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결혼할까요?
김선민 지음 / 청어람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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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참, 너도 곧 결혼한다며?”
“그렇게 됐어. 벌써 소문 돌았나 봐?”
"당연하지. 무려 G재단과 J그룹의 정략인데."
연애해서 결혼하라는 부모님의 뜻을 꺾고, 돌고 돌아 해리는 또다시 정략결혼을 선택했다. 9년 전 건하와의 이혼 후, 두 번의 연애가 모두 처참하게 실패로 돌아가고 나니 더 이상 연애는 하고 싶지 않았다. 타 죽을 것만 같은 뜨거운 연애도, 가랑비에 젖든 서서히 물드는 동화 같은 연애도 결국은 모두 끝이 정해진 만남이었다. 그렇고 그런 사랑들은 곁에 오래 머물러 주지 않앗고, '나보다 더 좋은 사람 만나', 내지는 '난 네게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야' 같은 어설픈 축복만을 남기고 모두 떠나 버렸다.
그래서 해리는 결심했다. 어울리는 사람을 만나자. 날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서 귀찮고 지리멸렬한 연애 같은 건 생략해버리자.
해리는 혼자 살 생각 같은 건 절대로 없었다. 집안과 집안이 적당히 맞는 사람과 결혼해서 적당히 살고 싶었다. 살다가 정도 들고, 운이 좋아 사랑까지 해준다면 더는 바랄 것도 없었다. 결혼이란 장치 안의 아늑함도 갖고 싶었다. 거기에 정략혼으로 인한 결혼 생활이 대부분 그러하듯 어느 정도의 자유로움까지 보장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결혼 생활이기에 해리의 입장에선 맞춤형 결혼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한 달 후 해리의 남편이 되어줄 남자, 함태경. 얼굴도 본 적 없고 목소리도 들어본 적 없는 그 남자.
결혼하겠다고 선언한 지 삼 주 만에 결정된 해리의 상대는 두 살 연하에 외모도 출중하다고 했다. 그 외의 것은 세상에 알려진 게 거의 없었지만 해리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이 나이가 되도록 짝을 찾지 못하고 이 바닥에 남은 사람이라면 돈으로도 커버가 되지 않는 외모를 가졌거나 한 번 다녀왔거나니까. 다행히 그 두개의 경우를 피해갔다고 하니 안심이 되긴 했지만 반대로 그것보다 더한 결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각오도 하고 있기에 두렵지 않았다.
“어때? 소문대로야?”
“글쎄.”
현진의 물음에 해리는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난감했다. 현진이야 남들 하는 말대로 재벌가의 자제고, 그러다 보니 그쪽 사람들의 얘기는 잘 알고 있을지 몰라도 해리는 그런 사람들과는 조금 거리가 있었다. 그를 둘러싼 소문들의 정체는커녕 단 한 번도 만나본 적 없으니 딱히 이을 말이 없었다. 얼굴도 모르는 정혼자를 떠올리려니 너무나 막연했다. 알고 있는 거라곤 그 남자의 이름이 함태경이란 것과 오랜 외국 생활을 정리하고 지난해 빵집을 오픈했다는 것 정도. J그룹의 하나뿐인 아들이 빵집을 한다는 것이 조금 의아하긴 했지만 그 역시 해리에겐 중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아들을 대신해 해리가 J그룹의 후계자 수업을 받기로 양가에선 이야기를 마친 상태였다.
“무슨 대답이 그래? 설마, 두 사람 아직 만나지도 않은 거야?”
“차차 알아가려고.”
해리의 대답에 현진이 기함을 하며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그런 대우를 받아선 안 될 여자다. 그 누구보다도 사랑 받아 마땅한, 아니 더 큰 사랑을 받아도 모자란 여자였다.
“알아봐?”
“전혀.”
“서운하지 않아?”
다비드의 말에 태경은 어깨를 으쓱하며 손등으로 두 눈을 가렸다.
“기억 못하는 게 당연하잖아. 주변에서 얼쩡거리던 1인에 불과했으니까.”
늘 맴돌기만 할 뿐 다가서지 못했던 시간이 무려 9년이었다. 다음 달이면 그런 그녀가 아내가 된다니, 지금 이 순간이 꿈만 같았다.
태경은 이를 악물고 이날만을 기다려 왔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고통 속에서도 죽어서 해리를 영영 보지 못하는 것보단 살아서 고통받는 게 낫다며 독하게 버텼다. 죽음의 문턱에서도 오직 이해리라는 희망 한줄기를 부여잡고 끝까지 매달렸다.
“어쨌건 축하한다. 결국 네 차례가 되었잖아.”
“나까지 순서 안 올까 봐 조마조마했어.”
해리는 이혼 후에도 두 명의 남자와 연애를 했다. 다행히 오래가지 않아 모두 끝이 났고 관계가 그리 깊지 않았다. 아름다운 이별까진 아니더라도 덜 아픈 이별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나쁜 자식들은 한결같이 해리에게 아픔만을 주고 떠나버렸다.
상대방에게 잔뜩 퍼주기만 하는 바보 같은 사랑을 하는 해리는 언제나 약자였다. 그만큼 주고도 더 많이 주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바보 같은 여자. 사랑을 받는 법은 모르고 무작정 주기만 하던 여자. 그런 해리를 멀리서 지켜봐야 했던 태경은 해리가 슬퍼할 때 같이 슬퍼하고, 해리가 아파할 때 같이 아파했다. 그 자리가 내 자리가 아닌 것에 슬퍼했고, 함께 할 수 없어서 아파했다.
그러던 중, 삼 주 전쯤 정 비서를 통해 해리가 다시 한 번 정략혼을 결심했단 소식을 듣고 태경은 곧장 작업에 들어갔다. 가족들을 포섭하는 데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특히 아버지는 오래 전부터 직접적으로 도움을 주고 계셨으니까. 결혼을 생각한다는 것만으로도 부모님들은 감격스러워하셨고, 상대가 해리라는 사실에 두말할 것 없이 진행하자고 하셨다. 혼담이 오고 간 지 일주일 만에 정혼은 성사되었고, 곧장 결혼 준비가 시작되었다.

