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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갈라 나를 꺼내기
하미나 지음 / 물결점 / 2025년 11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 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이 책은 논픽션, 에세이, 시, 희곡, 강연록 등 다양한 형식을 빌려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를 건넵니다. 마치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사람의 머릿속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했습니다. 처음에는 역사, 과학, 철학 등 낯선 전문 용어들을 이해하느라 바빴지만, 곧 깨달았습니다. 이 글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직접 느끼며 또 다른 나를 만나는 과정이라는 것을요. 작가는 나를 대자연 앞에 가져다 놓았다가, 때로는 어느 허름한 연극장에 앉혀두며 지루할 틈 없는 색다른 경험을 선사했습니다.
책을 읽으며 문득 어린 시절 읽었던 위인전들을 떠올렸습니다. 그 속의 인물들은 대개 남성이었고, 저는 은연중에 남성이 여성보다 더 위대한 일을 많이 해왔다고 믿으며 자랐습니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저는 사회와 학문, 지나온 모든 순간 속에서 여성의 삶이 어떤 방식으로 지워지고 저평가되었는지 목격했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싶은 놀라움과 충격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동안 저조차 무의식중에 여성을 배제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뼈아프게 다가와 부끄러움에 휩싸이기도 했습니다.
대학에 입학했던 2019년, 저는 페미니즘에 몰두하며 목소리를 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 저는 그때를 ’피곤하고 예민했던 시절‘이라 기억하며 치부하곤 했습니다. 사소한 것에 불편해하는 제 모습이 마치 가시 돋친 사람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하미나 작가의 이야기를 통해 그 ’불편함‘을 다시 정의하게 되었습니다. 불편하다는 것은 어쩌면 내가 변하고 성장하고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일지도 모릅니다. 작가는 제게 묻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삶은 어떤 방식으로 흘러가고 무엇을 말하고 싶나요?“ 저는 다시금 나를 자르고 꺼내게 하는 질문들 앞에 섰습니다.
글쓰기란 나를 갈라 나를 꺼내는 일 중 하나입니다. 머리글이 아닌 ’몸글‘을 쓰다 보면 사회의 틀에서 벗어나 나만의 경험을 기록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치유 받기도 하고, 다시 분노하며 타인에게 어깨를 내어줄 용기를 얻습니다. 삶 곳곳에 놓인 혐오와 차별을 인식하지 못한 채 익숙함에 안주해왔던 시간에서 벗어나, 이제는 내 안의 목소리에 집중해 보려 합니다. 몸소 느낀 경험을 글로 쓰다 보면 정의할 수 없던 감정들이 피어나고, 그것이 곧 나를 이해하는 길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성차별과 혐오에 대한 ’분노‘가 앞섰다면, 이제 제 안에는 ’질문‘이 남았습니다. ”내가 가고자 하는 분야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의 일상은 어떤 삶을 지향해야 하는가?“ 혐오와 차별에 무감해지는 세상을 보며 여전히 아프고 괴롭지만, 이제는 분노에 잠식되기보다 선명한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고 싶습니다. 하미나 작가와 책 속의 수많은 여성들이 먼저 내어준 목소리 덕분에 제가 지금의 삶을 누릴 수 있었듯, 저 또한 작은 목소리를 보태려 합니다. 가보지 않았던 곳에도 분명 길이 있음을 이 책은 증명하고 있습니다.
끝으로 여전히 많은 여성들이 무차별적으로 살해되고 있으며 사람들은 이에 무감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떠한 죽음도 비슷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