동료는 전쟁을 대비해 실제로 '쌀'이나 '가공식품'을 실제로 구매까지 했었다. (삶에 대한 애착이란) 그런데 나는 오히려 '될대로 되라'는 마음가짐이었다. 내가 느끼기에는 전쟁이 일어나는 상황과 지금 나의 상황이 내가 느끼기에는 별 차이가 없을 거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나를 엄청난 회의주의적 사람이라고 여길 수 있지만 그만큼 나에게 현실은 잿빛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3장은 평범한 삶의 궤도를 이탈한 사람들이다. 실제로 파견직을 전전하며 사는 사람들을 심층 취재한 내용들이 등장한다. 총 12명의 다양한 사례들이 나오는데 놀랄만한 내용은 없었다. 한국에서도 한 번쯤은 뉴스로 접했던 사례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일본 사회와 한국 사회는 정말 닮아있다. 단 한 번의 탈락, 단 한번의 실패로 모든 것을 잃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나 같은 경우에도 사회생활의 첫 단추가 잘못 꿰어지는 바람에 나름의(?) 정상 궤도로 올라오기가 매우 힘들었다. 힘든 건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예전처럼 마냥 슬퍼하지만은 않는 것이 나의 변화라면 변화라 할 수 있다.

 

 

 

마지막 4장의 제목은 '그래도 희망은 있다'였다. 그런데 내가 느낀 4장은 '그래도 희망은 있다고?'였다. 다른 장들에 비해 분량이 너무나 적었다. 4장의 첫 페이지가 217에서 시작하여 238페이지에서 끝난다. 책의 막바지에 다다랐는데 4장이 시작되지 않아 '이건 뭐지?'라고 생각했는데 희망 부분이 책 분량에 비해 짧아 당황스러웠다. 더군다나 실제적인 방안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하면 좋겠다'라는 이상향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실제 개선 사례로 등장하는 내용도 중년이나 청년 세대가 아닌 노령세대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노령 문제의 답은 중년 문제라고 말하는데 나로서는 완벽히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사회 구조적으로 불합리한 문제 또한 '시간'만이 답인걸까? 한 가지 바램은 정부에서 이 계층 간의 빈곤 문제에 실질적인 개선안을 마련해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사실 노령 세대와 청년 세대는 어느 정도 국가에서 보장책이 있지만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세대가 바로 중년 세대다. 그들을 지원해 주는 정책이 없는 이유가 있겠지만 퇴직이 점점 빨라지고 있는 시기에 이들의 노동력을 활용하고, 경제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사회 제도를 마련해줘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사회 제도적인 지원을 떠나 개인 스스로도 문제의식을 지니고 살아야 한다. 직장이 자신의 평생 보호막이 되려는 생각은 이미 벗어던져야 하고, 스스로의 힘과 몸값을 키우는 일에 적어도 주말이라도 할애하자. 성실히 일해도 배고픈 노년이 아니라 성실히 일하면 배고프지는 않는 노년을 꿈꾼다면 지금부터 최소한 체력이라고 기르자.  미래에 대한 암울한 자각을 일깨워 주는 책 『중년파산』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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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설레게 한 유럽 미술관 산책
최상운 글.사진 / 소울메이트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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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여행준비]

나를 설레게 한 유럽 미술관 산책

글: 최상운 / 출판사: 소울메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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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사진을 유난히 잘 찍던 후배가 있었다. 거창한 예술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사진을 기가 막히게 찍었었다. 그 후배가 아이폰을 사용했고, 나는 갤럭시를 사용했기에 처음에는 단순히 카메라 성능의 차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원인은 카메라에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같은 핸드폰으로 같은 오브제를 찍을 때조차 내 사진보다 후배의 사진이 훨씬 더 예뻤다. 몇 달간 이런 과정을 거치고 나서 나와 선배들이 내린 결론은 다음이었다. '사랑하는 마음'이 결과물에 반영되는 것이다! 

