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커피하우스
정다겸 지음, 송재정 극본 / 양문 / 201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커피하우스

 

강승연 : 서울특별시 구로구 고척2동 38번지 '궁전커피' 아마추어 바리스타. 9급공무원 시험 준비중.


이진수 : 소설가. 출간하는 족족 100만 부를 넘긴 초 초 초대박 인기작가. 웬만한 연예인 뺨치는 훈훈한 외모. 대중들 앞에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신비주의.

 

 

 

 

 

"제 와이프가 지금 입덧이 너무 심해서 아무것도 못 먹는데, 신혼여행 때 먹었던 이 집 치킨이 먹고 싶다고 서울에서 여기까지 왔거든요. 저녁 비행기 타고 다시 올라가야 해서...... 지금 꼭 먹어야 하는데."
더할 나위 없이 깨가 쏟아지는 신혼부부인 양 진수가 승연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승연은 순간 헉, 하고 긴장되어 몸이 굳었으나, 치킨집 주인이 '정말요?'라는 표정으로 두 사람을 뚫어지게 쳐다봤기 때문에 진수의 장단에 같이 춤을 출 수밖에 없었다.
"우욱~."
승연은 어느새 입덧을 시작했다.
"아이구...... 세상에. 이를 어째."
주인이 안타깝다는 듯 쳐다보더니 밝게 웃으며 말했다.
"여기 좀 있어 봐요. 이렇게 특별한 손님을 어떻게 그냥 보내나. 내가 오토바이 타고 얼른 읍내 가서 닭 구해올 테니까 기다려요."
주인이 휭- 하게 나갔다. 진수는 승연의 어깨에서 손을 내리더니 여유롭게 의자에 앉아 TV를 켜고 뉴스를 보기 시작했다.
승연도 따라서 마주앉았다.
"와아...... 아니 어쩌면 세상에...... 그렇게...... 소설을 잘 쓰세요?"
"소설가니까."
"아 참...... 소설가시지."
"자기도 소질 있어 보이던데."
"네?"
"우욱~ 도 할 줄 알고."

 

 

 

 

 

 

"제가 선생님을 선생님으로 안 보구...... 자꾸만...... 자꾸만 좋아하는 마음이 생겨서 그렇다구요!!! 그런데 선생님한테는 대표님이 계시고...... 그래서 표낼 수도 없고...... 일하면서 상사한테 이런 마음 품는 거, 그거 아마추어잖아요!! 프로 아니잖아요!! 그런데 저는, 자꾸 계속 좋아지는데 어떡해요!! 그래서 미국까지 따라가서 같이 있으면 그냥 막 뻥 터져버릴 거 같은데 어떡하라구요!!!"
"......뭐어?"
진수는 이미 빵 터져버린 듯 엉엉 울고 있는 승연을 기막힌 듯 바라봤다. 눈물 때문에 가뜩이나 검고 커다란 승연의 눈동자가 더욱 크게 보였다. 저 커다란 눈으로 '프로가 되고 싶어요!!!'라고 외치던 그때가 갑자기 오래전 일처럼 느껴졌다.
"좋아. 세번째 이유는 차분하게 살펴보자. 우서, 서 대표하고 난 아무 사이가 아니야."
"......예?"
끄윽끄윽 울던 승연이 조금 정신을 차렸다.
"임자 있는 남자 좋아하는 불륜코드는 패스."
"정말요?"
"이 와중에 재확인까지 하고 싶어? 하긴, 중요한 거니까 재확인 인정. 서 대표하고 난 아무 사이가 아니야."
"아......"
"다음, 일이냐 사랑이냐 양자택일의 문제인데, 난 일하면서 사랑까지 하는 게 아마추어라고 생각하지 않아. 오히려 고도의 프로만이 그 두 가지를 할 수 있다고 봐."
"아~~~~."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문제는 짝사랑인데, 그건 자기 노력여하에 달린 거 아닌가? 내가 자기한테 반하도록 최선을 다하는게 해결 방법인 거 같은데. 물론 그러려면 당연히 비서직을 계속하는 게 유리할 거고."
"아~~~~~~~."
승연은 어느새 눈물을 멈추고 입을 쩍 벌린 채 진수의 달변에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있었다.
그러다 승연의 뇌리 속에 순간, 무언가 번쩍~ 하고 지나갔다. 설마...... 설마......
"선생님......"
"응?"
"지금...... 저한테......선생님 꼬셔보라고 시키시는 거예요?"
"어?"
"설마......설마, 선생님......"
승연은 두 번의 실수는 하고 싶지 않아 고개를 계속 갸웃했다. 진수의 작업실로 찾아가 처음 이 질문을 했을 때는 지금이랑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어어어어엄청 아마추어였고, 또 술까지 취했었다. 그래서 그 망신을 당한 거였지만...... 하지만 지금은 다르잖아! 이제 난 이진수라는 사람에 대해서도 웬만큼 알고, 또 알코올이라고는 한 방울도 들어가지 않은 제정신이라고!!
승연은 침을 꼴깍 삼키고 물었다.
"혹시...... 저...... 좋아하시는 거예요?"
진수는 승연의 빛나는 까만 눈동자를 쳐다봤다. 앞으로 이 눈동자를 바라보고는 거짓말을 잘 못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아닌데."
물론 장난이야 칠 수 있겠지만.
"혹시가 아니라, 확실히, 좋아하는 거 같은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당신만 아는 비밀
소피 킨셀라 지음, 장원희 옮김 / 황금부엉이 / 200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당신만 아는 비밀

