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 문지 스펙트럼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김현성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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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문지 스펙트럼 시리즈 중 하나로, <모자>에는 10권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고전을 빛의 파장과 같이 펼쳐주는 역할에 있어서 문지 스펙트럼이라는 이름을 잘 붙인 것 같다. 또한, 크고 깊은 세계를 얇고 가벼운 책의 물성으로 만날 수 있어 더 자주 보고 싶고 쉽게 읽혔다.

내지와 표지 글자의 색을 맞춘 디테일도 좋았고, 달랑 코트만 둥둥 떠 있는 모습의 그림도 <모자>라는 책과 잘 어울렸다.

 

베른하르트의 글이 잘 안 읽히면 정상이라는데, 나는 잘 읽혔다. 현재 내 정신 상태가 불안정하다는 것을 책을 읽으며 많이 깨달았던 것 같다. 책을 적절한 시기에 잘 만난 것 같다. 행복하기만 하고 마음 편하기만 했다면, 이 책이 공감은커녕 이해조차 되지 않았을 테니까.

 

<모자>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글은 모자인데, 대략적인 줄거리를 소개해보겠다. 어느 날 모자를 주운 는 푸주한들을 찾아다닌다. 내가 사는 마을부터 이웃 마을까지 돌아다니며, 푸주한들뿐만 아니라 농부, 나무꾼 등까지 찾아다닌다. 그들은 모두 다 똑같은 모자를 쓰고 있다. ‘는 주인이 없는 모자를 들고 다닌다. 결국 는 모자의 주인을 찾지 못하는데, 그것에 죄책감을 느껴 모자 도둑이라는 환청을 들으며 집으로 돌아온다.

처음에는 모자가 신분이나 직업을 결정할 수 있는 등의 상징적 요소로 쓰인다고 생각했다. 다 읽고 난 후에 모자가 자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모두 정신착란을 앓고 있는데, ‘모자도 마찬가지다. 정신병이 있는 , 산림학자로서 공부도 많이 한 가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자신의 병에 대해 의사들에게 질문만 하고 다니던 , 타인의 모자들을 경험한 후 집으로 돌아와 모자를 쓰고 글을 쓴다. 그리고는 나를 제외한 사람들도 이러한 모자를 쓰고 있다고 생각하며 글을 마무리 짓는다.

여기서 인상 깊었던 것은 다른 사람의 모자들이 대부분 다 회색이라는 점이다. ‘회색 도시’, ‘회색분자등으로 유추할 수 있는 회색의 이미지는 부정적이다. 획일화되었고 어두우며 차갑다. 어떤 이유로 인해 획일화되고 인간성이 상실된 사람들의, 자아의 형상과 그 속에서 고뇌하는 인간이 미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이야기하고 있는 글이 아닐까 생각했다.

 

조금은 혼란스러운 부분도 있었지만, 생각을 확장해주는 글들이었다. 평소 쓰지 않는 부분의 머리를 쓰면 근육과 같아 당기는 것 같은 느낌이 이 책을 읽을 때도 들었다. 편안할 때 읽어보면 어떨지 궁금해진다. 내 상태가 너무 안정적이면 읽고 싶지 않을 것 같기도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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