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에게 유리한 기억을 문자화한 것이 자서전이라해도 최소한 객관적으로 드러난 과오에 대한 일말의 참회는 있을 줄 알았다. 악인은 악을 저질러서 한번, 그 악를 뉘우치지 않아서 다시 한번 죄를 저지른다. 이순자씨의 자서전은 회개하지 않는 자의 기록이다.
그런데, 이 자서전의 가장 흥미로운 대목이 책 말미에 나온다. 후임 대통령과 영부인을 평가하는 부분인데 여기서 이순자씨는 故 김대중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에게 극찬과 존경을 표시한다. 후임 대통령 중에 전두환씨를 국가 원로 대우해준 유일한 대통령이 김대중 대통령이었던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대통령 당선자 시절, 당시 김영삼 대통령을 설득해 그분과 노태우 전 대통령에 대한 사면을 성사시켰다. 그뿐 아니었다. 대통령 재임 중에는 특별한 국가적 의제가 없더라도 매 분기 네분의 전직 대통령 내외를 청와대로 초청했었다...또 그분이 초청을 받아 외국을 방문할 때에는 외무부등 관계 기관과 현지 외교 공관에 지시해 불편없이 모시도록 하는 등 섬세한 배려를 잊지 않았다‘ (p710)
‘김대중 전 대통령 영부인 이희호 여사에 대한 내 존경심도 깊다. 김대중 대통령 재임 중 이 여사는 매년 설, 추석 그리고 그분의 생신과 내 생일에 선물을 보내 축하는 일을 단 한번도 잊지 않으셨다. 김대중 대통령이 퇴임한 지 10여년이 지난 올해 그분의 생신과 내 생일에도 그 진심어린 정성과 예는 계속되고 있다. 특히 이 여사는 고령인데도 난화분과 함께 장뇌삼을 보내면서 직접 쓴 편지까지 동봉해 보내주어 그 정성과 섬세함에 감동을 주었다‘ (p711)
이 대목을 읽다 뭉클해져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김대중, 이희호. 내가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크고 훌륭한 분들이다.
매년 전두환씨 생일에 손편지를 쓰는 이희호 여사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생각해본다. 이 분들은 진실로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른 사람들이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악에게 지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긴, 드물고 아름다운 사례를 남기셨다.
700페이지 넘는 변명을 읽느라 답답했던 마음이 두 페이지에서 다 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