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속의 자본주의자 - 자본주의의 변두리에서 발견한 단순하고 완전한 삶
박혜윤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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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것은 판타지를 하나씩 깨트려 가는 일이 아닐까 때때로 생각한다. 설렘으로 가득 차 시작한 일들은 막상 겪어보면 또 다른 고난이자 극복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장밋빛 기대감이 하나씩 허물어지며 현실로 녹아드는 것, 삶의 많은 부분은 그랬었고, 그럴테다.

전원생활의 로망은 어떨까

실개천이 흐르고 도처에 블랙베리와 야생초가 자라나는 자연의 품에서, 통밀을 갈아 빵을 굽고 막걸리 누룩으로 된장과 간장을 만들어 먹는 그런 생활이라면 스트레스 없이 행복할까?

이 책에는 서울대 졸업, 동아일보 기자를 거쳐 미국 워싱턴 대학교에서 교육심리학 박사학위를 받은 (엄청난 스펙의) 저자가 가족과 함께 미국 시애틀 근교의 시골 이동식 조립식 주택에서 7년째 별일 없이 살아가는 이야기가 담겨있다.

자급자족하는 전원생활에 대한 도시인들의 로망을 자극하는 이제는 꽤 흔해진 이야기이거나, 경제 활동을 하지 않고도 지속 가능한 삶에 대한 이상적인 예찬이 가득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판타지를 깨는 데에 더 가까웠다.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차별화되는 키워드는 ‘자본주의’

자본주의가 가져온 엄청난 생산력의 혜택을 받아 결코 개인의 노동만으로는 얻지 못할 양과 질의 생산품들을 다양하고 저렴하게 누리는 세상에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아무리 도시와 동떨어진 곳에서 조금 덜 소유하고 산다 한들 자본주의적 삶과 맞닿아 있지 않을 수 없음을 인정하며, 돈으로 행복을 산다는 전제에도 철저하게 동의하는 자본주의자적 관점으로 써 내려간 매우 현실적인 글이기도 하다.

작물을 망가트리고 먹어 치우는 야생짐승에 대한 격렬한 증오심을 품고 담장을 둘러치고 퇴치약을 뿌려대는 농사가, 도시의 사무실에서 모니터를 바라보며 월급을 버는 일보다 정신적으로 더 풍요롭고 고상한 생산방식이라고 말할수 있을까?

비료를 쓰지 않는 친환경 농사를 직접 짓느라 뙤약볕에서 고된 노동에 시달리느라 허리가 굽고 관절이 닳는 생활이 마냥 건강할 수 있을까, 그렇게 지쳐 돌아오면 가족들과 다정한 시간을 보낼 마음의 여유는 있을까?

무언가를 줄이고 비워서 얻은 공간에 (그것이 물질이든 정신이든) 다른 것을 채워 넣을 수 있는 여유를 만든다는 것이 핵심이기에

미국 시골 변두리에서의 단순한 삶이라고 해서 결코 ‘내려놓음’이라고만 단정 지을 순 없는 이유다.

소신껏 꾸려 나가는 삶, 중요한 것에 집중하며 살아가는 시간으로 오히려 더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삶에 대해 치열한 고민을 해본 사람, 남들과 다르게 살아가는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낯설고도 도전적인 신념들,

아마 이런 삶을 실행하기 이전부터도 충분히 가지고 있었음이 분명한 저자의 단단한 내적 가치관과 인생철학이 잘 어우러져서 깊고 풍성한 사유로 배어 나오는 글이라 읽는 내내 감동의 연속이었다.

올 여름 이 책을 만난 것은 정말이지 큰 행운같다. 재미있기까지하니 그 누구에게 추천해도 자신 있을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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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죽음
에밀 졸라 지음, 이선주 옮김 / 정은문고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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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졸라의 단편들을 결혼과 죽음이라는 주제로 묶어낸 소설집 <결혼, 죽음>은 결혼에 관한 네 편의 단편, 죽음을 다룬 다섯 편의 단편, 그리고 소설<테레즈 라캥>의 초기 모티브가 되는 <어떤 사랑>까지 총 열 편의 단편이 실려있는 소설집이다.

