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례 이야기 세트 - 전2권
지수현 지음 / 테라스북(Terrace Book) / 2011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쌀례 이야기 (지수현)

 

 


박쌀례 : 열네 살, 시집가기엔 아주 좋은 나이라구요?  

할아버지가 꺼낸 날벼락 같은 혼담에 쌀례는 낭군 될 남정네가 궁금하기 짝이 없다.
그는 늙었나? 어린애일까? 절세추남인가? 아편쟁이인가? 다행히 정혼자는 경성표 꽃미남 대학생! 하지만 첫 만남부터 콩알만 한 자기 색시 바라보는 그 청년 표정이 심상치 않다.

 


한선재 : 이 꼬마 상대로 무슨 신방 차리고 대를 이으라는 겁니까?


경성제대 법학부에 다니는 수재에 꽃미남 청년 한선재.
친일파 아버지 대신 민족에 봉사하겠다고 일제가 금지(禁止)하는 조선어 야학운동을 하였기로서니, 그 벌로 자기 팔꿈치에도 닿지 않을 꼬꼬마 코흘리개에게 장가들게 생겼다.
부모님이 소개하는 꼬꼬마 정혼녀에게 “혼인은 사랑하는 사람하고 해야 하는 거란다.” 설교를 하였으나 그 정혼녀는 “당신은 이미 나의 낭군이고 이 댁 아니면 난 갈 곳이 없으니 사람 하나 살리는 셈 치고 쫓아내지만 말아 달라.” 사정하는데…….
결국, 선재는 아버지에게 야학에 대한 원조를 끊지 않겠다는 약속을 덤으로 받고 열네 살 꼬맹이와 결혼에다 신방까지 차리게 된다.
선재는 상황이 끔찍하기만 하다. 결국 어린 아내에게 은밀한 제안을 하는데……. 이봐, 꼬마야. 결혼은 구식으로 했어도 이혼만은 우리 신식으로 해보지 않겠니?

 


유금주 : “아니, 어떻게 나의 선재 씨가 저런 꼬맹이와! 이건 악몽이야!”

한선재와 쌀례의 혼례를 지켜보면서 선재의 여학우 이화여학교의 여왕 유금주는 피눈물을 뿌린다.
이제나저제나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선재와 신식 결혼을 꿈꾸었던 금주는 족두리에 활옷원삼 차림의 조그마한 새신부와 초례청에 마주선 선재의 모습에 억장이 무너지고…….
이대로 그를 포기할 수 없다는 생각에 신혼 중인 선재의 집에 찾아가 “우리, 야반도주합시다!”며 선재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들이대는 모험을 감행한다. 하필이면 그때!

 


윤찬경 : 거지는 늘 배가 고픈 법이거든. 나 건드리는 놈들은 내가 다 잡아먹어 버린다!

동료 거지 떼에게 공격받고 있는 쌀례를 구해준 인연으로 쌀례네 시댁에 머슴으로 취직하는 미스터리한 남자. 그는 선재가, 도련님이 참 부럽다. 만석꾼 아버지도, 입고 있는 그 교복도, 그리고 곁에 붙어 있는 쌀알 같은 계집아이도……. 부러운 건, 갖고 만다! 

 

남편과 여학우의 입맞춤 모습을 정통으로 보아버린 쌀례! 충격을 받고 집을 뛰쳐나가 눈 오는 경성 길바닥을 헤매게 되는데…….
그런 쌀례의 앞에 떼거지들이 나타났다! 조그만 꼬마가 은비녀를 꽂고 어른 흉내 내는 건 가당치 않으니 머리에 꽂은 은비녀를 적선하라는 거지들의 요구에 기겁하는 쌀례.
그때! 그들 앞에 짠하고 수표교 원조 꽃거지 찬경이 나타나 쌀례를 구해주는데…….

 

 

 

 

 

 

 

“성례야, 네 나이 올해 열다섯이렷다?”
쌀례는 내심 이상하다 싶었다.
성례는 분명히 그녀의 이름이었지만 집안사람들에게 그녀는 ‘쌀례’로 불린다.
사대부 여식으로 본명은 ‘성례’이나 쌀알이 주렁주렁 열리는 아명을 가지고 평생 배곯지 말라는 뜻에서 그녀는 일 년 365일 중 360일 정도는 ‘쌀례’였던 것이다. 나머지 5일, 쌀례가 ‘성례’로 칭해지는 날은 뭔가 껄끄러운 일이 생기는 날이었다. 가장 최근 ‘성례’로 불렸을 때, 쌀례는 어머니의 재가에 대해, 엄마와 동생과 이제는 이별이라는 사실을 함께 들어야 했었다. 이번엔 뭐지? 잔뜩 불안한 얼굴로 손녀가 답했다.
“아홉 달쯤 더 있어야 열다섯이 되어요.”
순간, 늙은 선비의 주름진 얼굴에 곤혹스러움이 스쳤다. 손녀딸이 못 먹고 자라 또래보다 작은 줄만 알았는데 아직 어린아이였던 것이다. 하지만 얼마 안 가 노인은 망설임을 털어버리고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되었다. 열넷이건 열다섯이건 계집아이가 출가하기에 아주 적당한 나이니라. 네 할미도 그 나이 때 이 할아비에게 왔느니.”

