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켈러의 용서를 배우다 - 왜 해야 하며 어떻게 해야 하는가
팀 켈러 지음, 윤종석 옮김 / 두란노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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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가 주는 강렬함이, 제목이 고민 한 가운데를 지나가게 했던 것 같았다. ‘용서’, 과연 나는 할 수 있는가. 받을 수는 있는가. 가까이는 마구 지시하는 상사에게 화를 내지 않고, 그를 용서할 수 있을지, 자라고 말해도 도무지 듣지 않는 아이를 용서할 수 있을까. 조금 더 멀리는 우리나라를 강제 합병하고 괴롭혔던 이웃 나라를 용서할 수 있을까.

 

반대로 나는 용서받을 수 있을까.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들에게 쏟아냈던 말들은 화를 돋우게 하려는 목적은 아니었나. 그리고 알게 모르게 상처를 받았던 이들에게 용서를 구할 수 있을까. 가족, 친구, 이웃, 국가, 인종 간에 벌어진 일들은 용서하지 못할 것처럼 보이는 일들로 점철되기도 했다. 그 가운데에 어떤 이들은 용서했고, 용서받았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용서를 구하지 못했고, 용서 하지 못했다. 이들의 차이점에는 무엇이 존재했을까.

 

이번에 읽어본 팀 켈러의 책에서는 (내가 느끼기에는) 3분의 2분량으로 덤덤하게 우리의 상황을 관찰하고 표현한다. 그리고 참 된 용서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찾아가려고 노력한다. 오직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닌, 모두를 위한 용서를 말이다.

 

교회에서 용서라는 개념은 학대와 불의의 피해자에게 불리하게 악용될 때가 많았다. 학대한 가해자는 용서의 교리를 내세워 신속하게 책임 있는 지위로 복직하는 일이 빈번했다. 물론 그 지위는 언제든 다시 학대를 자행할 수 있는 자리였다. 반면 속히 용서하고 잊기를 거부하는 피해자에게는 복수심이 강하다는 오명이 따라붙었다. 용서의 촉구는 교회나 기독교 기관이 악을 바로잡기보다는 자기들의 대외 이미지와 평판을 보호하는 수단일 때가 많았다. 58

 

이 부분은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흔히 말하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달라야만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오히려 수치심도 모르는 것처럼 행동하듯 보였기 때문이다. 과연 그리스도께서는 이 모습을 용서라고 부르셨을까 싶다.

 

사랑만이 더 많은 사랑을 낳고 키울 수 있다. 142


내가 좋아하는 사랑만이 남는다는 문장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다고 생각했기에 마음이 가는 문장이었다. 용서를 낳는 것도 결국에는 사랑이 아닐까 싶어진다.

 

그리스도를 닮은 스데반 집사는 자신의 마지막 순간에도 죄를 돌리지 않는, 용서의 본을 따라서 잠에 들었다. 오로지 사랑만을 남긴 삶, 그것은 용서를 통해서 가능했다. 과연 지금의 나는 용서할 수 있을지. 그 모습을 점검해보고 싶다면 읽어보기를 권하여 드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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