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근대성이나 인권의 기원으로 무심코 수용해 온 서구 문명의 역사적 정체성이 과연 순수한 진실인지 아니면 특정한 정치적 목적을 위해 기획되고 재구성된 신화인지를 선명하게 파헤치는 비판적 교양서이다. 저자는 오늘날 서구 정치가들과 언론이 인권과 이성, 민주주의의 원천이자 서구 문명의 불변하는 정체성으로 칭송하는 유대 기독교 문명이라는 개념이 실상은 수천 년에 걸친 고유한 전통이 아니라 현대에 이르러 급조된 정치 문화적 구성물에 불과함을 다각도로 검증한다. 역사 속에서 기독교 유럽은 수백 년 동안 유대인을 사회 외곽으로 배척하고 지속적으로 탄압했으나, 제이차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라는 미증유의 비극을 거치며 서구 내부의 역사적 죄책감을 털어내는 한편 이슬람권과 같은 외부의 타자와 스스로를 구별 짓는 새로운 명분이 필요해지자 유대교를 자국의 문명적 뿌리로 슬그머니 통합시켰다는 것이다. 이 책은 사회와 인간의 삶을 입체적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이들에게 통찰을 제공하며, 인간 집단이 형성하는 거대한 문화적 프레임을 해체하는 강력한 지적 도구가 되어 준다. 우선 인류가 내부 집단의 결속력과 정당성을 강화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경계를 설정하고 자신들과 다른 문화 영역을 동화될 수 없는 미개한 타자로 규정하는 문화적 타자화와 자문화중심주의의 구조적 위험성을 명확히 드러낸다. 지중해 세계의 수많은 교류사에서 이슬람 문명이 기여한 학문적 성과를 은폐하고 배척하는 과정은 특정 문화가 어떻게 정치적 기획에 의해 배타적 폭력의 도구로 탈바꿈하는지 잘 보여준다. 또한 현대 사회가 직면한 난민 갈등이나 문명의 충돌이라는 이념적 프레임이 본래적이고 본질적인 차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동원된 정체성 담론에 의해 선동되고 강화된 결과임을 깨닫게 만든다. 이는 세계화 시대에 다양한 문명권이 직면한 갈등을 이분법적인 대립으로 단순화하기보다 본질적인 맥락을 파헤침으로써 차이를 존중하고 연대하는 세계 시민적 관점을 다지는 기초가 된다. 나아가 인권과 자유, 이성주의 같은 보편 윤리의 가치가 오직 서구의 신학적 전통에서만 자생했다는 서구 중심적 사상사를 비판하며, 사상과 윤리란 고정된 정체성의 산물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수많은 문명 간의 연쇄적인 상호작용과 지적 교류를 통해 만개한 공공의 유산임을 일깨워준다. 결국 소피 베시의 문맥을 따라가는 과정은 주어진 지식과 정체성 담론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 특정한 역사적 뿌리가 현재의 정치적 필요에 따라 어떻게 재구성되는지 꿰뚫어 보는 주체적이고 비판적인 안목을 완성하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