인간의 삶은 유전적으로 타고나는 기질과 주변 환경에 의해 결정된다는 결정론자이기도 한 에밀 졸라의 자연주의는 있는 그대로를 묘사하는 사실주의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해부하고 분석하는 과학적 기법을 통해 삶의 본질에 더 가까이 접근하고자 하는 문예사조다.

인간을 결정하고 완성하는 것은 환경이다. 한 인간을 둘러싼 환경을 묘사하지 않고는 그 인물에 대해 결코 그 무엇도 말할 수 없다. 그 중 ‘계급’이야말로 한 인간이 처한 환경의 결정체일테다. 경제적, 사회적 계급은 한 사람의 세계관 그 자체가 되고 그 울타리 안에서 사고하고 행동하게 한다.

작가는 작품마다 계급을 전면에 드러내며 적나라하게 써내려간다.
귀족, 부르주아, 상인, 농부, 서민(빈민)의 결혼, 그리고 죽음. 각 계층을 대표하는 인물들의 결혼과 죽음에는 대체로 자신들의 세계 안에서 답습되어 온 전형적인 패턴이 드러난다.

열 편의 소설은 짧고 재미있어서 순식간에 읽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가볍지 않은 무게감을 지닌다.
드라마적 요소 없이 현실 그대로, 르포 기사처럼 묘사하는 기법 덕분에 판타지가 없다.

결혼을 성스러운 사랑의 결합이 아닌
지참금 액수를 제시하며 상대에게 낙찰받는 일종의 거래로 삼고,
죽음은 삶의 아름다운 마무리이자 여운을 남기는 끝이 아닌
마지막 남은 본성마저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순간이 되고, 남은 이들은 각자의 바쁜 생을 그저 계속 살아갈 뿐이다.

가난한 집안이지만 늘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며 웃음꽃이 피어나는 가족?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그동안의 잘못을 뉘우치며 새로이 태어나는 사람들?
그런 건 없다.
가난하기에 시궁창 속에서 돈 이야기로 늘 격렬히 싸우고 죽음 앞에서도 분노를 뿜어내며 끝까지 서로를 물어뜯는다.
돈이 많은 귀족은 귀족대로, 찢어지게 가난한 빈민은 또 그들대로, 각자가 처한 환경 안에서 다양한 이유로 불행하다. 톨스토이의 말처럼 이 불행한 가정들은 각기 다른 이유로 공통으로 불행하다. 마치 인간의 삶은 기본적으로 불행이 당연하다는 것처럼

경제적 공동체로서의 상호 신뢰와 수입목표 달성만이 서로의 존재 가치인 부부,
남편의 죽음 앞에 몰래 얼굴에 화색이 도는 우아한 아내,
자식들이 내 돈을 탐낼까 봐 죽기 직전에도 꼭 열쇠를 붙들어 매고 있는 노인,
이런 우리 내면의 본성을 솔직하고 대담하게 묘사해내지만 지나치게 비관적이고 과장된 연민은 들어있지 않다. 사건을 두고 유려한 문장을 써가며 오르락내리락 하는 심리변화를 자세히 묘사하는 데 치중하는 현대소설과는 달리 졸라의 필치는 단순하지만 냉정하고 날카롭다.

그저 그들 앞에 드리운 명암을 들여다보고 있자면, 짙은 농도로 꽉 채워진 삶의 무게감이 묵직한 공포가 되어 다가온다.

소설을 통해 19세기의 계급별 예식 문화와 장례 문화에 대해서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상류층 결혼에 동반되었던 지참금 제도와 카톨릭 국가인 프랑스에서의 사제의 역할 등이 잘 나타나 있어서 매우 흥미로웠다. 귀족과 부르주아의 이면, 평민과 빈민의 실제 생활을 작품에 고스란히 옮겨 놓았기에 당시의 계급별 생활상을 이해하는데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에밀 졸라의 다른 장편소설을 아직 읽기 전이라면 이 단편 작품집을 통해 작품의 분위기를 먼저 느껴보면 좋을 듯 하다. 특히 3장의 <어떤 사랑>의 충격적인 서사가 흥미로웠다면 이 모티브를 발전시킨 작품인 <테레즈 라캥>으로 졸라에 입문하기를 권한다.