 

 

 

 

 

"엠마, 왜 그런 남자를 만나?"
"네?" 난 여전히 웃다가 고개를 든다. 그제야 난 잭 하퍼가 웃음을 멈춘 상태임을 깨닫는다. 잭이 날 바라본다. 읽을 수 없는 표정을 띠고 있다.
"왜 그 남자를 만나냐고." 잭이 되풀이한다.
웃음이 잦아든다. 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다.
"무슨 말씀이세요?" 난 시간을 벌 요량으로 말한다.
"코너 마틴. 그 남자는 엠마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없어. 당신의 모든 걸 채워줄 수 없다고."
난 잭을 쳐다본다. 뭔가 뜨끔한 기분.
"누가 그러는데요?"
"나도 코너란 남자에 대해 전혀 모르는 건 아니라고 봐. 그 사람과 같이 회의에도 참석해 봤고 그 사람 머릿속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대강 봤어. 좋은 남자인 건 맞아. 하지만 당신한텐 단순히 좋은 남자로는 모자란다고." 잭은 날 오랫동안 바라본다. "내 짐작이긴 하지만, 당신도 코너와 같이 사는 게 딱히 내키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거절하기는 또 뭐해서 그냥 묻혀서 따라가는 것뿐이지."
기분이 갑자기 나빠진다. 불쾌하다. 자기가 뭔데 날 분석하고 그래? 그것도 왜 그렇게...... 그렇게 잘못된 결론을 내리는 건데? 무슨 소리야, 당연히 난 코너랑 같이 살고 싶다고.
"오해를 하셨나 보군요." 난 차갑게 말한다. "저는 코너와 함께 살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어요. 심지어...... 심지어 조금 전만 해도 책상에 앉아서 빨리 같이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 걸요."
어때, 당신이 졌지?
잭은 고개를 젓는다.
"당신한텐 불꽃이 팍팍 튀는 남자가 필요해. 당신을 흥분시켜 줄 사람."
"말씀드렸잖아요. 비행기 안에서 한 말들은 진심이 아니었다니까요. 코너는 절 흥분시켜요!" 난 반항적인 표정을 짓는다. "어제...... 저희 못 보셨어요? 상당히 열정적인 사이로 보이지 않던가요?"
"아, 그거." 잭은 어깻짓을 한다. "난 꺼져 가는 열기를 어떻게든 되살려 보려는 처절한 몸부림이라고 생각했는데."
난 잡아먹을 듯한 표정으로 잭을 쳐다본다.
"그런 것 아니었어요!" 난 물어뜯듯 말한다. "그저...... 순간적인 열정에 휩싸여 저지른 일이었을 뿐이에요."
"아, 그래?" 잭이 온화하게 말한다. "내 착각이로군."
"그나저나 회장님이 무슨 상관이세요?" 난 팔짱을 낀다. "제 행복이 회장님과 무슨 관계가 있냐고요?"
부담스런 침묵이 흐른다. 어느새 내 호흡이 가빠져 있음을 깨닫는다. 잭의 검은 눈과 시선이 부딪치는 순간 난 얼른 고개를 돌린다.
"내 자신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해 봤지." 잭은 그렇게 말하고 어깻짓을 한다. "아마 우리가 함께 비행기 안에서 특이한 경험을 했기 때문일까. 어쩌면 우리 회사에서 내게 잘 보이려고 억지로 되지도 않은 유치한 연기를 하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 당신이기 때문일까."

