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전 퓨즈만이 희망이다_한겨레출판

확실하고 명쾌하진 않지만 더 나은 세상을 위해 꼭 필요한 대답들.

 

에세이를 굉장히 오랜만에 읽는다. 오랜만에 만나는 에세이치고는 무거운 느낌이 없지 않았지만, 그 무거운 마음이 오래도록 외면하고자 했지만 결국 그러지 못했던 이야기들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간이란 본래 불완전한 존재이지만, 더 불완전한 부분을 가진 이들의 이야기를 짚고 넘어가는 책이다. 많은 시사와 그에 대한 논리 때문이기도 했지만, 가장 먼저 끊어지는 퓨즈들을 그려내기 때문에 머릿속과 마음이 동시에 북적거렸다.

퓨즈란 과전류가 흐르면 제일 먼저 끊어져 전기 장치를 보호하고 합선으로 인한 화재를 방지하는 장치(332)’. 이 책에 실린 글 <퓨즈만이 희망이다>에서는 여러 과학자와 철학자 등을 말을 빌려 퓨즈만이 희망인 이유에 대해 설명한다. 나는 저자의 해결책보다는 자신에 대한 반성이 더 컸는데, 코로나가 장기화됨에 따라 내가 너무 죽음에 무뎌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초기와는 달리 어느 순간 누군가의 죽음과 고통이 매일 숫자로 확인하는 행위가 되어버리고, 내가 아니라 다행이라는 안도의 한숨으로 발현되었다. 나도 모르게 나는 퓨즈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퓨즈가 끊어지는 것을 알고도 외면했던 걸까, 퓨즈를 품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할 수 있는 노력은 무엇일까, 고민에서 고민으로 이어졌다.

 

많은 생각을 불러온 다른 글은 <사랑은 없다>였다. 나는 ‘1장 성찰: 우리가 놓친 것들이 인상깊었는데, 그 중 없다로 이어지는 에세이 시리즈들이 다 좋았다. 물론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부분에서는 불편한 마음도 있었지만,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흥미롭기도 했다. 어쨌든 <사랑은 없다>에서 왜 사랑이 없는지 통계를 통해 알려주며, “나쁜 것은 늘 재빨리 국경을 넘는다.”라고 이야기할 때 소름이 돋았다. 내가 너무 쉽게 사랑이라 믿었던 것들이 실은 왜 사랑이 아닌지, 사랑이 있다면 이럴 리 없다고 이야기할 때는 울컥했다.

 

의대 교수인 저자가 건강과 관련된 정책과 이슈에 대해 이야기하며, ‘건강을 대체할 수 있는 개념까지 폭넓게 이야기하는 이 에세이집은 참으로 시의적절하다. 코로나 시대에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현 시점에서 출판한 것도 적절하고,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이전에도 있었지만 이제야 드러나는 약자들의 아픔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시기인 것도 적절했다. 일시정지된 세상에서 무엇이 정말로 취약하고 어디가 중심이었는지 깨우치게 해 준 책이었다.

 

책속의 한줄

(28) 늙는 것은 젊음을 잃는 것이 아니라 품는 것이다. 인형 안에 인형이 있고, 그 안에 또 작은 인형이 자리하고 있는 마트료시카라는 러시아 목각 인형처럼 말이다. 다시 말해, 죽음이 삶의 결손이 아니라 축적인 것처럼 노년은 청춘의 결손이 아니라 그 모든 지나간 삶을 품는 것이다.

 

(336) 위기의 시기에 퓨즈처럼 가장 먼저 죽는 이들, 한 번 쓰고 버려지는 이들은 주류 사회에서 가장 약한 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아프면 제일 먼저 붓는 편도이고, “가장 먼저, 가장 늦게까지 아픈 시인(詩人)”이며, 마침내 인류 생존의 해법을 간직한 이들이다. 그래서인가? 한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다. “아픈 곳이 중심이다.”. 퓨즈만이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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