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자리 아니 에르노 컬렉션
아니 에르노 지음, 신유진 옮김 / 1984Books / 2021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애도는 상실을 극복하는 과정이다.

애도의 가장 좋은 방법은 떠난 사람을 온전히 다시 만나는 것이다. 다시 만나면 못다 한 말도 하고 포옹이라도 한번 하고 보낼 수 있겠지. 물론 불가능한 방법이다. 하지만, 만약 내가 그 사람을 통째로 기억해서 그를 만날 수 있다면 그것도 좋은 애도가 되지 않을까?
많은 작가들이 이런 애도의 방법을 시도했다. <<애도일기>>는 어머니를 기억하기 위한 롤랑바르트의 하루하루의 기록이었다. 나에겐 아니 에르노의 <<남자의 자리>> 역시 마찬가지로 읽혔다.

아니 에르노는 아버지를 애도하기 위해 그를 기억하고자 한다. 다만 예술적으로 조작되거나 감정적으로 치우치는 기억이면 안된다. 아버지 그 자체로 돌아와야 한다. 조작된 아버지를 만들어내면 그녀는 아버지를 만날 수 없다. 만약 아버지를 그려내는데 거짓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아름다움을 더하고 싶었던 게 아니라 그를, 그의 삶을 하찮게 여기는 마음이 있었다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아니 에르노는 아버지에 대한 객관적인 조각들을 모아본다. 쉬운 작업이 아니다. 글을 쓰다 보면 어느 순간 당연히 창작이 될 테니. 이런 작업에서 글쓰기의 행복이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을 하지만, 이것은 그녀가 소설을 창작하는 것이 아닌 그녀가 살아가기 위해 해야만 하는 작업이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들었던 어린시절, 사진 속의 아버지와 가족들을 회상하며 차곡차곡 글을 쓴다. 덧붙여 그녀는 아버지와 멀어지고, 아버지의 삶과 멀어진 자신의 이야기도 함께 한다. 이 책의 원제가 '남자의 자리'가 아닌 'La Place 자리'인 이유일 것이다. 그녀는 아버지를 그려내면서 그녀가 떠나왔던 아버지의 기억이 있던 그곳까지 같이 그리고 있다. 아버지는 아버지만으로 기억되는 것이 아닌 아버지가 있던 삶을 기억하는 것이기에. 

그리고 그녀는 "곧 아무것도 쓸 말이 없을 것 같다. 나는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는 것을 머뭇거리며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라고 말하며 애도의 시간이 끝내간다.

감정이 배제된 사실을 바탕으로한 단조로운 문장이지만, 아니 에르노의 아버지가 변해가는 모습에서 내 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저녁에 전화 한 통화드려야겠다.

<<이 모든 것을 설명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찾아왔다. 아버지와 그의 인생에 대해 그리고 사춘기 시절 그와 나 사이에 찾아온 이 거리에 대해 말하고 쓰고 싶어졌다.계층 간의 거리나 이름이 없는 특별한 거리에 대해. 마치 이별한 사랑처럼. - P19

나는 곧바로 그가 주인공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중간쯤에 이르자 거부감이 찾아왔다.
최근에서야 나는 소설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중략)...
한 존재의 모든 객관적인 표적을 모아보려 한다. - P20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아버지를 더 이상 먹여 살릴 수는 없었다. <<생각도 하지 않았어. 그댄 모두가 그랬으니까>> - P25

그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했다. - P39

나는 천천히 쓰고 있다. 사실가 선택의 집합에서 한 인생을 잘 나타내는 실타래를 밝혀내기 위해 애쓰면서, 조금씩 아버지만의 특별한 모습을 잃어가는 듯한 기분이다. - P40

나는 매번 개인적이라는 함정에서 빠져나온다.

물론 들었던 단어와 문장에 최대한 가깝게 써야 하는 이런 작업에서 글쓰기의 행복이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 P40

그 단어와 문장이 아버지가 살았던 세계이자 내가 살았던 세계이기도 한 곳의 한계와 색깔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어떤 단어를 다른 단어로 받아들이는 법이 없었다 - P40

노동자로서 아버지의 삶이 여기서 끝난다. - P46

아버지는 자신이 사회에 필요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으며, 그가 <<늘 저랬던 것은 아니야>>라고 말하면서도 왜 그렇게 됐는지 분명한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모든 이들에게 출제와 자유의 장소를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 P47

행복이자 동시에 소외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 P48

어떤 사진 속에도 그가 웃고 있는 모습은 없다. - P49

물건들을 신성하게 여길 수밖에 없다. 타인의 말이든 내 말이든 주고받는 모든 말속에서 선망과 비교를 의심한다...(중략)...끝을 알 수 없는, 계속되는 결핍을 느낀다.
그렇지만 욕망을 위한 욕망이었을 뿐이다. 사실상 무엇이 아름다운지, 무엇을 좋아해야하는지 알지 못했으니까. - P51

