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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러스틴의 세계체제 분석 당대총서 20
이매뉴얼 월러스틴 지음, 이광근 옮김 / 당대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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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체제론에 대한 논평




1. 『월러스틴의 세계체제 분석』을 통해서 본 세계체제론의 내용




『월러스틴의 세계체제 분석』에서 월러스틴은 노학자의 폭넓고 높은 시야를 통해 세계체제론이 하나의 학문으로 형성되기까지의 서양의 지적발전사를 다루고 그런 이후에 본격적으로 세계체제론의 구체적 내용과 전망을 제시하고 있다.

세계체제론은 세계체제라는 분석단위를 가지고, 장기지속이라는 시간단위를 가지며, 학제간 장벽을 허물면서 자신의 작업을 해나가는 것이 근본적 특징이다.

‘세계체제’는 세계경제체제이며 자본주의세계경제체제이다. 자본주의체제는 끊임없는 축적을 목적으로 하며 이는 세계경제의 분업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자본주의와 세계경제는 서로를 보완하며,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으로 규정된다. 자본주의 세계경제는 기축적 분업을 통해 생산을 핵심부적 제품생산과 주변부적 제품생산으로 양분한다. 이윤획득은 독점화의 정도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으며, 핵심부적 생산과정들은 바로 준독점에 의해 통제되는 생산과정들을 뜻하는 것이다. 이 결과 잉여가치는 주변부적 제품의 생산자로부터 핵심부적 제품의 생산자에게로 끊임없이 흘러들어가게 된다. 이것이 바로 불평등교환의 배경이 된다.

그리고 세계경제는 끊임없는 이윤축적을 위해서 그것에 용이한 정치적 체제로서 (세계제국을 지양하는 한에서) 국가간 체제를 가진다. 자본가들은 팽창적 시장 확대가 필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국가권력의 힘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그러한 국가권력이 자본주의적 축적원리에 반할 만큼의 강제력을 가지게 되는 것, 즉 세계제국화되는 것은 자본주의 원리상 자본가들에 의해 반대된다. 그리고 세계경제는 국가간 체제와 더불어 세계체제를 지지하는 중심적 이데올로기로서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가진다. 이러한 자유주의 이데올로기 속에는 보편주의와 특수주의(인종주의, 성차별주의)가 내포되어 있으며, 이러한 것들이 과거의 인종혐오주의와 가부장제와는 달리 자본주의적 축적을 뒷받침하는 요소를 구성한다. 세계체제 속에서 시장은 독점시장을 의미하는데, 이 때 독점의 창출과정에서 국가는 주요한 행위자로서 작동한다. 그리고 가장 주요한 경제적 힘을 가진 국가가 헤게모니를 가진다. 지금까지의 헤게모니의 순환은 대략 세 가지였고, 현재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고 월러스틴은 진단하는데 17C 네덜란드, 19C 영국, 20C 미국, 현재의 다중심체제가 그것이다.  

월러스틴에게 세계체제는 역사적 체제이다. 이는 그것이 생성 발전 소멸의 과정을 겪는다는 의미인데, 현재의 시기는 월러스틴에게 현 체제의 소멸기이며 새로운 이행의 시기이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위기 내지는 이행이 나타나는 원인일 텐데, 외견상 그러한 원인은 68혁명의 저항적 힘이 위기를 표면화시켰지만, 내적으로는 자본주의의 장기적 추세에 의해 위기는 심화되어 온 것이다. 즉 비용위기로 인한 평균이윤율의 압박이 그러한 위기를 추동하는 실질적 힘이며, 이것이 정치적 위기와 결합함으로써 현재의 이행의 시기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위기에 대응하는 지배자들의 대응은 신자유주의와 신보수주의로 나뉘지만, 이들 각각의 실효적인 대응력은 미미한 상황이다. 또한 중요한 점은 새로운 운동형태의 등장이다. 기존의 국가장악을 목표로 하는 운동에 대한 환멸로 인한 새로운 운동형태, 즉 운동들의 운동을 향한 경향은 앞으로의 우리의 미래에 대한 새로운 희망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점들이 현재 이행의 시대를 규정하며, 우리 앞에 놓인 선택지로 놓여있게 된다.

월러스틴이 기술한 바에 의하면 세계체제에 대한 비판은 실증주의자들(이론적 검증의 문제), 정통 맑스주의(유통주의적이고, 생산주의적인 기반을 무시한다는 비판), 국가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이들(경제주의), 문화적 특수주의자들(경제주의)등으로부터 나타났다. 월러스틴은 자신에게 가해지는 여러 비판들의 요점은 바로 주체성의 부재라는 점이라고 판단하며, 그에 대해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주체라는 문제는 언제나 구조 속의 주체성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점을 떠나서는 현재의 상황을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며 중요한 것은 그러한 구조의 움직임을 아는 것이라고 월러스틴은 주장한다.  




