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 개념 키르케고르 선집 3
키에르케고르 지음, 임춘갑 옮김 / 다산글방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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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폴 틸리히의 <기독교 사상사>에서 틸리히는 우리가 읽어야할 키에르케고어의 책 가운데 2권을 필독서로 추천한다. <불안의 개념>(1844)<죽음에 이르는 병>(1849)이다. <불안의 개념>을 읽으면서, 폴 틸리히의 <존재의 용기>가 얼마나 키에르케고어에게 영향을 받았는가를 실감하게 된다.

 

<불안의 개념>은 아담의 원죄에 대한 심리학적인 분석을 한다. 1-2장은 헤겔의 변증법에 대한 논박으로 썼기 때문에 아주 난해하다.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이다. 무한한 자유로 인하여 인간은 불안하여 죄를 짓는다.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불안을 느끼는 것이다. 공포는 대상이 있지만, 불안은 대상이 없다. '무에 대한 불안'이다.

 

<불안의 개념>5장으로 되어 있는데, 다행히 5장은 짧다. 5장에 모든 엑기스가 담겨 있다.

불안이 우리를 괴롭히는 원수가 아니라, 구원의 징검다리가 될 수 있는 길이 있다.

그 방법은 불안의 온전한 제자가 되는 것이다.

불안에는 유한성에 대한 불안과 무한성에 대한 불안이 있다. 사람들은 착각한다.

유한성의 불안이 무한성의 불안보다 더 심각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히 착각이다.

 

유한성의 불안이란, 인간의 의식주과 같은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불안이다. 취직, 결혼, 집이나 자동차를 구입하는 것 등에 대한 염려이다. 무한성의 불안은, 하나님 앞에서의 불안이다.

인간은 무엇을 먹고 사느냐에 대한 유한성의 문제보다, 하나님 앞에 어떻게 서느냐 하는 '무한성의 불안'이 더 큰 문제이다. 간단히 말해서 '무한성의 불안'을 해결한 사람은, '유한성의 불안'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면 무한성의 불안을 어떻게 해결하나? 그것은 우울증 약으로 해결되지 않고, 자살로도 해결되지 않는다. 왜 사람이 우울증에 걸리고, 자살을 하게 되는가? 이 불안의 습격이 너무나도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불안은, 그 어떤 대심문관 보다도 철저하게 우리의 죄를 샅샅이 찾아낸다. 그 어떤 비밀요원보다도 철저하게 우리의 내면을 뒤져서 우리의 죄와 허물을 찾아내어 불안하게 만든다. 그 어떤 판사도 불안 만큼 완전하게 우리를 판단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불안은 우리 마음에 들어와서 우리 안에 있는 유한성을 의지하는 것을 철저히 고발한다. 다시 말해서, 은행의 잔고, 세상의 명예, 육체적인 건강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는 불안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불안은 우리 안에 하나님 외에 다른 유한한 것을 의지하는 것을 철저히 고발한다. 그리고 그것은 '썩은 밧줄'로 우리가 의지할 것이 못된다는 것을 고발한다.

그럼, 이 원수와 같이 철저히 우리의 내면을 고통으로 몰아넣는 불안을 어떻게 상대하는가?

그 방법은 불안을 도피하지 말고, 환영하는 것이다. 마치 소크라테스가 진리를 위하여 독배를 마시듯이, 불안을 받아들여라. 예수님이 가룟 유다에게 "네 할 일을 속히 하라" 하시면서 의연하게 인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의 길을 가시듯이, 의연하게 불안을 받아들여라. 수술을 앞둔 환자가 의사에게 ", 준비 되었어요. 잘 해주세요."라고 말하듯이, 불안이 우리에게 엄습할 때, 불안이 할 일을 다 하도록 자신을 열어두어라.

 

역설적으로, 불안은 우리를 숨막히게 하고 파멸로 몰아내지만, 불안의 온전한 제자가 된 사람은 불안을 환영한다. 불안을 두려워하지 않고 환영하는 사람은, 불안이 우리 내면에서 빼앗아가고자 하는 모든 것들 - 기쁨, 평안, 감사, 사랑의 능력 등-을 모두 돌려받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불안의 완전한 제자가 되느냐? 그 불안을 구원의 징검다리로 사용하라.

그 불안 앞에서 우리가 유한한 것을 의지하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무한하신 존재, 인간의 궁극적 관심인 하나님을 바라보라.

 

어떻게 그 하나님을 바라보느냐?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Atonement)를 바라보라.

불안은 하나님을 의지함으로써만 해결된다. 하나님 안에서 불안은 그리스도인의 좋은 시종꾼이 된다.

* 임춘갑, 임규정 등의 번역에, <구원>Salvation의 징검다리로 마지막 줄을 번역했는데, 더 정확한 번역은 <대속>Atonement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과 그 구원의 능력을 가리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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