아무튼, 막장드라마는 언제나 재미있는 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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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연의 로스트 타임 - 지연된 정의, 사라진 시간을 되찾기 위한 36개의 스포트라이트
이규연 지음 / 김영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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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려면 어지간히 마음의 준비가 필요할 듯하다.
읽기 힘들다. 이미 잘 알려진 사건들을 소재로 다루기에 그 자체만으로도 혈압이 오르는데 심지어 ‘로스트 타임’ 을 다룬다.

스포츠에도 존재하는 ‘Lost time’, 정상 플레이 외의 어떤 이유로 지체된 시간을 말한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로스트 타임’은 한발 늦게 문제를 파악하고, 뒤늦게 억울함과 분노를 마주하느라 날려버린 시간을 말한다. 말하자면 지연된 정의에 관한 이야기다.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를 취재, 진행해 온 저자가 30년간 탐사 저널리스트로서 활동하면서 다룬 사건들 중 인상 깊었던 36개의 사건 탐사 기록을 담아낸 책이다. 오랫동안 한국 사회의 참혹하고 어두운 이면을 파헤쳐 온 탐사보도 전문가로서 언론의 사회적 역할을 고민하며 써내려간 취재기록이자 치열한 자기반성을 담고 있다.

아무튼,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나영이에게는 등을 돌리고 조두순에게 손을 내민 대한민국의 황당한 사법제도와
법안 처리가 늦어지는 바람에 1개월 차이로 ‘태완이 사건은 빠진 태완이 법’이 발효되는 어처구니 없는 비극을 보았고
세월호나 국정농단 같이 이게 나라냐 싶던 허탈함과 다시 마주하게 되고,
너무나 긴 로스트 타임을 지나 겨우 드러난 가습기 살균제 피해 현황의 참담함에 눈물이 나며,
언론 불신의 시작점이 된 5.18 민주화 운동까지 거슬러 짚어 보게 한다.
모든 사건이 화를 돋우는 차원을 넘어 절망과 공포를 느끼게 한다.

그러니 읽는 동안 진도가 유독 잘 나가지 않았던 것도 가독성의 문제는 아니었다.
이미 알고 있던 대략적인 사건의 개요를 넘어선 심층 자료를 찾아 읽어보고
사건의 마무리가 정확히 어떻게 되었는지 형량이나 판례를 찾아보느라 매번 책을 읽다 말고 뒤집어 놓곤 핸드폰을 들어 오래전 기사들을 검색하고 나무위키를 들락거리느라 바빴기 때문이었다. 이영학 사건에서는 유튜브를 통해 처음 방송에 나왔던 어금니 아빠 다큐멘터리까지 시청하느라 더 오래 걸렸다. ⠀

그보다 실은
초반에 나온 태완이 사건 (대구 어린이 황산테러 사건)이 내겐 단연 가장 가슴 아프고 미칠듯한 분노가 치미는 사건이라 피해자 아이의 이름을 다시 본 것만으로도 마음이 몹시 힘들어 책장을 넘길 용기가 나질 않았기에 한동안 덮어 두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가 다시 들여다보아야 할, 또는 그간 몰랐지만 알아야 할 것들에 대해 들려주고 있기에 영영 지나칠 뻔했던 사건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재조명되는데 크게 기여하는 탐사보도의 가치를 재발견할 수 있는 책이다.

한 사건을 법적 수사에 맞먹을 정도로 집중 취재하고, 실태와 원인, 대안을 심도 있게 고민하는 영역인 만큼 세상에 대한 관심과 사명감으로 무장한 언론의 역할은 더욱 중요하다.

