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예감
정미림 지음 / 청어람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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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예감 (정미림)

 

서한지(30세) : 택시기사. 2남 1녀 중 장녀. 11살 때 아빠 서 소방관이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여자 혼자의 몸으로 자식 셋을 키우느라 바동거리던 엄마 권 씨마저 간에 이상이 생겨 쓰러지고 말았다. 그때부터 한지는 집안의 가장이 되었다.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작은 회사에서 경리로 일하면서 밤에는 엄마 병 수발에, 어린 동생들 뒷바라지까지 1인 3역을 억척스럽게 했냈다. 이제는 베테랑 택시기사가 되어 동네 사람들의 고장 난 차를 수리해 주는 실력에까지 이르렀다.

 

정지후(30세) : 3살 때 미국으로 입양. 의대, 공대 과정을 다 밟은 천재 과학자. 의대 재학 시절 의료 분야에 나노 기술의 적용을 개발해 낸 천재 팀원 중 한 명. 현재는 사업가. 두 번이나 파양을 당해 피폐해진 자신에게 가정을 준 양부모님의 유언을 기억하며 의료 테마파크를 지을 예정.

 

 

 

 

"급히 기사가 필요합니다. 혹시 2주 정도 운전을 해주실 분 없습니까?"
한지는 전화 내용을 떠올렸다. 2주 안에 오라더니 아마도 기사와의 통화였나 보다. 한지는 한철이의 등록금을 모으기 위해 남의 집 일을 해야 하는 엄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투 잡! 보름 정도 알바를 하면 등록금을 모으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한지는 백미러를 통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날렸다.
"글쎄요. 여기 기사님들은 다들 바쁘셔서...... 저, 정 급하시면 제가 도와드릴 수가 있긴 한데."
한지의 말에 남자의 표정이 굳어졌다.
"왜요? 제가 마음에 안 드세요?"
"네."
너무도 솔직담백한 대답이 돌아오자 팽팽하던 한지의 희망도 남자의 이마처럼 구겨졌다.
"왜요? 저 이래 봬도 베스트 드라이버라고요."
"말 많은 사람 좋아하지 않습니다."
한지의 입이 벌어졌다. 대놓고 말 많은 사람을 싫어한다니. 당장이라도 '됐어요. 나도 필요없어요'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엄마의 모습이 아른거려 차마 그러지 못하는 자신이 싫어질 지경이었다.
"......그렇군요."
기운이 빠진 한지가 보기에 안됐는지 남자가 짧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쁜 뜻이 아니라 일일이 대답해 드리기가 곤란해서입니다."
"저기요, 여태 그러신 것처럼 아무 말 안 하시면 되잖아요. 전 그냥 혼잣말을 잘하거든요. 그러니까 저 혼자 혼잣말한다고 생각하시면 안 될까요?"
한지의 부탁에 남자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낮은 한숨을 뱉어냈다.
"동생 등록금 때문에 그래요. 막둥이가 내년이면 대학생이 되거든요."
거듭되는 한지의 부탁에 남자의 표정이 조금씩 흔들렸지만, 쉽사리 허락이 떨어지지는 않았다. 남자는 차가 시청에 도착할 때까지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젠장. 싫다는 거구나.
한지가 한참 의기소침해 있을 때였다.
"좋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죠."
차에서 내리려던 남자가 무슨 마음에서인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습니다. 진짜 후회하지 않으실 거예요."

 

 

 