 

 

 

 

 


“찬, 경. 이게 오라버니 이름이야. 어때? 재미있죠? 신기하죠?”
“글쎄요. 뭐 그닥, 재미는 없는뎁쇼.”
불퉁한 얼굴로 중얼거리면서도 남자는 여자아이가 가르쳐 준 자기 이름을 서툴게 삐뚤삐뚤 따라 그려보았다. 몇 번 자기 이름을 써 보던 남자가 시선은 여전히 종이에 둔 채로 여자아이에게 물었다.
“……아씨 이름은 어찌 씁니까?”
“내 이름이요? 어, 왜요?”
한순간, 연필을 쥐고 있던 그의 손이 멈춰지다가, 남자가 더듬거리며 대꾸했다.
“나, 남 가르칠 만큼 실력이 되나 해서 그럽니다! 아씨는 아씨 이름 제대로 쓸 줄 아쇼?”
불퉁한 남자의 그 소리에 여자아이는 그도 그렇겠다 싶었던지 백지 위에 자신의 이름을 써 보였다. 얼마간이라도 먼저 글을 배운 선배답게, 또렷한 글씨로 ‘박성례’라고.
“박, 성, 례. 이 정도면 가르칠 만하죠?”

 

 

 

 

 

 

“내가 이 새벽에 도망가는 게 낫겠어? 아니면 그쪽 서방 대신 거길 가야 하는 거야?”
서방 대신 군대 가라고만 해봐. 찬경은 속으로 초조하게 읊조렸다. 만약 너까지 그 괴물 영감쟁이처럼 그놈 살리려고 내게 안달한다면, 나는 기필코 도망갈 거야. 하지만 너도 아마 필시 그놈 살리고 싶어 하겠지. 내 목숨 따위야 아무도 신경 쓰지 않으니까.
그런데 어쩐 일인지 “미안하지만 가주세요.”라고 단번에 말할 줄 알았던 그 계집아이는 꽤 오래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나지막한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망가세요. 아무도 안 볼 때.”

 

 

 

 

 

“학교에선 혼인했다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하신 건 서방님이시잖아요. 공연히 서방님과 아는 척했다가 황당한 스캔들 주인공이 되고 싶진 않아요.”
“황당한 스캔들?”
그야말로 황당하다는 듯 되묻는 선재에게 쌀례는 뾰로통한 어조로 대꾸했다.
“동문 선배 애인이라고 소문난 남자분과 아는 척했다가는 온 학교에 삼각 치정 문제라고 소문나는 건 시간문제 아니겠어요? 여학교라는 곳, 입소문이 상당히 무섭더라구요.”
남편과 선배는 비련의 주인공들, 자신은 거기 낀 가해자라는 이 현실이 쌀례도 황당했다. 화가 났다. 슬프다. 지금 당장 황당한 얼굴로 자신을 보는 선재에게 드러내놓고 물어보고 싶었다.

 

 

 

 

 

 

“서방님은 제가 떠났으면 좋겠어요?”
그가 ‘아니.’라고 대답해 주길 바라면서 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남자는 전처럼 바로 ‘아니.’라고 답해주지 않았다. 곤혹스런 얼굴로 그녀를 보던 그는 그녀가 원하는 대답이 아닌 다른 말을 한다.
“모르겠다.”
모르겠다.
모르겠다.
대답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쌀례는 생각했다.
그렇다. 아니다.
그러나 세 번째가 있었다.
모르겠다.
거짓말은 못하는 사람이니까 정말 모르겠어서 모르겠다고 하는 것일 게다.

 

 

 

 

 


“나하고, 혼인해 주시겠습니까?”
혼인한 지 7년 만에 남자는 묻고 있었다.
얼굴을 붉히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그래도 그녀를 바라보는 것은 멈추지 않으면서 그는 물었다.
“나는 내가 봐도 답답한 구석이 많은 한심한 놈이긴 합니다만…… 지금까지처럼 때때로 당신 속을 상하게 할 일이 아주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그래도 당신과 살고 싶습니다. 내가 살고 싶은 건 당신뿐입니다. 이런 나하고, 혼인해 주시겠습니까.”
한걸음 떨어진 그 앞에 그녀가 다시 한걸음 다가갔다. 그리고 대답했다.
“예. 혼인하겠어요, 당신과. 당신하고, 혼인하겠어요.”
자꾸만 흘러내리려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치면서, 행여나 그가 알아듣지 못할까 봐 조바심 내며 조금씩 큰 소리로.
다시 그의 팔이 그녀의 허리를, 그녀의 팔이 수줍게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
그렇게 가만히 그의 품에 안겨 있으면서, 여자는 문득 또 다른 남자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늙은 한가나 네 서방에게 전해. 조만간 내가 빚 받으러 간다고.
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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