 

"그래, 당신은 도망가지 마. 도망갈 생각 하지 말고…… 거기 있어. 가끔씩 내가 기대도 놀라지 말고."

 

태경은 해리의 그 말이 자꾸만 귓가에 맴돌았다. 너무도 지친 표정으로 옅게 웃으며 툭 뱉어낸 그 말이 머릿속과 가슴속을 몽땅 헤집어 놓았다.

 

 

그때, 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여전히 어색하기만 한 그의 이름 석 자. 지난 일주일 동안 그의 이름을 수없이 써보고 말해보았지만 아직도 괜히 쑥스럽고 머쓱해서 입술이 바짝 말랐다.
“다 왔어?”
[내려 와.]
하루에 세 번, 그는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늘 비슷한 시간에 전화를 걸었다. 그는 ‘뭐해?’, ‘밥 먹었어?’ 같은 지극히 일상적인 것을 물었고 그때마다 해리는 살을 붙이지 않고 단답형으로 답을 해주었다. 그랬기에 통화는 길게 이어지지 못했고 1분을 넘기는 일이 드물었다.
하지만 해리는 언제부턴가 그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말았다. 화장실을 갈 때에도 휴대폰을 들고 나갔고, 회의 중에도, 술자리에서도, 심지어 샤워를 할 때도 휴대폰을 지니고 다녔다. 한 번쯤 그의 전화 못 받는다고 큰일 나는 것도 아닌데 유난을 떨고 있었다.
여자는 뭐니 뭐니 해도 튕기는 맛인데. 이렇게 밀고 당기기에 약해서야, 결혼하기도 전부터 끌려 다니게 생겼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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