 

 

 


"엠마, 코너와의 일은 들었어. 안됐지 뭐야."
"네?" 난 놀라 고개를 번쩍 든다. 낸시라는 여자가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다.
"정말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지 뭐야! 왜 하필 두 사람이 헤어진 건지 난 정말 상상도 못 하겠네. 하지만 뭐, 남녀 사이의 일은 당사자들 빼고는 모르는 법이니까......"
난 멍하니 낸시를 바라본다.
"저기...... 어떻게 아셨어요?"
"어머, 모르는 사람 없어!" 낸시가 말한다. "금요일 저녁에 환송회 겸 해서 술자리가 있었잖아? 코너가 거기에 왔다가 완전히 곤드레만드레 취해 버렸지. 그래서 모두를 붙잡고 말을 하던걸, 아예 일장 연설을 늘어놓더라고."
기절하시겠네. 우리가 헤어졌다고 코너가 연설을 늘어놓으셨다고? 입 다물고 있기로 해 놓고서 회사 전체를 자기 편으로 만들어?

 

 

 

 


이럴 수는 없어. 여긴......
농담이 아니다. 창문 밖을 내다보며 난 입을 떡 벌린다. 여긴 우리 집 앞 좁은 골목길 아니야?
버스는 바로 우리 집 앞에 멈춰 섰다.
계단을 뛰어 내려가다가 하마터면 발목을 삘 뻔한다. 난 얼떨떨한 표정으로 버스 기사를 바라본다.
"엘러우드 가 41번지 내리세요. 기사가 배우처럼 멋을 부려 말한다.
이건 현실이 아니야. 말도 안 돼.
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버스 안을 살펴본다. 술에 취한 십대 두 명이 날 빤히 쳐다본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난 기사를 바라본다. "혹시 그 사람이 돈을 주던가요?"
"500파운드 받았습니다." 기사가 윙크를 하며 말한다. "그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아가씨, 나라면 그 남자 절대 안 놓칠 거유."
500파운드라고. 크어어억.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Book] 늦둥이 공주와 늑대 신사
현희 지음 / 시크릿e북 / 201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늦둥이 공주와 늑대 신사(현희)


“내가 왜 꼬맹이예요. 나도 21살이나 먹었는데.”
“21살? 난 35살이다. 넌 나한테 어린애거든. 그리고 넌 대체 왜 사람 말을 앞에만 들어? 뒤에도 들어라. 난 분명히 꼬.맹.이.공.주. 라고 했다. 공.주. 붙였다고.”
아주 대놓고 자신을 꼬맹이 취급하는 도진이 점점 더 맘에 들지 않았다. 유빈과 달리 도진은 재깍재깍 반응하는 그 행동이 그저 귀여울 따름이었다. 어쩐지 뭐하나 건드리면 꼬박꼬박 반응하는 것이 유건과 똑같았다. 이러니 남매인가 싶었다.
“반말하지 마요!”
“싫어. 내가 너보다 나이 많거든? 그리고 내가 네 오빠 친구라니까. 김유건 친구, 차도진.”
“기막혀.”
“계속 기막혀 하세요. 꼬맹이 공주.”
도진과 유빈이 나이랑 꼬맹이라는 호칭 가지고 티격태격하는 사이에 유빈의 집 앞에 도착했다. 도진이 살며시 능글맞은 웃음을 지었다.
“여기까지 데려다 줬는데 볼에 뽀뽀 한번 안 해줄래? 유건이한테는 잘해준다던데.”
“미…… 미쳤어! 변태!”
유빈이 당황해서는 차에서 얼른 내렸다. 도진은 창문을 내려서 유빈을 불러 세웠다.
“어이! 꼬맹이 공주님.”
“왜, 왜요!”
“집에 잘 들어가라고. 그리고 다음번에 볼 때는 오빠라고 불러라.”
웃겼다. 말끝마다 꼬맹이 공주를 남발하지를 않나. 이제는 대놓고 볼에 뽀뽀 해달라는 변태 짓을 하지를 않나, 더불어서 다음번에 볼 때는 오빠라고 부르라고 하지를 않나. 아무리 생각해도 유빈은 도진이 이상한 사람으로만 보였다. 한 마디로 도진은 유빈에게 변태 또는 이상한 사람으로 낙인이 찍혀 버린 후였다.
“하하하.”
도진은 차를 몰고 병원으로 향하는 중에 아무리 생각해도 유빈이 귀여웠다. 말끝마다 재깍재깍 반응을 하지 않나, 더불어 사람 말은 앞에만 듣고 뒤에는 듣지도 않는지 앞에 말 가지고 시비를 걸어오지를 않나. 뽀뽀 해달라니까 변태라고 당황해서 소리치며 내리는 것 역시 귀여웠다. 자신이 생각한 것 보다 훨씬 더 귀엽고 잘 큰 것 같아 도진은 기분이 좋았다.
“꼬맹이 공주, 넌 내꺼야. 이제 넌 내 손을 못 벗어나게 될 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Book] 사랑아, 제발
이명우 / 에피루스 / 201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랑아 제발 (이명우)

