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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두막
윌리엄 폴 영 지음, 한은경 옮김 / 세계사 / 2009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폴 영은 5자녀를 둔 아버지이다. 그는 어릴 적부터 선교지에서 자란 백인이다. 이 소설은 그가 내면에 품고 있는 고통과 비밀한 일들을 풀어내어, 자녀들에게 성탄선물로 줄 목적으로 쓴 소설이다. 이 책은 작가가 아니며, 출판을 목적으로 한 책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필자는 아웃사이더 입장에서 이 책이 일으킨 미국에서의 반향을 생각해보고자 한다.
먼저 저자의 독특한 어린 시절체험을 보면, 그는 백인임에도 불구하고 흑인이 다수인 나라에서 자신이 흑인인 줄 알고 자라났다. 그래서 이 책에 하나님의 역할로 '파파'라는 흑인여성이 등장한다. 성령을 가리키는 '사라유'는 인도말로 '바람'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에 대한 고정된 틀을 깨고 새로운 표현들과 등장인물들이 등장하는 것은 다분히 그가 자란 체험속에서 나온 것들이다.
그는 이 책에서 고통의 문제를 다룬다. 캠핑가서 오두막에서 머물며 놀다가 죽은 딸 미씨에 대한 깊은 슬픔을 예수의 십자가 고난과 연결시켜서 묵상한다. 우리가 고난당할 때 하나님은 어디 있는가? 신정론의 문제를 하나님과 직접 만나서 대면하는 이야기로 풀어가고 있다. 그래서 교리적이고 딱딱하지 않으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하고, 용서하고,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게 하는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흔히들, 막연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하여 이해하게 되었다고들 한다. 그리고 종교라는 제도의 권위주의에 환멸을 느낀 사람들이 이 책을 통해서 신선하게 진리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는 반응도 보인다. 저자 종교는 결국 신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자신과의 관계라고 주장하는 것은 옳다. 제도와 규율은 이러한 즐거움의 관계를 의무로 변질시켰다는 비판도 옳다. 그는 예수는 결코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는 목적이 없었다고 말하면서, 다름을 인정하고 포용하고 그들을 찾아가서 진리을 전달하려고 했다고 말한다. 제도권의 종교를 거부하며 그 대안으로 영성적 인간상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 대하여 결코 실망한 적이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기에, 우리 이상의 무언가를 기대하신 적이 없으시다. 부당한 기대가 없으니, 당연히 실망도 없으시다는 말이다. 주인공 맥켄지와 '파파'의 이러한 대화는 치유적이며, 죄책감이 사라지게 하는 대화장면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단지 말이 아니라, 미각과 시각과 후각과 청각등 자연과 음식 등을 다 동원하여 맥켄지를 치유하고, 그의 왜곡된 정서를 치유해간다. 한 마디로 단순한 말이 아닌 분위기를 경험하게 한다. 관계는 이처럼 총체적인 것이다.
이 책은 창의적이며, 독자를 매료시킬 만한 이야기로 전개되고 있다. 특별히 삼위일체라는 주제를 독자가 이해하고 쉽게 전달하면서, 독자들의 숙제, 하나님은 누구신가? 우리의 고난과 예수님의 고난이 무슨 관계가 있는가? 예수님은 왜 돌아가셨나? 등의 문제를 마치 가려운데를 정확히 긁어주듯이 써내려가고 있다.
하지만, 필자는 저자가 말하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이기보다는 본인이 원하고 바라는 하나님상, 예수님상을 투사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예수님은 매우 인격적이며, 치유적이며, 친절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성경의 예수는 비유를 말하며, 때로는 심판을 말하며, 본인 스스로 하나님이라는 파격적인 주장을 하였으며, 권세와 지혜있는 말로 가르치셨으며, 병자를 고치셨다. 예수님은 단순히 친절한 인격자 그 이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심판과 재림을 말하지 않았던가! 저자가 말하는 예수는 저자에 의해 길들여진 예수이며, 또한 저자는 미국 보수 신학자들에 의해서 유니테리언(단성론자)라는 비난까지 받고 있다. 다시 말해서, 저자는 예수의 인성을 강조하면서 사실상 예수의 신성, 그의 유일성은 희생시켰다는 것이다. 그 결과 종교다원적이며, 모든 사람들이 기뻐하는 이미지로 예수를 길들여놓은 것이다.
폴 영이 삼위일체를 쉽게 풀어준 것에 대하여 독자들은 환호하고, 기뻐하며, 감탄한다. 하지만 성부하나님, 성자 하나님은 '영'이신데, 사람이라는 등장인물을 등장시켰다는 자체가 가볍기 그지 없는 것이다. 차라리 삼위일체의 신비를 신비 그대로 놓아 두었어야 한다. 딱딱한 것은 딱딱한 것 그대로 놓고서 독자가 그것을 깨쳐 나가게 했어야 하지 않는가.
한 마디로, 저자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사람으로 등장시킴으로써, 삼위일체에서 '신비'를 희생시키고 말았다. 그는 종교다원적 영성을 강조하여, 종교의 관계성을 부각시키는데 성공한 반면, 성경의 계시의 권위와 선언을 희생시키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