 

 


 

그렇다. 오브제를 향한 마음은 반드시 표출된다. 그 후배는 사진 찍을 때 혼신의 힘을 다해 찍었다. 남의 시선도 개의치 않았다. 온전히 사진 찍을 대상에게만 마음을 집중한 반면, 나는 그렇지 못했다. 어찌보면 이 마음의 차이가 결과물에 반영된 것이 당연한 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무언가를 알고 싶고, 무언가를 맡기고자 할 때 나의 판단 기준은 '전문성'에 있지 않다. 그 사람이 얼마나 알고 있느냐보다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 사랑한다면 지식을 아는 것 이상(전문성)의 결과가 나올 수 밖에 없다.


 

 

《나를 설레게 한 유럽 미술관 산책》이 그렇다. 저자는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지만 사진의 매력에 빠져서 늦은 나이에 사진학과에 들어가서 공부를 했다. 그 후 우연히 눈길이 닿게 된 프랑스로 가서 조형예술과 미학을 전공했다. 파리 1대학 미학 박사 과정을 공부할 정도로 예술에 대한 관심이 높았나 보다. 이쯤에서 문득 궁금증이 생긴다. 사랑했기에 그 분야의 '전문성'이 길러지는 건지 아니면 그 분야를 '전문가'가 될 만큼 공부했기에 사랑하게 되는건지. 아무래도 나에겐 전자가 올바른 순서인 것 같다.

 

 

<이런 예술을 책 한 페이지로 할애에서 본다는 건 축복일까? 저주일까? 작품의 너비는 무려 40m>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시작되는 유럽 미술관 박물관 기행은 스페인을 거쳐,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에서 막을 내린다. 이제까지 살면서 한 번쯤은 들어봄직한 조각가, 작가, 화가들의 이름과 작품들이 소개된다. 아무래도 저자가 이탈리아 피렌체를 가장 먼저 설명하는 건 그곳에 대한 애정이 강해서 그런 건 아니었을까? '수태고지'라는 말이 초반에 등장한다. 역사와 예술에는 문외한이기 때문에 이 책에서 처음 들어본 말이었는데 천사가 나타나 성모 마리아에게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가졌다고 알려주는 신비한 순간을 뜻한다고 한다. 이 테마를 주제로 여러 예술가들이 자신의 특색이 묻어난 작품들을 남겼다. 각각의 작품들을 살펴봄으로써 그 예술가가 살았던 시대상까지 파악할 수 있다는 점이 매우 매혹적이다.


 


조금 생뚱맞은 결론이지만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나에게 든 생각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 역사서를 꼭 읽어봐야겠다는 것이었다. 역사는 반복되고, 그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직,간접적으로 시대의 특성을 남겨놓기 때문에 미래를 엿볼 수 있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지 않을까.

 


 


인류 역사상 최고의 천재 중의 한 명인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들도 나온다. 그중에서도 저자의 해설이 매우 흥미로웠던 《최후의 만찬》. 성서의 내용으로만 치부해버릴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인류에 대한 한 가닥의 성찰도 담겨있다.

 


 

단순히 '유다의 배신' 정도만 알고 있었던 작품이었는데 저자의 시각으로 바라보니 그림을 바라보는 시야가 한층 더 넓어지는 느낌이었다. 등장인물들의 얼굴을 세심하게 살펴봄으로서 예수의 표정은 과연 무엇을 의미했을지 한 번 더 머리 속에서 음미하게 되었다.  


"여러 제자들 중 가장 눈에 뜨이는 인물은 예수 바로 왼쪽의 요한과 유다다. 상심한 표정의 요한은 마치 여성처럼 그려졌다. 레오나르도가 동성애자인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 인물을 두고 사실은 막달라 마리아라느니, 예수가 요한을 사랑했다느니 하는 말이 나오는 것이 그리 이상해 보이지 않을 지경이다. 그만큼 아름답다." - 나를 설레게 한 유럽 미술관 산책

 

 

