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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밤 이야기 ㅣ 단비 청소년 문학 42.195 2
박정애 지음 / 단비 / 2013년 6월
평점 :
제목보다 작가에게 끌려 책을 고르는 경우가 종종 있다. 박정애 작가도 그렇다. 2012년 여름, 조선조 여인이 쓴 내방가사인 ‘덴동어미 화전가’를 소설로 쓴「덴동어미전」(한겨레 / 2012)를 읽고 작가 만남을 다녀왔다. 그때 작가는 어린 시절에 시골에서 할머니에게 이야기를 많이 들으며 자랐고, 엄마로 직장 일로 공부로 몸과 마음이 힘들 때 ‘덴동어미’이야기가 힘이 됐다며 위안을 나누고 싶어 책을 썼다고 했다.「환절기」(우리교육)는 2005년에 출간된 책이지만, 최근에 읽었다. 책을 읽다가 멈출 수 없기는 마찬가지.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홀로된 수경이의 고단한 삶이 여물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이 흐뭇했다.
「첫날밤 이야기」도 전작들과 비슷한 울림이 있다. 다른 점은 단편집이라는 것뿐. 표제작 ‘첫날밤 이야기’는 일제 강점기 때 주인공 작은 아기가 박실이 되는 과정과 험난한 시집살이를 겪어내는 이야기가 유쾌하게 펼쳐진다. ‘정오의 희망곡’은 요즘 청소년들이 읽으면 공감 백배할 내용이다. 성적에 집착하는 아빠 덕분에 삶이 힘든 중학생 이야기를 대중가요와 버무려 놓고 내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주는 이가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살아가는 용기를 얻을 수 있다는 의미를 넌지시 건넨다. 가장 불쌍한 주인공은 ‘젖과 독’의 세자. 열세 살 세자가 하고 싶은 건 늦잠 자기, 친구와 지치도록 놀고 함께 밥 먹는 일과 유모의 젖을 만져 보는 일이지만, 그를 기다리는 건 세자의 예를 지키고 온종일 공부하는 일뿐이다. 진짜 괴로운 이유는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모르는 일이라니 조선 시대 세자의 하소연이 오늘과 다르지 않아 멈칫했다. 이 외에도 세 편이 더 있는데 주인공이 힘들다는 공통점은 같다.
박정애 작가에게 별명을 붙이는 일이 허락된다면 이 시대의 ‘전기수’라고 부르고 싶다. 단편이든 장편이든 작가의 소설은 읽는 사람이 내가 아니라 누군가 곁에서 들려주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때 그 사람은 그저 이야기를 들려주는 게 아니라 맛깔스럽게 때론 듣는 이의 애간장을 태우는 재주도 있으니 전기수가 딱 맞춤하다. 읽은 이야기보다 들은 이야기는 효과가 더 큰지 작가의 소설은 공감이 크다. 그래서일까? 살고 싶은 마음을 잃지 않고 살아내려는, 사람값을 하려는 단편집 주인공들의 수고에 고개를 끄덕이다 보면 슬그머니 내 안에서도 어떤 힘이 느껴진다. “책에 실린 이야기들이 독자 여러분의 삶에 아침이슬 같은 생기 한 방울, 더할 수 있기를” 바라는 작가에게 내게는 ‘들판의 아침 이슬만큼’이라고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