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어미 생신이라고 맏이가 영화표 2장을 예매해 놓았나 봅니다.
밤 9시를 겨냥하여 아내와 집을 나섰습니다.
주위를 둘러 흰머리 동지를 찾지는 못했지만, 우리 같은 중늙은이들한테도 팝콘과 음료는 소용이 되더군요. 2시간은 생각보다 길거든요.
171페이지
< 당신, 거기 있어 줄래요> 기욤 뮈소의 원제 소설을 각색한 작품인데 저자가 영화 제작을 쾌히 승낙했다는 뒷이야기도 있더군요.
느닷없이 캄보디아의 밀림이 전개되고 앙코르와트의 장관이 시선을 사로잡더니, 이야기는 엉뚱한 방향으로 펼쳐집니다.
2015년에 수현은 캄보디아 의료 봉사활동 중 한 소녀의 생명을 구해줍니다.
"소원이 있습니까?" 소녀의 할아버지는 신비한 알약 10개를 수현에게 선물합니다. 그의 소원은 사랑했던 여인 연아를 만나보는 것이었죠.
호기심에 알약을 삼킨 수현은 순간 잠에 빠져들고 다시 눈을 떴을 때, 30년 전인 1985년의 젊은 자신과 마주합니다. 시간여행이죠.
30년 후에 그는 체념어린 표정으로 과거는 흘러갔기에 돌이킬 수 없다며 운명을 이야기하고 30년 전의 젊은 그는 미래는 내가 결정하는 것이라고 언성을 높이고 있었습니다. 운명은 바꿀 수 있는 것일까요? 이 영화는 돌고래 사육사로 일하다가 불의의 사고로 죽어간 연인을 되살림으로써 그들 모두의 운명이 완전히 바뀌어 버린 이야기로 달려갑니다. 남자는 연인을 살리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절교를 선언하고 다시는 만나지 않습니다. 단 1번이라도 만나면 연인은 죽게 됩니다. 까닭을 알 수 없는 여인은 슬픔에 겨워 홀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운명이 바뀐다 한들 어찌 그 사랑마저 떠날 수 있겠어요.
172페이지
'기회'와 '후회'는 동의어 같기도 합니다.
농사에는 때가 있어서 씨뿌리기 거름주기 김매기 물주기 추수 등 어느 것 하나라도 때를 맞추지 않으면 농사를 망치기 십상이죠. 그래도 기회는 다시 옵니다. 농사는 한 해만 짓고 마는 일이 아니잖아요?
삶의 궤적에 남겨진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는 듯합니다. 혹은 아물지라도 그 상흔은 끝내 지워지지 않는가 봅니다. 그러나 시련도 고난도 피하고 싶었던 일들도 어쩌면 내 인생에 소중한 기회였을 거라는 후회가 가슴을 사무치게 합니다. 나는 세월이 흐른 후에도 그것들이 기회였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쁜 일도 기회였다는 것을.
지성으로 예배에 참석했던 소년 시절에 플래시를 도둑맞은 일도 내 신앙을 반석 위에 올려놓을 수 있는 기회였던 것을. 지나간 세월 속에서 내게 찾아왔던 기회들은 하늘이 내려준 은혜이고 사랑이었던 것을 나는 깨닫지 못했군요. 한때의 좌절과 슬픔도 기회였다는 것을 나는 알지 못했네요.
173페이지
나는 통속의 거리에서 잠시 <과거는 흘러갔다>를 흥얼거리다가 살아왔던 날들의 아쉬움과 미련을 내보내기로 작정합니다. 희망이 숨쉬지 않는 낡은 그리움도 땅에 묻기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