강력 범죄를 취재하는 것보다 정치적 현안과 현실의 여러 권력관계가 맞닿은 문제들이 더 파헤치기 어려웠으리라는 것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 난관과 외압을 이겨내고 얻어낸 성과가 어찌 위대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언론인으로서 이보다 더 의미있는 발자취를 남길 수 있을까? 진실에 외면당한 사람들에게, 무관심으로 고통받는 피해자들에게, 조롱당하고 탄압받는 유가족들에게 그들의 존재는 그 무엇보다 큰 힘이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이 책을 읽는 것도 누군가에게는 불편하고 혹독한 고통이 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모든 억울함 뒤에는 사소한 방관이 있었다.
사회가 복잡하고 조밀해질수록 방관의 다리는 더 많이, 더 높이 만들어진다고 했다.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악행 그 자체보다 악을 보고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세상은 파괴된다'고

우리 모두가 정당한 분노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할 테다.
정의가 잠들어 있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함께 고민해야 할 때다.
사명감을 가지고 진실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는 언론인들의 노고에 새삼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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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하고 놀까?
김슬기 지음 / 시공주니어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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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행복한 고민!
“뭐 하고 놀까?”
길 가다 발에 채이는 돌멩이도, 여기저기 떨어져 있는 나뭇가지도 아이에게는 세상 재미난 놀잇감이 된다.
놀기 위해 세상에 온 존재들, 그들의 놀이 세계는 어른이 들여다보지도 못할 정도로 방대하고 깊다. 그리고 마냥 자유롭다.

빨간 실을 발견한 아기 생쥐
이걸로 뭘 하고 놀까?
어린 독자들은 함께 궁리한다.
줄넘기하면 재밌겠다. 그런데 줄이 짧네.
혼자 줄넘기조차 하기 어렵다.
하나의 짧은 줄로는 딱히 할 수 있는 놀이가 없다.

하나둘 다른 동물 친구들이 등장하며 가지고 있던 제각기 다른 줄을 내민다.
오리의 스카프, 원숭이의 요요 줄, 양의 팽이 줄, 곰의 낚싯줄..
묶어볼까?
줄을 묶고 또 묶어서 점점 기다랗게 이어간다.
얼마나 길어질까?
이걸로 무슨 놀이를 해볼까?
다음에는 어떤 친구가 무슨 줄을 가지고 올까?
줄이 길어질 때마다 친구들의 기대는 더 커진다.

시공주니어의 네버랜드 우리 걸작 그림책 62번째 시리즈 <뭐 하고 놀까?> 는
아기 생쥐가 발견한 빨간 줄 하나에서 시작되는 마법 같은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다.  
'2019 볼로냐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로 선정된 김슬기 작가는 많은 시간과 공을 들여야 하는 리놀륨 판화 기법을 사용해 부드러운 선과 생생한 색감을 보여주고 있다.

줄은 서로를 이어주는 상징이 된다.
순수한 호기심이 가득 담긴 눈빛도 친구들과의 놀이를 기대하는 설렘도
줄을 타고 한껏 전해진다.

서로의 끈을 묶어 길게 연결하면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더욱 즐거운 놀이를 할 수 있었듯
'이음'이라는 가치를 아이들에게 전하고 있다.
같이 고민하고 함께 만들어가는, 너와 내가 이어지는 유대감.
연대의식과 공동체의 힘을 줄넘기 놀이에서 배운다.

기다란 줄을 돌리며 하나 둘 야호! 외치며 모두 신나게 뛰어오른다. 
화면 가득 동물 친구들이 북적대는 장면은 절로 기분이 들떠서 그림 속으로 들어가 함성을 지르며 함께 뛰어오르고 싶게 만든다. 놀자! 놀자! 같이 놀자! 반복되는 언어의 리듬감은 아이에게 또 하나의 즐거운 말놀이가 되어준다.

신나게 놀고 있는 친구들 앞에 등장하는 또 다른 낯선 줄 하나.
초록색 줄을 당겨보니 커다란 수박이 넝쿨째 굴러온다. 
한바탕 뛰놀고 난 후 시원하게 목을 축여주는 수박 한 덩이에 모두 파묻혀 파티를 벌인다.
힘껏 놀고, 배불리 먹고, 또다시 놀고
매일이 추억이 되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일상을 비춰준다.
<뭐 하고 놀까?>는 ‘함께’의 가치를 이토록 즐겁게 전해주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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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한 어머니의 날 1 타우누스 시리즈 9
넬레 노이하우스 지음, 김진아 옮김 / 북로드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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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는 1981년 5월의 첫 살인으로 시작한다. 그날 밤 더는 희생자가 아닌 사냥꾼으로 다시 태어난 소년이 있었다.