 

강선(25세) : 미대 졸업. 대학원을 다니며 미술관 큐레이터를 꿈꾸며 공부하고 있다.

 

강신혁(30세, 정수완) : 강선의 아버지 강우식 사장이 설립한 주식회사 <오성>의 기획실장.

 

 

 

 

 

 

“오, 오빠? 왜 이래?”
“너도 바라던 거 아닌가?”
“내가 뭘?”
“나!”
씨익 웃는 그의 모습이 악마가 따로 없다. 선은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너, 늘 내 주변을 맴돌면서 날 갖고 싶어 했잖아.”
“오, 오빠?”
확신하는 그의 말에 선은 펄쩍 뛰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모든 걸 안다는 듯이 야릇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말해 봐. 너도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
그가 여전히 움켜쥐고 있던 그녀의 팔을 더욱 꽉 움켜쥐고 거칠게 흔들었다. 그의 더운 숨결이 바로 코앞에서 떨어져 나간 입술보다 더 뜨겁게 느껴졌다. 선은 목구멍에 커다란 덩어리가 묵직하게 걸려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떨리는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선의 음성은 거의 쇳소리에 가까웠다.
“내가 네 친오빠가 아니라는 거, 너도 이미 알고 있었잖아.”
악마처럼 새까만 눈동자로 선의 팔을 바짝 움켜쥔 그가 씹어 뱉듯 음산한 말을 내뱉었다. 순간 선은 감추지 못하고 격한 숨을 훅, 들이켰다.
“너와 나,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이라는 거. 내가 아버지의 핏줄도, 어머니의 핏줄도 아니라는 거!”

 

 

 

 

 

 

“목에 키스마크가 너무 선명해서 옷을 입을 수가 없어.”
그가 조금은 흔들려 주길 바랐다. 적어도 눈빛이라도 변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마치 듣지 못한 듯 전혀 반응이 없었다.
“다시는 내 목은 건드리지 마. 그리고 절대 내 방에도 들어오지 마. 앞으로 엄마 아빠 계신 집에선 절대 안 돼.”
대꾸가 없는 그에게 화가 난 선은 좀 더 분명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는 역시 반응하지 않았다. 마치 무슨 뜻인지 모른다는 듯 운전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오빠! 대답해! 집에선 안 된다고, 하던 대로 오빠 오피스텔에서 만나는 것만 허락할 거야. 알아들어?”
“도착했다. 어느 쪽에 세워 줄까?”
그는 그녀의 말은 싹 무시하면서 천천히 속력을 줄이면서 말했다.
늘 이런 식이다. 밤엔 누구보다 뜨거운 연인이지만 해가 뜨면 그는 무뚝뚝한 오빠이자 성실한 아들로 변신한다.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도 않았고, 그 어떤 개인적인 행동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작은 접촉조차 꺼려했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선에게 상처로 다가왔다. 하지만 여기까지. 고집쟁이에 욕심쟁이였던 어린 시절처럼 억지라도 부리고 싶었지만 선은 이제 그럴 수가 없었다. 강신혁이란 남자를 욕심낸 후론 그녀는 늘 자신을 누르고 참아야 하는 약자가 되고 말았다.
“저쪽 다리 위에 세워 주면 돼.”
선은 입술을 깨물면서 아무 곳이나 가리켰다. 그는 정확히 선이 말한 위치에 차를 세웠다.
“입술 깨물지 마. 상처 나.”