위의 작품은 이 책에서 처음 접한 작품인데 보쉬의 《열락의 정원》이다. 1500년대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쉽게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로 색채가 화려해서 놀랐다. 핑크라던지 연두색이라던지 색감이 아름답게 수놓아져 있다. 이 그림은 수많은 상징으로 가득 차 있어 아직도 완전히 해석되지 않는 작품 중에 하나라고 한다. 맨 왼쪽은 인간이 원죄를 저지르기 전인 낙원 부분이고, 화면 중간은 현세에서 누리는 쾌락의 날들이다. 인간이 자신들의 원죄를 깨닫지 못하고 계속 죄를 짓는 위험한 쾌락의 늪에 빠져있는 모습이라고 한다. 그리고 오른쪽 부분은 (예상이 되겠지만) 육체의 즐거움만 찾았던 인간들이 지옥의 형벌을 받는 모습이라고 한다. 그림 하나하나를 뜯어보면 작가의 상상력에 혀를 내두를 정도라고.



 


 

 

 

3번째 그림은 얀 반 에이크의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인데 수녀가 혼전임신을 했기 때문에 결혼을 하는 그림이라고 알고 있었다. (왜 이렇게 알고 있었는지 이유는 모르겠다.) 그런데 이 책을 보니 그 당시 유행했던 패션이 배를 볼록하게 만드는 것이었기에 이렇게 입었다고 한다. 이걸 보며 다시 한 번 느꼈다. 나의 무지를 바로잡기 위해서라도 끊임없이 알아가야겠구나라고.

 

 


유럽의 명화 뿐만 아니라 이 외에도 유럽의 미술관 위치라던가 분위기까지 소개하고 있어 지금 당장이라도 유럽으로 여행 떠나고 싶게 만드는 책이다. 만약 유럽 여행을 계획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 책과 함께 미술관을 꼭 방문해 보길 바란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유럽의 미술도 그렇다" 당신의 미술관 여행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줄 《나를 설레게 한 유럽 미술관 산책》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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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로테 - 2014 르노도 & 공쿠르 데 리세앙 수상작
다비드 포앙키노스 지음, 권기대 옮김 / 베가북스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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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로테

글: 다비드 포앙키노스 / 출판사: 베가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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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인간의 경험은 개인마다 편차가 아주 크다. 무탈 없이 태어나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내는 아이가 있는 반면, 태어날 때의 선천적인 병으로 인큐베이터에서 자라난 아이도 있다. 자신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개인의 삶도 사실은 지극히 ‘주관적인’ 삶이다. 이 소설을 보면서 이러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삶을 살아가면서 자신이 거스를 수 없는 삶의 부조리함이 눈앞에 펼쳐진다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당신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

 


 

1. 소설이란 

오늘 출근 시간에 2004년에 발생했던 ‘경남 밀양 여중생 집단 강간 사건’에 대한 게시글을 다시금 읽었다. 다시 봐도 끔찍했다. 이 실화를 바탕으로 2014년에 ‘한 공주’라는 영화까지 만들어졌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꾸준히 이 사건에 대해 상기시키는 글이 올라온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우리의 기억에서 잊히는 순간 이 사건도 역사 속에 한 점으로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흔히들 문학작품이란 ‘허구’를 바탕으로 쓰인 글이라고 하는데, 요즘에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실제 삶에서 접할 수 있는 이야기들을 작가들이 많이 미화시켜 이야기해주는 것이 바로 ‘문학’이라고 느꼈다. 불합리한 개인의 사건들이 영화로 많이 제작되고 있다. 여러분들이 ‘한 공주’라는 영화를 보고 ‘도가니’라는 영화를 보고 여러분들이 어떤 감정을 느꼈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감정으로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세상을, 국가를 그리고 사회를 바꿀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의 ‘행동’뿐이다.


 

 

2. 무엇을 상상하던 그 이상 

하지만 ‘행동’을 논하기 전에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바로 이 ‘감정’이다. 부조리한 사건을 접했을 때, 무언가 안타까운 사연을 접했을 때 내가 느꼈던 감정조차 얼마나 피상적이었나를 요즘 와서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우리가 어떤 사건의 피해자로 혹은 영화의 주인공으로 감정 이입을 하여 생각한다는 것도 사실은 ‘상상’이다. 이러한 ‘상상’의 파급효과는 얼마나 될까? 우리가 영화나 소설을 읽으며 마지막에 가서는 감정이입을 너무 해버린 나머지 울음을 터뜨리거나 분노를 느낄 때가 있다. 하지만 감정의 파급력은 여기에서 끝이 난다. 이 상상을 바탕으로 한 감정도 결국은 우리가 경험한 것에 비하면 정말 하찮은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자신의 실제 경험을 뛰어넘는 상상 따위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3. 샬로테 잘로몬

