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연의 로스트 타임 - 지연된 정의, 사라진 시간을 되찾기 위한 36개의 스포트라이트
이규연 지음 / 김영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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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려면 어지간히 마음의 준비가 필요할 듯하다.
읽기 힘들다. 이미 잘 알려진 사건들을 소재로 다루기에 그 자체만으로도 혈압이 오르는데 심지어 ‘로스트 타임’ 을 다룬다.

스포츠에도 존재하는 ‘Lost time’, 정상 플레이 외의 어떤 이유로 지체된 시간을 말한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로스트 타임’은 한발 늦게 문제를 파악하고, 뒤늦게 억울함과 분노를 마주하느라 날려버린 시간을 말한다. 말하자면 지연된 정의에 관한 이야기다.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를 취재, 진행해 온 저자가 30년간 탐사 저널리스트로서 활동하면서 다룬 사건들 중 인상 깊었던 36개의 사건 탐사 기록을 담아낸 책이다. 오랫동안 한국 사회의 참혹하고 어두운 이면을 파헤쳐 온 탐사보도 전문가로서 언론의 사회적 역할을 고민하며 써내려간 취재기록이자 치열한 자기반성을 담고 있다.

아무튼,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나영이에게는 등을 돌리고 조두순에게 손을 내민 대한민국의 황당한 사법제도와
법안 처리가 늦어지는 바람에 1개월 차이로 ‘태완이 사건은 빠진 태완이 법’이 발효되는 어처구니 없는 비극을 보았고
세월호나 국정농단 같이 이게 나라냐 싶던 허탈함과 다시 마주하게 되고,
너무나 긴 로스트 타임을 지나 겨우 드러난 가습기 살균제 피해 현황의 참담함에 눈물이 나며,
언론 불신의 시작점이 된 5.18 민주화 운동까지 거슬러 짚어 보게 한다.
모든 사건이 화를 돋우는 차원을 넘어 절망과 공포를 느끼게 한다.

그러니 읽는 동안 진도가 유독 잘 나가지 않았던 것도 가독성의 문제는 아니었다.
이미 알고 있던 대략적인 사건의 개요를 넘어선 심층 자료를 찾아 읽어보고
사건의 마무리가 정확히 어떻게 되었는지 형량이나 판례를 찾아보느라 매번 책을 읽다 말고 뒤집어 놓곤 핸드폰을 들어 오래전 기사들을 검색하고 나무위키를 들락거리느라 바빴기 때문이었다. 이영학 사건에서는 유튜브를 통해 처음 방송에 나왔던 어금니 아빠 다큐멘터리까지 시청하느라 더 오래 걸렸다. ⠀

그보다 실은
초반에 나온 태완이 사건 (대구 어린이 황산테러 사건)이 내겐 단연 가장 가슴 아프고 미칠듯한 분노가 치미는 사건이라 피해자 아이의 이름을 다시 본 것만으로도 마음이 몹시 힘들어 책장을 넘길 용기가 나질 않았기에 한동안 덮어 두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가 다시 들여다보아야 할, 또는 그간 몰랐지만 알아야 할 것들에 대해 들려주고 있기에 영영 지나칠 뻔했던 사건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재조명되는데 크게 기여하는 탐사보도의 가치를 재발견할 수 있는 책이다.

한 사건을 법적 수사에 맞먹을 정도로 집중 취재하고, 실태와 원인, 대안을 심도 있게 고민하는 영역인 만큼 세상에 대한 관심과 사명감으로 무장한 언론의 역할은 더욱 중요하다.

강력 범죄를 취재하는 것보다 정치적 현안과 현실의 여러 권력관계가 맞닿은 문제들이 더 파헤치기 어려웠으리라는 것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 난관과 외압을 이겨내고 얻어낸 성과가 어찌 위대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언론인으로서 이보다 더 의미있는 발자취를 남길 수 있을까? 진실에 외면당한 사람들에게, 무관심으로 고통받는 피해자들에게, 조롱당하고 탄압받는 유가족들에게 그들의 존재는 그 무엇보다 큰 힘이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이 책을 읽는 것도 누군가에게는 불편하고 혹독한 고통이 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모든 억울함 뒤에는 사소한 방관이 있었다.
사회가 복잡하고 조밀해질수록 방관의 다리는 더 많이, 더 높이 만들어진다고 했다.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악행 그 자체보다 악을 보고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세상은 파괴된다'고

우리 모두가 정당한 분노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할 테다.
정의가 잠들어 있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함께 고민해야 할 때다.
사명감을 가지고 진실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는 언론인들의 노고에 새삼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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