 

 

 

 

 


“나 이젠 오빠 동생 아니잖아. 더 이상 우린 남매가 아니잖아. 차라리 시작을 말지, 아니면 좀 놓아주든가, 이젠 정말 지친다. 언제까지, 언제까지 이렇게 숨 졸이면서 아닌 척 살아야 하는 건데?”
선이 놓아 달란다. 이젠 지친단다.
언제나 같은 자리에 서 있던 선이 처음으로 내뱉은 모진 말에 신혁의 가슴이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강선, 너…….”
“기형 선배가 나 좋대. 나 좋다는 남자가 생겼다고!"
신혁은 순간 머릿속이 멍해지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오빤 아무렇지도 않아? 정말 내가 다른 남자한테 가도 괜찮겠어? 흐흐흑!”
선은 그가 침묵하자 이젠 바닥에 주저앉아 통곡같이 소리쳤다.
신혁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 굳어진 그의 표정은 여전히 딱딱했다.
“오빠, 제발…….”
선은 마지막 애원을 하듯 무너지며 울부짖었다.
꼿꼿하게 장승처럼 서 있던 신혁은 다시 터져 나오는 선의 눈물에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그는 천천히 무릎을 꿇고 떨리는 손으로 선의 어깨를 잡았다.
“울지 마라. 제발…….”
그녀의 떨리는 어깨를 감싸며 그의 입에서 처음으로 감정이 가득 담긴 말이 흘러나왔다. 선은 어깨에 닿는 그의 뜨거운 손에 더욱 흐느꼈다. 그의 흔들리는 음성에 더욱 서러운 눈물이 솟구쳤다.
“오, 오빠…….”
그는 커다란 손으로 흘러내리는 그녀의 눈물을 닦아줬다. 하지만 선의 눈물은 아무리 닦아내도 또다시 흘러내렸다. 늘 그를 괴롭히는 악몽과 같은 가슴 아픈 통증이 밀려왔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선의 눈물이 마치 핏물처럼 그의 가슴에 떨어졌다.
이젠 정말 한계다. 신혁은 더 이상 자신을 속일 수가 없었다. 선의 눈물을 계속 볼 자신도 없었고, 그녀를 놓을 수도 없었다. 다른 남자에게 보낸다는 건 더더욱 참을 수가 없었다. 무슨 짓을 해서든 선을 영원히 곁에 두고 싶었다. 그것이 설령 선을 아프게 할지라도, 그를 살려 준 부모님을 배신하는 일이라도, 선을 마음에 품고 안은 그 순간부터 이미 꿈꾸기 시작한 욕심이라는 걸, 버티는 것이 더욱 어리석은 일이라는 걸, 그는 이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쌀례 이야기 세트 - 전2권
지수현 지음 / 테라스북(Terrace Book) / 2011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쌀례 이야기 (지수현)

 

 


박쌀례 : 열네 살, 시집가기엔 아주 좋은 나이라구요?  

할아버지가 꺼낸 날벼락 같은 혼담에 쌀례는 낭군 될 남정네가 궁금하기 짝이 없다.
그는 늙었나? 어린애일까? 절세추남인가? 아편쟁이인가? 다행히 정혼자는 경성표 꽃미남 대학생! 하지만 첫 만남부터 콩알만 한 자기 색시 바라보는 그 청년 표정이 심상치 않다.

 


한선재 : 이 꼬마 상대로 무슨 신방 차리고 대를 이으라는 겁니까?


경성제대 법학부에 다니는 수재에 꽃미남 청년 한선재.
친일파 아버지 대신 민족에 봉사하겠다고 일제가 금지(禁止)하는 조선어 야학운동을 하였기로서니, 그 벌로 자기 팔꿈치에도 닿지 않을 꼬꼬마 코흘리개에게 장가들게 생겼다.
부모님이 소개하는 꼬꼬마 정혼녀에게 “혼인은 사랑하는 사람하고 해야 하는 거란다.” 설교를 하였으나 그 정혼녀는 “당신은 이미 나의 낭군이고 이 댁 아니면 난 갈 곳이 없으니 사람 하나 살리는 셈 치고 쫓아내지만 말아 달라.” 사정하는데…….
결국, 선재는 아버지에게 야학에 대한 원조를 끊지 않겠다는 약속을 덤으로 받고 열네 살 꼬맹이와 결혼에다 신방까지 차리게 된다.
선재는 상황이 끔찍하기만 하다. 결국 어린 아내에게 은밀한 제안을 하는데……. 이봐, 꼬마야. 결혼은 구식으로 했어도 이혼만은 우리 신식으로 해보지 않겠니?

