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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두 번째 레인
카롤리네 발 지음, 전은경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5월
평점 :


『스물두 번째 레인』을 읽었다.
큰 사건도, 특별한 반전도 없는 소설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계속 읽히고, 문장이 오래 남았다.
수영장이 피난처였던 틸다,
스물두 바퀴의 레인은
그녀가 무너지지 않기 위해 만들어놓은 '질서'였고 '버팀목'이었다.
처음엔 그저 성장소설일 거라고 생각했다.
근데 책을 읽다보니 ‘지금도 살아내고 있는 누군가’의 단단한 기록처럼 느껴졌다.
누구나 한번쯤은 겪었을, 혹은 지금 겪고 있을 ‘버티는 시간’과 너무 닮아 있었다.
그래서인지 주인공의 하루하루가 쌓여 만들어낸 무게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스물두 번째 레인』은 독일 작가 카롤리네 발의 데뷔작이다.
데뷔작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밀도 있는 문장과 감정의 흐름이 섬세하다.
이 책은 슈피겔 베스트셀러 1위, 13개국 수출, 80만 부 판매, 울라-한 작가상 등 다수의 문학상을 받았다고 한다.
데뷔작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완성도 높은 첫 소설이다.
이 책은 '극적인 사건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잡고 끌고 가는 감정의 깊이'에 있었다.
감정에 휩쓸리는 대신 논리와 구조로 세계를 지탱하는 인물들을 통해,
'감정’ 그 자체가 아닌, 감정을 조용히 감내하는 사람의 시선을 따라가게 된다.
그리고 그게 오히려 더 아프고, 더 현실적이었다.
『스물두 번째 레인』은 틸다라는 한 소녀의 이야기다.
수영장은 그녀에게 도망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고,
스물두 바퀴를 돌고 나오는 매일의 루틴은 삶을 붙잡기 위한 그녀만의 방식이었다.
이 책은 그런 틸다의 반복되는 하루를 따라간다.
술에 의존하는 엄마와 어린 여동생, 이다.
어른이 되기엔 너무 이르고, 여전히 책임이 무거운 삶.
주인공 틸다는 ‘돌보는 사람’이다.
그들을 챙기는 건 선택이 아니라 이미 삶에 내장된 역할이다.
그런 틸다에게 '자기 자신을 위한 선택'은 굉장히 낯설고, 심지어 죄책감을 동반하는 감정이다.
이 책은 그 죄책감과 충돌하는 순간들을 차곡차곡 쌓아나간다.
가족, 책임, 돌봄, 역할, 꿈.
이 책이 품고 있는 키워드는 꽤 많지만
틸다를 위한 키워드는 꿈 한가지였다.
그리고 그것을 깨닫게 되는 장면이 있다. 바로 틸다가 자문하는 장면이었다.
“이제는 나를 위해 살아도 될까?”
이 문장은 너무 작고 고요하게 등장해서 오히려 더 깊이 울림을 주는 말이었다.
그 누구도 대신 대답해줄 수 없고, 틸다조차 바로 대답하지 못하는 그런 질문.
이 질문은 이 책에서 가장 큰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었다.
이 책이 특별한 건 누구나 꿈을 말하지만,
꿈을 말하는 데조차 용기가 필요한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나랑 가장 많이 닮아있기도 했고
더욱 책에 몰입하게 되는 부분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삶이 어떻게, 끝까지 무너지지 않고 나아가는지를 보여준다.
현실적으로 보면 틸다는 당연히 떠나는 게 맞다.
그런데 이 책은 그런 선택을 쉽게 말하지도, 결정하지도 않았다.
틸다는 계산하고, 미루고, 망설이고, 다시 돌아보고
그 과정이 너무 현실적이라서 공감이 많이 되었다.
『스물두 번째 레인』은 거창한 사건 없이 삶의 ‘내면’을 고요하게 파고드는 책이었다.
화려한 문장도, 극적인 반전도 없지만 그 안에는 정말 많은 것들이 있었다.
가족에 대한 책임, 꿈을 향한 갈망, 누군가를 남겨두고 떠나야 할 때의 죄책감,
사랑이 반드시 돌봄과 희생을 전제로 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 등
이 책이 던지는 물음은 스스로의 인생을 허락하는 일에 가깝다.
특히나 책임과 헌신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삶을 뒤로 미뤄둔 사람들에게 더 깊이 와닿을 것 같다.
틸다처럼 누구나 자기만의 ‘스물두 번째 레인’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레인을 몇 바퀴 더 돌고 나서야 비로소 바깥으로 나갈 준비를 한다.
지금 무언가를 책임지고 있거나 자기 자신에게 자꾸 후순위를 주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은 분명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이다.
지금도 그 시간 속에서 버티고 있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어주는 이야기일 것 같다.
틸다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기에 좋은 책이라서 주변에 꼭 한번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