"운전기사라면서 펄펄 날아도 다니고, 제법 의리있는 똘마니들도 있고, 정말 기사 맞습니까?"
"몸이 약해서 어릴 때부터 태권도를 꾸준히 했었어요. 택시 운전 시작하면서는 합기도를 했고요. 여자 기사라고 해서 밤 운전을 봐주는 것도 아니고, 강도들이 그냥 넘어가 주는 건 아니니까요."
한지의 말에 지후의 얼굴에 있던 웃음기가 사라졌다.
"밤 운전에 강도라...... 생각도 못했던 위험이네요."
"지금까지 별 탈 없이 잘해왔어요. 앞으로도 그럴 거고요. 그런데 그쪽이야말로 머리도 좋은 양반이 싸움까지 자라면 어떻게 해요?"
"머리 좋은 사람은 맞고만 살아야 합니까?"
"일반적으로 천재는 약골이잖아요. 보통 사람들의 생각은 그렇다고요."
"그러니까 제가 보통 사람들의 고정관념에 어긋난단 말입니까?"
말도 되지 않는 한지의 주장에 지후의 두 눈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그 바람에 긴 속눈썹이 작은 물결을 치며 움직였다. 손을 뻗어 만져 보고 싶은 유혹이 일어났다. 만져 보면 어떤 느낌이 날까? 싸움의 흥분으로 뛰고 있던 한지의 맥박이 더 급해지기 시작했다.
 "그런 표정 하지 말아요."
한지가 말했다.
"왜요?"
지후의 물음에 한지는 망설였다.
'잘생긴 남자가, 돈도 잘 벌고, 싸움도 잘하고, 거기다 찡그리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웃는 것도 그림 같은데 함께 있는 사람이 반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키스 때문에 그래요?"
핵심을 꿰뚫는 지후의 말에 한지는 숨을 삼켰다. 그리고 가까스로 대답을 이어갔다.
"아, 아뇨. 내 나이가 몇 인데...... 그냥 가벼운 키스로......"
......흔들리거나 하지 않아요, 라고 세련되게 말하고 싶었지만 지후는 의미심장한 웃음으로 그녀의 말문을 막아버렸다.
"......왜, 왜 웃어요?"
"나 그렇게 가벼운 사람 아니에요. 충동적이지도 않아요. 지극히 책임감도 강하고 신의를 중요하게 생각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가 그렇게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이 위기를 어떻게 벗어날까 궁리하지 않아도 돼요."
지금 뭐 하자는 거예요? 나랑 연예라도 하려고 그러는 거예요? 죄송하지만 난 가볍고 쿨한 연애 따위 관심 없어요. 그것도 정말...... 정말 좋아하게 된 사람이랑 그러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까 제발 날 흔들지 말라고요. 한지는 감히 입 밖으로 내지도 못할 말들이 행여나 튀어나올까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 그래서요? 그래서 나더러 어쩌라고요?"
그녀는 이 모든 상황이 불안했다. 거리낌이 없이 솔직한 것이 장점이던 자신이 이 남자 덕에 소심하게 변한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의 눈치를 살피며 그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까? 가슴 졸이는 일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행여나 그가 자신의 감정에 대해 실없는 농담이라도 할라 치면 정말 들이박을지도 몰랐다.
"그쪽이 맘에 들어요."
그가 흔들림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백미러를 통해 한지의 얼굴을 바라보는 눈빛에서 장난기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드디어 둘만 남았네."
지후가 한지의 어깨를 눌러 소파에 앉히고 나서 자신도 그녀의 옆에 앉았다. 그의 뜨거운 눈빛에 한지는 조금 전 읽었던 그의 노트를 기억해 냈다. 시험을 앞둔 아이처럼 줄을 긋고 반복해서 연습하던 말들......
한지는 보석처럼 반짝이는 그의 눈동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아름다운 눈동자 안에 자신이 온전히 들어 있었다.
"내게 할 말 없어?"
지후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할 말이 있어야 하는데요?"
"우리 정식으로 사귀기로 한 거. 대답을 해야지."
"......"
"침묵은 긍정적인 대답이라고 생각해도 되니? 좋아. 이쯤 했으면 사람들이 다 눈치를 챘을 만도 한데 아예 공식적으로 발표할까?"
지후가 한지의 팔목을 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하나만 물을게요. 대체 무슨 맘으로 이러는 거예요?"
"무슨 마음이라니? 내가 그랬잖아. 당신이 좋다고."
"나 같은 여잘...... 왜?"
"지금 튕기는 거야? 나 같은 킹카를?"
한지는 긴장으로 침조차 삼키기 어려운 자신과 달리 여유로운 지후가 부럽기까지 했다. 그녀는 깊은 숨을 삼키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나를 잘 모르잖아요.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지금 내가 어떤 형편인지......"
"말했지? 당신보다 내가 당신을 더 잘 안다고. 못 믿겠으면 달리기 한 판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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