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 / 현대의 비판 쇠얀 키에르케고어 시리즈 5
쇠얀 키에르케고어 지음, 임춘갑 옮김 / 치우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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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인생은 공허하고 무의미한 소리로 용해된다. 시간을 통한 실존의 연속성은 "반복"을 영원성의 문제로 만든다. 반복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다. 영원하신 분처럼, 반복은 언제나 현재이고 언제나 미래이다.

"반복은 가능성을 임신하고 있다."

그 순간에 자기 자신을 선택하는 자아는 계속해서 새로워지는 자아이다. 과거에 여러 번 선택으로 말미암아 미래에 새로운 길을 열었다. 선택은 미래에 길을 열어준다. 영원하신 분처럼, 반복은 가능성을 임신하고 있다. 그러나, 영원하신 분과의 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면, 반복은 벌거벗은 인내가 된다. 시치푸스 신화처럼, 같은 바위를 같은 언덕으로 굴려올리지만 다시 굴러떨어질 과업처럼 헛수고가 되고 만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 선택 행위를 할 때에만, 반복은 가치있고 의미있다. 의미있는 정체성을 가지려면 반복이 필요하다. 사람들이 의미있는 정체성을 획득하기 위해서 시도하는 여러 방법들과 반복은 대비가 된다. 소크라테스나 전도서의 저자는 "새 것은 낡은 것이 된다"는 태도를 취했다.

과거를 돌아봄으로써 실존의 의미를 발견한다. 왜냐하면, "해 아래 새 것이 없기 때문이다"(전 1:9). 《반복》의 전반부와 후반부가 있는데, 전반부는 한 청년의 연애 이야기이다. 이 청년은 연인을 즐거워하기보다도 그 사랑했던 연인에 대한 자신의 기억을 더 즐기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자신의 최고의 유익한 경험을 되살리고 자기 자신을 회복하려고 베를린으로 왕복여행(a return trip)을 떠난다.

이것은 소설이 아니라 심리학 실험이다. 그 실험은 재난이 되었다. 그 청년은 과거를 되살리려고 시도함으로써 그는 새로움과 의미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빼앗겼음을 배운다. 참된 반복이 있다면, 영원한 경험을 복사함으로써 그 반복을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다.

《반복》의 후반부는 전반부에 비해 분량이 짧다. 여기서는 반복에 대한 윤리적 탐험을 한다. (전반부는 반복에 대한 심미적 탐험이었나?) 그 윤리가는 의미있는 반복이 이루어지려면 책임있는 자기 선택(responsible self-choice)를 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러나 이 또한 실패로 끝난다. 이유는 단순하다. 아무리 많은 훈련을 하고 성품의 지속성*?을 유지한다할지라도, 깨어지고 죄악된 자아를 온전하게 회복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계 21:5) 하신 그 분때문에, 낡은 것이 새 것이 되기 때문이다.

영원성의 반복은 단순히 인생의 반복이 아니다. 영원성의 반복은 인생을 구속한다(redeems). 이 책에 키르케고르의 자전적 이야기와 함축이 강하게 내포된 것을 독자는 용서하기 바란다. 실연당한 후에 심미적으로, 윤리적으로 종교적으로 삶의 목적을 되짚어보려는 젊은이의 이야기는 바로 쇠렌의 이야기이다. 《반복》이 출판되기 몇 개월 전에, 쇠렌은 레기나가 그를 증오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베를린으로 떠나가 버렸다. 《반복》은 떠나보낸 연인과의 사랑이 회복될 가능성을 충만하게 암시한다. 그러나 이 책을 인쇄소에 넘기지 전에, 레기나가 프리츠 슐레겔 씨와 약혼했다는 사실을 쇠렌이 알게 된다. 레기나가 다른 남자와 약혼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 원고를 수정 보완하여, 절망하여 영적으로 회복한다는 "종교적 의미"를 추가로 늘렸고, 여성적 사랑(womanly love)의 지속성에 대한 모호한 언급들을 다수 덧붙였다.

그렇다고 해서 《반복》을 키르케고르의 직접적인 자서전으로 읽지 마시기 바란다. 그것은 잘못이다. 쇠렌은 인생을 취하여 그것을 새 것으로 각색하는 시인이라고 독자에게 일관되게 주지시킨다. 콘스탄틴 콘스탄티누스는 소설을 쓴 게 아니라, 자아가 된다는 의미와 자아가 되어 가는 과정에 대한 실험적 에세이를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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