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결혼, 죽음
에밀 졸라 지음, 이선주 옮김 / 정은문고 / 2019년 11월
평점 :
품절
에밀 졸라의 단편들을 결혼과 죽음이라는 주제로 묶어낸 소설집 <결혼, 죽음>은 결혼에 관한 네 편의 단편, 죽음을 다룬 다섯 편의 단편, 그리고 소설<테레즈 라캥>의 초기 모티브가 되는 <어떤 사랑>까지 총 열 편의 단편이 실려있는 소설집이다.
인간의 삶은 유전적으로 타고나는 기질과 주변 환경에 의해 결정된다는 결정론자이기도 한 에밀 졸라의 자연주의는 있는 그대로를 묘사하는 사실주의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해부하고 분석하는 과학적 기법을 통해 삶의 본질에 더 가까이 접근하고자 하는 문예사조다.
⠀
인간을 결정하고 완성하는 것은 환경이다. 한 인간을 둘러싼 환경을 묘사하지 않고는 그 인물에 대해 결코 그 무엇도 말할 수 없다. 그 중 ‘계급’이야말로 한 인간이 처한 환경의 결정체일테다. 경제적, 사회적 계급은 한 사람의 세계관 그 자체가 되고 그 울타리 안에서 사고하고 행동하게 한다.
⠀
작가는 작품마다 계급을 전면에 드러내며 적나라하게 써내려간다.
귀족, 부르주아, 상인, 농부, 서민(빈민)의 결혼, 그리고 죽음. 각 계층을 대표하는 인물들의 결혼과 죽음에는 대체로 자신들의 세계 안에서 답습되어 온 전형적인 패턴이 드러난다.
열 편의 소설은 짧고 재미있어서 순식간에 읽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가볍지 않은 무게감을 지닌다.
드라마적 요소 없이 현실 그대로, 르포 기사처럼 묘사하는 기법 덕분에 판타지가 없다.
⠀
결혼을 성스러운 사랑의 결합이 아닌
지참금 액수를 제시하며 상대에게 낙찰받는 일종의 거래로 삼고,
죽음은 삶의 아름다운 마무리이자 여운을 남기는 끝이 아닌
마지막 남은 본성마저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순간이 되고, 남은 이들은 각자의 바쁜 생을 그저 계속 살아갈 뿐이다.
가난한 집안이지만 늘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며 웃음꽃이 피어나는 가족?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그동안의 잘못을 뉘우치며 새로이 태어나는 사람들?
그런 건 없다.
가난하기에 시궁창 속에서 돈 이야기로 늘 격렬히 싸우고 죽음 앞에서도 분노를 뿜어내며 끝까지 서로를 물어뜯는다.
돈이 많은 귀족은 귀족대로, 찢어지게 가난한 빈민은 또 그들대로, 각자가 처한 환경 안에서 다양한 이유로 불행하다. 톨스토이의 말처럼 이 불행한 가정들은 각기 다른 이유로 공통으로 불행하다. 마치 인간의 삶은 기본적으로 불행이 당연하다는 것처럼
경제적 공동체로서의 상호 신뢰와 수입목표 달성만이 서로의 존재 가치인 부부,
남편의 죽음 앞에 몰래 얼굴에 화색이 도는 우아한 아내,
자식들이 내 돈을 탐낼까 봐 죽기 직전에도 꼭 열쇠를 붙들어 매고 있는 노인,
이런 우리 내면의 본성을 솔직하고 대담하게 묘사해내지만 지나치게 비관적이고 과장된 연민은 들어있지 않다. 사건을 두고 유려한 문장을 써가며 오르락내리락 하는 심리변화를 자세히 묘사하는 데 치중하는 현대소설과는 달리 졸라의 필치는 단순하지만 냉정하고 날카롭다.
그저 그들 앞에 드리운 명암을 들여다보고 있자면, 짙은 농도로 꽉 채워진 삶의 무게감이 묵직한 공포가 되어 다가온다.
소설을 통해 19세기의 계급별 예식 문화와 장례 문화에 대해서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상류층 결혼에 동반되었던 지참금 제도와 카톨릭 국가인 프랑스에서의 사제의 역할 등이 잘 나타나 있어서 매우 흥미로웠다. 귀족과 부르주아의 이면, 평민과 빈민의 실제 생활을 작품에 고스란히 옮겨 놓았기에 당시의 계급별 생활상을 이해하는데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에밀 졸라의 다른 장편소설을 아직 읽기 전이라면 이 단편 작품집을 통해 작품의 분위기를 먼저 느껴보면 좋을 듯 하다. 특히 3장의 <어떤 사랑>의 충격적인 서사가 흥미로웠다면 이 모티브를 발전시킨 작품인 <테레즈 라캥>으로 졸라에 입문하기를 권한다.
⠀
아무튼, 막장드라마는 언제나 재미있는 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