 


유금주 : “아니, 어떻게 나의 선재 씨가 저런 꼬맹이와! 이건 악몽이야!”

한선재와 쌀례의 혼례를 지켜보면서 선재의 여학우 이화여학교의 여왕 유금주는 피눈물을 뿌린다.
이제나저제나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선재와 신식 결혼을 꿈꾸었던 금주는 족두리에 활옷원삼 차림의 조그마한 새신부와 초례청에 마주선 선재의 모습에 억장이 무너지고…….
이대로 그를 포기할 수 없다는 생각에 신혼 중인 선재의 집에 찾아가 “우리, 야반도주합시다!”며 선재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들이대는 모험을 감행한다. 하필이면 그때!

 


윤찬경 : 거지는 늘 배가 고픈 법이거든. 나 건드리는 놈들은 내가 다 잡아먹어 버린다!

동료 거지 떼에게 공격받고 있는 쌀례를 구해준 인연으로 쌀례네 시댁에 머슴으로 취직하는 미스터리한 남자. 그는 선재가, 도련님이 참 부럽다. 만석꾼 아버지도, 입고 있는 그 교복도, 그리고 곁에 붙어 있는 쌀알 같은 계집아이도……. 부러운 건, 갖고 만다! 

 

남편과 여학우의 입맞춤 모습을 정통으로 보아버린 쌀례! 충격을 받고 집을 뛰쳐나가 눈 오는 경성 길바닥을 헤매게 되는데…….
그런 쌀례의 앞에 떼거지들이 나타났다! 조그만 꼬마가 은비녀를 꽂고 어른 흉내 내는 건 가당치 않으니 머리에 꽂은 은비녀를 적선하라는 거지들의 요구에 기겁하는 쌀례.
그때! 그들 앞에 짠하고 수표교 원조 꽃거지 찬경이 나타나 쌀례를 구해주는데…….

 

 

 

 

 

 

 

“성례야, 네 나이 올해 열다섯이렷다?”
쌀례는 내심 이상하다 싶었다.
성례는 분명히 그녀의 이름이었지만 집안사람들에게 그녀는 ‘쌀례’로 불린다.
사대부 여식으로 본명은 ‘성례’이나 쌀알이 주렁주렁 열리는 아명을 가지고 평생 배곯지 말라는 뜻에서 그녀는 일 년 365일 중 360일 정도는 ‘쌀례’였던 것이다. 나머지 5일, 쌀례가 ‘성례’로 칭해지는 날은 뭔가 껄끄러운 일이 생기는 날이었다. 가장 최근 ‘성례’로 불렸을 때, 쌀례는 어머니의 재가에 대해, 엄마와 동생과 이제는 이별이라는 사실을 함께 들어야 했었다. 이번엔 뭐지? 잔뜩 불안한 얼굴로 손녀가 답했다.
“아홉 달쯤 더 있어야 열다섯이 되어요.”
순간, 늙은 선비의 주름진 얼굴에 곤혹스러움이 스쳤다. 손녀딸이 못 먹고 자라 또래보다 작은 줄만 알았는데 아직 어린아이였던 것이다. 하지만 얼마 안 가 노인은 망설임을 털어버리고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되었다. 열넷이건 열다섯이건 계집아이가 출가하기에 아주 적당한 나이니라. 네 할미도 그 나이 때 이 할아비에게 왔느니.”

