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운
김애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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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숙한 동작으로 거울 위 얼룩을 지우고, 바닥을 닦고, 핸드 타월 함에 재생지를 채우며 주변을 정리했다. 모두 어깨, 허리와 무릎을 자주 굽혀가며 해야 하는 일이었다.”(183쪽) 추석날 전에, 영종도 공항 화장실에서, 이리 재빠르게 일하는 사람은 기옥씨다. 폐경이 지나자 쉽게 열이 올라 얼굴이 붉어지고 가슴도 답답했지만, 원형탈모증으로 정수리 부근이 휑해서 머릿수건을 벗을 수는 없다. 기옥씨에게 동전만 한 탈모가 시작된 건 아들 영웅이 교도소에 간 이후부터. 어린 아들을 두고 세상을 등진 남편 몫까지 열심히 키운 영웅은 성실하고 바르게 잘 컸지만, 어학연수비용을 마련하려고 법을 어겼다. 그때부터 기옥씨는 교도소엘 매주 면회를 가지만, 아들은 점점 다른 사람이 되어가는 듯이 보였다.


 “기옥씨에게는 요즘 그런 게 필요했다. 설에는 떡국이, 보름에는 나물이, 추석에는 송편이, 생일에는 미역국이, 동지에는 팥죽이 먹고 싶다는 식의. 그래야 장이 순해지고, 비로소 몸도 새 계절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 같다는, 어느 때는 너무 자명해 지나치게 되는 일들이 말이다. 제사는 조상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지내줘야 했다. 기옥씨는 음식으로 자기 몸에 절하고 싶었다. 한 계절, 또 건너왔다고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고. 시간에게, 자연에게, 삶에게 ‘내가 네 이름을 알고 있으니. 너도 나랑 사이좋게 지내보자’ 제안하듯 말이다. 기옥씨는 그걸 ‘말’이 아닌 ‘몸’으로 알았다.”(178쪽) 그래서 기옥씨는 추석 음식 준비를 살뜰히 해두고 출근했지만, 영웅이에게 사식 좀 넣어 달라는 편지를 받자 추석날도 일한다.


 기옥씨 이야기는 <하루의 축>에 실렸다. 30쪽 조금 넘는 단편을 읽으면서 자주 쉬었다. 때론 이미 알고 있는 작가 소개를 다시 읽었다. 1980년 인천에서 태어났다는 이력을 20년쯤 앞으로 당겨야 하지 않나 싶었다. 김애란의 깊은 속내는 가늠하기 어렵고, 단정하고 무심하게 이어지는 문장들은 머리가 아니라 마음속으로 파고드는 탓이다.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소문처럼, 무서운 속도로 몰려왔다 딱 서너 발자국을 남기고 물러서는 파도처럼, 어디선가 떠나오고 또 떠나가는 자동차 소리들. 넓은 곳에 살고 싶다는 욕구는 어느새 조용한 곳으로 옮기고 싶다는 바람으로 바뀌었다.”(56쪽)고 혼잣말을 하는 새댁은 <벌레들>의 주인공이다. 김애란의 글이야말로 너무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게 곁을 맴돈다.


「비행운」에는 2008년부터 2012년까지 발표된 단편 8편이 있다. 그들의 공통점은 ‘한기’다. 찬바람이 나를 지나가는 게 아니라 등골에 머물고 있다. 쉽게 물러가지도 않는다. 운동하고 집에 오는 길에 이웃을 만나 자랑을 듣느라고 늦은 귀가를 한 적이 있다. 그리곤 낮잠을 자다가 추워서 깨고 말았다. 젖은 옷을 갈아입지 않은 게 실수였다. 따듯한 물로 샤워 한 후에야 추위는 사라졌는데,「비행운」의 한기는 어떻게 사라질까? 기옥씨의 남편을 살려낼 수도 없고, 영웅이의 잘못을 돌릴 수도 없고, 글쓰기가 어려워 신문 기사를 오려 보내는 엄마 마음을 이해하라고 다그칠 수도 없고, 전세금이 부족한 새댁의 집을 대신 구해줄 수도 없으니 말이다. 머뭇거리며 걱정하는 게 전부인데도 책은 읽기를 멈출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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