2017년 4월, 독일의 맘몰스하인 지역에서 테오도르 라이펜라트라는 84세 노인이 자택에서 죽은 지 한참 지난 시신으로 발견된다. 얼핏 보기에 자연사인 것 같은 고령 노인의 단순 독고사인가 싶었는데 그를 둘러싼 여러 정황이 심상치 않다. 노인이 늘 데리고 자던 개와 은색 벤츠의 행방은 묘연했다.
수사를 맡은 피아 산더 형사와 파트너 올리버 폰 보덴슈타인은 저택을 조사하던 중, 뒷마당 견사에 갇혀 굶어 죽기 직전의 앙상한 개를 발견한다. 굶주린 개가 땅을 파헤쳐 놓은 곳에는 뼈가 쌓여 있었다. 그것은 사람의 뼈였다. 수십 년간 이어진 연쇄 살인이 실체를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노인의 집은 과거 수녀원을 개조한 곳으로 1차 대전 이후 수녀들이 장애아들을 데려다 키우며 일종의 보육시설로 사용하던 곳이었다. 이후 실제로 부부는 보육원 출신의 여러 아이를 양자로 입양하여 돌보며 지냈다고 한다. 아내 리타가 20여 년 전 실종된 이후 줄곧 혼자 살아온 테오, 정황상 살인을 저지른 후 자신의 집 뒷마당에 파묻은 것으로 보이지만 그가 진짜 범인인지, 아니면 또 다른 피해자일 뿐인지 알 수 없었다.
라이펜라트 가 출신의 양자들을 하나하나 만나며 취조하고, 증언을 하나씩 고르게 엮어가는 수사과정에서 서서히 드러나는 진실, 그들 모두는 용의자이기도 하고, 숨겨져 있던 중요한 사실들을 알려주는 열쇠이기도 하다.
수 십년에 걸쳐 살해된 많은 희생자는 모두 여자였으며, 5월의 어머니날 전후로 살해되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과연 진짜 범인은 누구이며 왜 죽였을까?

이야기의 또 다른 축은 스위스 취리히에서 출생의 비밀을 찾고 있는 피오나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떨어져 지내던 아버지를 만난 피오나는 자신이 그들의 친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녀를 낳아준 어머니를 찾기 위한 여정을 시작한다. 피오나의 엄마 찾기는 이 사건과는 어떻게 엮이는지 추리하며 따라가보는 것도 하나의 관전 포인트가 된다.

장르소설을 워낙 좋아하는 지라 허술한 전개나 뻔한 반전, 특정 인물의 수상한 낌새는 금세 알아채는 편인데, 마치 멀리서 다가오는 커다란 윤곽의 형체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점점 또렷하게 드러나는 방식으로 작은 디테일을 하나씩 끄집어 올리는 전개는 굉장히 탄탄하다.
라이펜라트 가와 연관된 사람들이 한 명씩 계속 교차하며 용의선상의 수면 위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과정은 계속 도돌이표를 그리며 헷갈리게 한다. 의심을 보내기도 하고 연민을 느끼기도 한다.

절정의 추격전이 벌어지는 장면에서의 요동치는 긴장감을 눈이 읽는 속도가 못 따라가서 헉헉대며 뛰어가느라 앉아서 책만 읽고 있었는데 100미터 달리기라도 마친 것처럼 숨이 차는 기분이었다. 역시 제일 좋아하는 장르라 오랜만에 홀린 듯 읽었다. 넬레 노이하우스는 가히 유럽 미스터리미 여왕이라 불릴만 하다.

악은 특별하지 않고 항상 인간적이다. 우리와 같은 침대에서 자며 한 식탁에 앉는다. 는 W.H.오든의 말처럼, 평범 속에 늘 도사리는 악은 역설적으로 바른 인간으로서의 사명감을 더욱 강하게 만든다.
OCN 오리지널 시리즈의 팬이라면, 특히 ‘터널(2017)’, ‘작은 신의 아이들(2018)’을 재미있게 보았다면 드라마의 중요한 모티브와 트라우마가 연상되는 이 소설에 더더욱 흠뻑 빠지지 않을 수 없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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