분수를 알아야 해, 그가 늘 하던 말이다. - P52

부적절한 행동을 하지 않을까, 창피를 당하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 P52

한 마디로 영리하게 처신했다. 이 경우 열등함을 인식하되 그것을 최대한 숨기면서 거부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중략)..우리가 지금의 우리가 아니었다면, 다시 말해 열등하지 않았다면 분명 알 수 있었던 것을 모른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 P53

그토록 세련된 사람들에게 우리와 공통된 어떤 것, 즉 약간의 저급함이 잇다고 믿으며 기뻐했다 - P55

내 기억 속에 언어에 관한 모든 것은 돈 문제보다 더한 원망과 아픈 언쟁의 원인이었다. - P57

우리는 서로에게 짜증 내며 말하는 법 말고 다르게 말하는 법을 몰랐다. 예의 바른 말투는 낯선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 - P63

그 이후로 그에게 늘 똑같은 삶이 펼쳐졌지만, 지금보다 더 행복할 수 없다고 확신했다. - P69

그가 대화를 할 줄 모르기 때문에 나는 늘 내가 옳다고 믿었다...(중략)...그의 태도를 바꿔주려고 했던 것이라 정당하다고 확신했다. 어저면 그는 다른 딸을 원했을지도 모른다. - P73

어느 날 그가 이렇게 말했다. <<책, 음악, 그런 건 너한테나 좋은 거다. 내가 살아가는 데는 필요없어.>> - P74

적어도 나를 먹여 살린다는 것에 행복해했다. - P74

어쩌면 우리가 서로에게 더 이상 할 말이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글을 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 P75

나는 오랫동안 런던에서 지냈다. 먼 곳에서 그는 추상적인 다정함을 가진, 변함없는 존재가 됐다. 나는 나 자신만을 위해 살기 시작했다. - P80

더 이상 야심은 없었다. 그는 자기 가게가 자신과 함께 사라질 잔재일 뿐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이제는 삶을 조금 즐겨보기로 결심했다. - P81

(친구 가족이 초대했을 때는) 내가 왔어도 전혀 바뀜없는 생활 방식을 나눌 수 있었다. 어떤 낯선 이의 시선도 두려워하지 않는 그들의 세계에 들어간 것은, 그 세계가 내게 열렸던 것은 내가 살더 ㄴ세계의 방식과 생각, 취향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 P83

예를 들자면 그의 집에서는 유리잔을 깨면 누군가 곧바로 이렇게 소리친다. <<만지지마 깨졌어>>
-> 자신의 집에서는 물건을 깼다고 꾸지람을 듣는 것과 대조 - P86

그들의 원래 모습 그대로를 다시 만나게 돼쏙, 나는 나 자신과 분리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 P87

그는 그로서는 알지 못했던 호화스러운 삶을 살도록 나를 키웠고 그것에 행복했으나, 나의 성공을 증명해줄 뿐인 던롭필로 가구나 옛날 서랍장에 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 P88

그는 점점 더 삶을 사랑하게 됐다. - P89

곧 아무것도 쓸 말이 없을 것 같다. 나는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는 것을 머뭇거리며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 P90

[옮긴이의 말] "아버지의 존재로 소설을 쓰는 것은 일종의 배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소설을 쓰면 인물을 창조하게 됩니다." - P104

[옮긴이의 말] 분석적 설명에는 미화가 없다..없는 것을 있다고 하지 않는다. 사실을 바탕으로 한 단조로운 글쓰기다. 필요한 단어로만 기억의 세계로 뛰어드는 일. - P105

[옮긴이의 말] 이 거짓 기억에는 삶을 시어보다, 은유보다 하찮게 여기는 마음이 있었다는 것을...(중략)... 아니 에르노가 옳다. 그 삶은 그렇게 쓰여서는 안된다. - P106

[옮긴이의 말]문학은 인생이 아니에요. 문학은 인생의 불투명함을 밝히는 것이거나 혹은 밝혀야만 하는 것이죠. - P106

[옮긴이의 말]쓰지 않으면 더는 존재하지 않는 어느 불투명한 삶을 구하기 위함이다. 그러니 이보다 더 완벽한 오마주가 어디 있을까? 그녀의 글은 아버지를 향한, 그녀가 내려놓고 떠났던 세상을 향한 오마주다. 그리고 이 오마주는 예술의 편에 서 있지 않다. 삶이 먼저, 문학은 그다음이다. 삶이 문학이 되기 위해 꾸며야할 이유도 필요도 없다. - P107

소설보다 더 큰 삶이 있다. -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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