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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에서 답을 찾다 - 모든 시작점은 '나'가 아니라 '하나님'이어야 한다 ㅣ 조정민 목사의 창세기 돋보기 1
조정민 지음 / 두란노 / 2020년 10월
평점 :
창세기를 읽을 때에는 언제나 기대하는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일독은 당연히 해봐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으로 펼치게 되는 부분입니다. 어려서부터 창세기의 특정 부분만을 열심히 읽어오던 부분 열정 신앙인이었지요. 그러다가 차츰 몸이 자라듯 성경을 대하는 자세도 자라났습니다.
성경을 단순한 책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하기까지 많은 시간과 변화가 필요했습니다. 주일학교에서 배우던 공과가 아니라 살아있고 운동력 있어서 나를 변화시키는 말씀이 되기까지 말이지요. 특별히 나를 변화시키는 것은 프로테스탄트의 자랑인 말씀의 선포 시간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그래서 그 선포된 말씀을 다시금 글로 기록한 특별히 성경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창세기를 다루는 책에서 은혜를 찾고자 합니다.
4부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은 가벼운 마음으로 펼쳐보게 됩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의 신앙과 세계관, 그리고 마음가짐을 점검해보도록 만들어줍니다. 이원론적인 선택의 의미가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그러므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일지를 생각해보도록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짙은 어둠 속에서 길을 잃지 않고 살아온 것은 빛이신 하나님의 은혜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45쪽
모든 것이 은혜임을 고백하는 것이 신앙인의 모습이며, 자신이 숨 쉬며 살아가고 있는 것조차 당연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이 역사하시지 않으면 불가능한 기적임을 날마다 기억해야 함을 떠올리게 합니다. 만약, 갑자기 중력이 사라진다면 혹은 산소의 농도가 달라진다면 혹은 지구의 자전이 멈춰버린다면 어떤 결과가 발생하게 될지는 참혹한 상상이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안전히 지켜주고 계신다는 믿음이 있기에 우리는 날마다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감사를 갖게 됩니다.
논쟁하기 위해 성경을 읽지 마십시오. 57쪽
또한, 성경을 읽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이며 사랑을 이해하기 위함이 아닐까요. 이 말씀을 가지고 가타부타하려고 하는 것은 학문의 장에서나 벌어져야할 부분이지, 강대상 위에서는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은 최종적으로 완성된 전서(Canon)임을 기억해야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닮아 가는 것이 목적이지 어느 교회에 다니느냐가 목적이 아닙니다. 80쪽
가나안 성도(교회를 안 나가는)들에게 주어지는 문장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교회를 식당 고르듯 쇼핑하는 분들에게도 생각해볼만한 문장입니다. 그 안의 구성원들을 보고 고르며, 담임 목회자의 설교를 골라서 취사편식하려는 이들을 꼬집는 것이 아닐까요. 교회는 믿는 자들의 모임이지 순결하고 거룩한 자들의 모임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 위에서 사역하시던 시기의 그를 따르던 무리를 돌아보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여자, 아이, 여러 종류의 환자, 장애인, 세리, 귀신 들렸던 자, 사마리아인 등 우리 안의 게토에서 존재할만한 부류는 없습니다. 또 다시 총회를 만들어가며 이 안에 오지 못할 사람들을 필터링하는 것은 다시금 바리새인들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닐지 생각해봅니다.
다시금 읽었던 책의 내용을 생각해봅니다. 우리 신앙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아닐까요. 우리가 직접 목도할 수 없는 태초에 계시던 분께서 흑암과 공허 위에서 모든 것은 만들어가시던 것을 믿는 것, 즉 창조신앙이 아닐까요. 창세기가 쓰인 그 시기가 학문적으로 언제든지 간에 당대의 민족에게는 매우 도전적인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이방인들의 신과는 전혀 다른 인격적인 분으로 나타나 있으며, 우연히 세상이 생긴 것도 아니고 신들의 싸움에 의해서 욕심에 의해서 생긴 것이 아니라 보기에 좋았다고 하는 말씀이 적혀 있는 창세기를 조금 더 깊게 읽어내려 가보는 것은 어떨까요. 평신도부터 신학생까지 읽으면서 자신을 돌아보고 신앙을 점검하게 해줄 수 있는 책임을 말씀드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