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리아드
마릴린 로빈슨 지음, 공경희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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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약 죽음을 앞둔 존 에임스 목사라면.. 그래서 남겨진 가족에게 편지를 쓴다면 어떤 내용으로 채울 것인가.

 

70세를 훌쩍 넘어 심장병으로 기력이 쇠해가는 존 에임스 목사. 그에게는 젊은 아내와 7살인 어린 아들이 있다. 늦은 결혼이 첫번째 결혼은 아니다. 첫 아내는 출산의 고통으로, 태어난 딸아이도 얼마 살지 못하고 함께 세상을 떠나고 오랜 세월 목사로서 살아온 그였다. 노년에 얻은 아내와 아이, 따스한 가정.. 더 함께 하고 싶고 더 보고 싶고 삶을 나누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에임스 목사는 아들에게 긴 편지를 쓴다. 사람에 대해, 인생에 대해 알려주고픈 그의 마음을 담아.

 

아주 오랜 시간 한 사람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대화를 하면 처음에는 이 얘기 했다가 또 생각나면 저 얘기했다가 하기도 하고 처음에는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일을 어느새 말하게 되어버리기도 한다. 편지지만 한두장 분량의 짧은 편지가 아닌 책 한 권 분량의 편지인데다 하루이틀만에 적은 편지가 아닌 몇날 며칠에 걸쳐서 쓰는 편지이기에, 에임스 목사는 한참 먼 과거를 이야기하다가도 방금 겪은 일상의 소소한 순간들에 이야기하고, 숨기려 했던 일들을 털어놓기도 한다.

 

군데군데 흩어진 이야기들이 편지가 계속 되면서 자리를 잡고 연결되어 가기 시작한다. 노예해방운동의 길을 걸었던 할아버지와 평화주의자였던 아버지, 그 둘의 갈등. 그리고 아버지와 무신론자였던 형의 갈등. 결혼하기 전 절친한 친구 보턴의, 자신의 이름을 딴 아들 존 에임스 보턴에 대한 내면의 갈등 등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날 수 밖에 없는 크고 작은 갈등이 그려져 있고 그의 주위를 둘러싼 수많은 등장인물들을 묘사하는 담담한 문체 속에서 그가 느끼는 애정(때론 증오)이 묻어나있다.

 

에임스 목사만큼 흥미로운 인물인 존 에임스 보턴. 그는 어릴적부터 보턴 가족과 에임스 목사가 감당하기 힘든 문제아였다. 오랜 시간 마을을 떠나 있던 그가 다시 길리아드로 돌아오면서 에임스 목사의 내면의 갈등도 고조된다. 대화를 해도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는 둘, 남겨질 가족들에게 해가 될 지 모른다는 암묵적인 두려움이 숨기려 했던 존 에임스 보턴의 치부까지 편지 속에 남기게 만든다. 도저히 풀리지 않을 것 같던 관계가 풀려가며 '용서'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볼 수 있었다. 결코 쉽지 않지만, 때로는 뼛속 깊이부터 이해되지 않고 용서가 안되는 이도 있을 수 있지만 그럼에도 용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그 과정이, 그 결과가 얼마나 아름다운 지 말이다. 내 눈에도 마냥 철 없고 못되게만 보였던 존 에임스 보턴이 에임스 목사의 진심어린 축복을 받으며 마을을 떠날 때 왠지 나까지도 완전히 용납받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문제투성이로 보였던 그가 애처로우면서도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삶과 죽음, 사랑과 미움, 갈등과 용서, 신앙의 대립, 전쟁과 평화 등 무거울 수 있지만 우리의 삶 속에서 분리해서 바라볼 수 없는 다양한 주제를 아버지가 아이에게 잔잔히 들려주는 소설 '길리아드'. 한번 읽고 덮기에는 아까운 소설이다. 좀 더 역사적인 배경에 대해서도 알아보면서 차근차근 읽어보려 한다. 그의 첫 소설인 '하우스 키핑'을 읽고 난 후 다시 책을 펼쳐보아야 겠다. 가을의 끝자락에 내가 놓치고 있었던 삶의 아름다움을 넘치도록 깨닫게 해줘서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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