 

 

 

 

 


“찬, 경. 이게 오라버니 이름이야. 어때? 재미있죠? 신기하죠?”
“글쎄요. 뭐 그닥, 재미는 없는뎁쇼.”
불퉁한 얼굴로 중얼거리면서도 남자는 여자아이가 가르쳐 준 자기 이름을 서툴게 삐뚤삐뚤 따라 그려보았다. 몇 번 자기 이름을 써 보던 남자가 시선은 여전히 종이에 둔 채로 여자아이에게 물었다.
“……아씨 이름은 어찌 씁니까?”
“내 이름이요? 어, 왜요?”
한순간, 연필을 쥐고 있던 그의 손이 멈춰지다가, 남자가 더듬거리며 대꾸했다.
“나, 남 가르칠 만큼 실력이 되나 해서 그럽니다! 아씨는 아씨 이름 제대로 쓸 줄 아쇼?”
불퉁한 남자의 그 소리에 여자아이는 그도 그렇겠다 싶었던지 백지 위에 자신의 이름을 써 보였다. 얼마간이라도 먼저 글을 배운 선배답게, 또렷한 글씨로 ‘박성례’라고.
“박, 성, 례. 이 정도면 가르칠 만하죠?”

 

 

 

 

 

 

“내가 이 새벽에 도망가는 게 낫겠어? 아니면 그쪽 서방 대신 거길 가야 하는 거야?”
서방 대신 군대 가라고만 해봐. 찬경은 속으로 초조하게 읊조렸다. 만약 너까지 그 괴물 영감쟁이처럼 그놈 살리려고 내게 안달한다면, 나는 기필코 도망갈 거야. 하지만 너도 아마 필시 그놈 살리고 싶어 하겠지. 내 목숨 따위야 아무도 신경 쓰지 않으니까.
그런데 어쩐 일인지 “미안하지만 가주세요.”라고 단번에 말할 줄 알았던 그 계집아이는 꽤 오래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나지막한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망가세요. 아무도 안 볼 때.”

 

 

 

 

 

“학교에선 혼인했다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하신 건 서방님이시잖아요. 공연히 서방님과 아는 척했다가 황당한 스캔들 주인공이 되고 싶진 않아요.”
“황당한 스캔들?”
그야말로 황당하다는 듯 되묻는 선재에게 쌀례는 뾰로통한 어조로 대꾸했다.
“동문 선배 애인이라고 소문난 남자분과 아는 척했다가는 온 학교에 삼각 치정 문제라고 소문나는 건 시간문제 아니겠어요? 여학교라는 곳, 입소문이 상당히 무섭더라구요.”
남편과 선배는 비련의 주인공들, 자신은 거기 낀 가해자라는 이 현실이 쌀례도 황당했다. 화가 났다. 슬프다. 지금 당장 황당한 얼굴로 자신을 보는 선재에게 드러내놓고 물어보고 싶었다.

 

 

 

 

 

 

“서방님은 제가 떠났으면 좋겠어요?”
그가 ‘아니.’라고 대답해 주길 바라면서 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남자는 전처럼 바로 ‘아니.’라고 답해주지 않았다. 곤혹스런 얼굴로 그녀를 보던 그는 그녀가 원하는 대답이 아닌 다른 말을 한다.
“모르겠다.”
모르겠다.
모르겠다.
대답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쌀례는 생각했다.
그렇다. 아니다.
그러나 세 번째가 있었다.
모르겠다.
거짓말은 못하는 사람이니까 정말 모르겠어서 모르겠다고 하는 것일 게다.

 

 

 

 

 


“나하고, 혼인해 주시겠습니까?”
혼인한 지 7년 만에 남자는 묻고 있었다.
얼굴을 붉히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그래도 그녀를 바라보는 것은 멈추지 않으면서 그는 물었다.
“나는 내가 봐도 답답한 구석이 많은 한심한 놈이긴 합니다만…… 지금까지처럼 때때로 당신 속을 상하게 할 일이 아주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그래도 당신과 살고 싶습니다. 내가 살고 싶은 건 당신뿐입니다. 이런 나하고, 혼인해 주시겠습니까.”
한걸음 떨어진 그 앞에 그녀가 다시 한걸음 다가갔다. 그리고 대답했다.
“예. 혼인하겠어요, 당신과. 당신하고, 혼인하겠어요.”
자꾸만 흘러내리려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치면서, 행여나 그가 알아듣지 못할까 봐 조바심 내며 조금씩 큰 소리로.
다시 그의 팔이 그녀의 허리를, 그녀의 팔이 수줍게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
그렇게 가만히 그의 품에 안겨 있으면서, 여자는 문득 또 다른 남자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늙은 한가나 네 서방에게 전해. 조만간 내가 빚 받으러 간다고.
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