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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편안한 죽음 ㅣ 을유세계문학전집 111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강초롱 옮김 / 을유문화사 / 2021년 4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느 날 ‘나’에게 전화가 한 통 걸려온다. 어머니께서 욕실에서 넘어지셔서 대퇴골 경부가 부러졌습니다. 대퇴골 경부로 입원한 병원에서 암 확진을 받는다. 어머니의 고통을 주변인들이 생경히 느끼면서도 고통스럽게 생명을 연장하는 것에 대한 고민이 든다. 나는 어머니의 죽음을 편안하게 해줄 자격이 있는가? 저렇게 고통스럽게라도 살아있어야 하는 것일까? 죽음은 우리에게 어떤 것들을 앗아가는가? 한 간호사가 말한 ‘수술을 받게 하시면 안 돼요.’가 귀에 맴돈다. ‘나’는 어머니의 죽음을 목도하며 어머니가 빼앗긴 열정과 어머니를 옭아맨 수많은 규범과 금기들을, 끓어오르는 피와 불같은 정렬이 훼손되어 버린 낯선 어머니의 삶을 생각한다.
🔖나는 엄마의 팔로 불안과 고통만이 가득한 생명이 흘러들어 가는 걸 지켜보면서 다시금 스스로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 때문에 엄마의 삶을 연장해야 하는가?’ - 78쪽
오랜 기간 가부장적 사회를 수호해오는 조력자의 역할을 묵묵히 해낸 엄마와 ‘제2의 성’이라는 작품을 써낸 페미니스트의 선구자 보부아르의 관계가 좋을 리 만무했다. 페미니즘은 가끔 엄마를 밀어내기도 하니까. 그런 보부아르에게 어머니의 죽음은 화해의 계기가 되었다. 한 번도 이해해 보려 노력하지 않은 어머니의 삶을 들여다보고 그녀를 마음속 깊이 이해하는 것. 어머니의 삶을 연민하며 애정이 담긴 눈으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화해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하나의 실험체, 한 건의 케이스로만 어머니를 바라보는 의사들에 대한 혐오감을 통해 어머니라는 존재가 자신에게는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독자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가장 쇠약할 때 찾아오는 죽음이라는 거대한 고통 앞에서 어머니와 딸은 잃었던 연대와 사랑을 회복하고 ‘아주 편안한 죽음’으로 이르게 된다.
🔖나는 엄마가 품고 있던 나를 향한 사랑의 따스함을 느낄 수 있었다. 질투심으로 인해 자주 왜곡되어 왔고 서투름으로 인해 제대로 표현되지 못했던 엄마의 사랑이 지닌 따스함을. -150쪽
여성이 대변해 온 수동적이고 무능력한 표상에 대한 경멸로 자신을 스스로 그 성 정체성에서 떨어뜨려놓았던 보부아르가 어머니의 성기를 보며 일순 불쾌감을 느끼는 것은 결국 자신은 여성임을 자각하게 만들었다. 그것이 어머니와의 화해를 넘어서 어머니가 표상했던 세계와의 화해를 예견한다. 가장 가까웠던 사람과의 비극을 넘어서 사랑으로 나아가는 이해의 과정은 가정의 수호자이자 가부장의 조력자인 엄마와 엄마를 밀어내면서 자신을 지켜야 했던 여성들의 과거의 종말을 고하고 여성과 여성이 삶을 연민하며 연대하는 미래로 우리를 이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