개인적으로 2016년 현재,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 했던 경험들이 펼쳐지고 있다. 사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이 바닥, 저 바닥 굴렀다고 생각했기에 “설마. 앞으로 더 심한 일들이 펼쳐지겠어?”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나의 오산이었다. 이제까지 겪었던 일들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일들이 올해 펼쳐지고 있다. 이제는 얄궂은 운명 탓을 하기도 싫고, 더 성장하라는 하늘의 계시로 받아들이려는 차에 이 책을 접했다. 《샬로테》이 책의 표지에 있는 그림을 보고 나는 ‘고흐’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는데, 남자친구는 표지를 보더니 ‘모딜리아니’의 그림이냐고 물었다.

“모딜리아니가 누군데?”
“얼굴 길게 그리는 화가”
“아니래. 샬로테 잘로몬 그림이라는데?”


주인공인 샬로테의 삶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가운데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곳에는 저자가 직접 등장한다. 문학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머리도 뛰어나야 하구나(이해력이 좋아야)’ 새삼 느꼈다.  

 

 

 

 
 

4. 운문으로 묘사된 소설 

저자의 삶을 이야기해야 할까. 아니면 주인공인 샬로테의 삶을 이야기해야 할까. 사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조차도 ‘이렇게 마음대로 써버려도 될까?’라는 생각이 계속 든다. 저자는 샬로테의 삶을 소설로 쓰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다. 그 시간이 무려 10년이었다. 그런데도 저자는 샬로테의 삶을 어떻게 풀어내야 할지 몰라 잠을 이루지 못한 날도 숱하다. 결국, 샬로테의 삶은 장황하고 치렁치렁한 산문으로 묘사될 수 없음을, 가슴을 에는 시 혹은 외침으로 기록되어야 한다는 것을, 그렇게 고통의 탑을 쌓아올리듯 짤막한 한 줄로만 이루어진 소설을 써나간다. 그는 샬로테의 그림을 보는 순간, 속절없는 사랑에 빠져 버린다 그녀는 그의 삶을 뒤흔들어 놓았다.



 

5. 이 그림들을 부탁해요. 제 삶의 전부니까요


샬로테는 18살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자신의 이모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샬로테의 이모가 자살하자 그의 언니였던 프란치스카는 충격으로 서둘러 결혼을 한다. 그리고 주인공인 샬로테가 태어났다. 샬로테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녀의 어머니 또한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그녀가 스물여섯 살이 되던 해 임신 5개월의 몸으로 나치의 광기에 내몰려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에서 샬로테는 생을 마감한다. 그녀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이라도 한 듯 가스실로 끌려가기 전 자신의 삶과 사랑을 고스란히 담은 필생의 역작 ‘삶인가? 아니면 연극인가?’를 잘 보관해달라고 했다. 자신의 삶의 전부라며 말이다.

 


 

조리한 삶이 눈앞에 펼쳐졌다. 이에 당신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그녀의 아버지는 적극적으로 탈출을 구사했다. 샬로테는 도망갈 생각은 하지 않은 채 나치령이 내려진 땅의 조그마한 집에서 은둔 생활을 한다. 이 악몽 같은 시절이 끝나길 바라면서 말이다. 그 누구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은 그녀였지만 누군가의 밀고로 그녀는 나치군에게 끌려가고 그 짧은 생을 마감하고 만다. 시간은 모든 걸 으스러뜨린다. 나치 군도 사라졌고, 밀고자도 사라지고 샬로테도 사라졌다. 다만 그 시절의 처절했던 삶은 샬로테의 그림으로 오롯이 살아있다. 불합리한 삶의 숙명이 당신의 목을 죄여온다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건, 당신이 그 무엇을 상상하던 실제로 겪게 될 삶은 상상 이상이라는 것이다. 소설 《샬로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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