2. 세계체제론에 대한 논평




앞서 세계체제론 비판에 대한 월러스틴의 답변에서 명확하게 나타나듯이, 세계체제론의 전체적 구성은 주체성의 측면을 사상한다는 비판을 면하기는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러한 주체성의 측면보다는 체제의 구조적 운동에 방점을 찍겠다는 것이 월러스틴 자신의 전략으로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세계체제론이 앞으로의 변혁에 대한 전망을 내세우고자 한다는 측면에서 이러한 주체성의 사상은 심각한 문제를 지닌다고 생각된다. 이는 현재를 이행의 시대로 규정할 때 주체성의 힘을 외적인 요소 또는 우연적인 요소로 바라보는 관점을 세계체제론이 유지할 수 있는 배경인데, 이는 자본을 하나의 사물로서 또는 그것만을 진정한 주체로 바라보는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은 수많은 맑스주의 경제학들이 가지는 한계를 되풀이하는 것이며, 이것은 자본을 사회적 관계로 바라보는 관점들 즉 노동자계급과 자본의 계급투쟁의 결과로서 현재의 사회적 위기를 바라보는 관점에 의해 비판되고 있는 관점이다. 역사적으로 혁명적 주체성을 제기하는 전통적 관점은 레닌의 제국주의론에서 비롯된다. 그는 카우츠키의 초제국주의론에 맞서 혁명적 주체성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당대의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화시켜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을 이룩하자는 주장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레닌의 논의는 민족국가 중심적 시야와 필연적 프롤레타리아 승리 결정론에 갇혀있었다는 한계를 가진다. 이러한 레닌의 한계에 대한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적 정정은 민족국가적 시야를 넘어서며 필연성에 대한 완화를 통해 일견 긍정성을 지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레닌이 취했던 혁명적 주체성의 입장이 월러스틴에게서는 체제 외부적 요소로 머물고 있다. 즉 위기는 실제로는 체제의 자기결정성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월러스틴에게 투쟁의 관건은 이러한 구조적 움직임을 파악하는 것, 즉 앎의 문제이다. 물론 자본주의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문제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러한 파악에서 실제적 투쟁이 차지하는 위치를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이다. 따라서 결국 문제는 자본의 자기운동으로 파악할 것인가, 노동과 자본의 계급투쟁의 과정으로 파악할 것인가일 것이다.  

그리고 월러스틴의 자본개념은 임노동과 자본의 적대에서 비롯된다기 보다는 분업과 독점을 전제로 한 끊임없는 축적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맑스가 『자본』에서 갈파한 일상적 시장 속에서 잠재된 임노동과 자본 사이의 근본적 적대를 사상시키는 관점이다. 맑스는 시장을 자유시장과 동일시한 적이 없으며, 그에게 시장은 언제나 불평등한 교환이 발생하는 또는 착취가 발생하는 장소였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상품이 교환되는 모든 시장은 언제나 착취를 전제하며, 그것의 내부에는 노동과 자본의 적대관계가 놓여있다는 것이 맑스의 주장이다. 그러나 월러스틴의 자본개념 속에서 이러한 맑스의 생각은 희미하고 애매하게 놓여있어 착취를 둘러싼 주요한 적대를 자본과 노동 간이라기보다는 국가간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는 관점을 형성하게 만든다.

이러한 착취에 대한 관점이 확장된 것이 종속이론적 관점이다. 이들은 세계체제를 중심과 주변으로 바라보면서 중심부 국가들에 의한 주변부국가들의 수탈 문제를 처음으로 체계화하였다. 실제적으로도 중심부국가들의 착취는 엄연한 현실이며, 종속이론가들은 적절한 문제제기를 하였지만, 이들은 그 문제의 근본적 문제를 국가간의 문제로 간주함으로써 착취문제를 진정으로 자본과 노동 간의 문제로 제기할 수 없었다. 이들은 자본주의적 발전이 아닌 다른 종류의 발전이라는 다시금 ‘발전’이라는 문제에 갇히게 되는 길을 밟아나가게 되는데, 그것은 이들의 이론에 내재한 국가주의적 사고에 비추어서 보면 필연적 수순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들은 주요한 변혁의 동력으로 제3세계 민중만을 사고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 제3세계적 전망이라는 협소한 관점에 머물고 있는 종속이론적 관점을 월러스틴은 반주변을 도입함으로써 좀 더 설명력을 갖추는 것으로 보완하려고 하지만, 월러스틴 역시도 이러한 제3세계적 전망과 국가주의적 접근법의 틀을 극복하기 보다는 유지하고 있는 한계를 지닌다. 중심-주변-반주변이라는 지리적 구분은 세계를 다시금 국가적 경계선들을 중심으로 나누며 그러한 경계를 중심으로 착취가 발생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요한 변혁의 동력은 다시금 주변부로 향해질 수밖에 없다. 이는 아리기처럼 제3세계 엘리트들과 제1세계 노동자들 간의 동맹이라는 전략으로까지 나아가게 만든다.

그리고 또한 중심과 주변이라는 지리적 관계로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은 최근의 자본주의 발전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전지구적인 자본주의화는 더 이상 외부를 발견할 수 없으며, 이 상황은 현재의 자본주의가 맑스가 말한 실질적 포섭의 상황에 놓이게 되며 ‘주변’이라는 말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세계체제론도 이러한 상황을 인식하고 있으며 그것을 위기의 한 요인으로 받아들이지만, 이러한 변화된 상황이 나타내는 결과를 인식하지는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가령 반주변인 한국의 서울에서도 제1세계와 제3세계는 동시에 존재하며, 주변부인 남미와 아프리카에서도 제1세계와 제3세계는 혼재하며, 중심부인 미국에서도 그것은 혼재하고 있다. 즉 더 이상 지리적 관계로 중심과 주변을 나눌 수 없으며 전지구적으로 그것은 혼재한다. 따라서 중심과 주변의 지리적 잔존을 자신의 이론 속에 내재화하는 것은 앞서 말했듯이 제1세계 자본가와 제3세계 민중간의 대결이라는 전망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세계체제론에서 주요한 행위자는 자본가와 국가이다. 그리고 독점의 창출배경은 항상적으로 국가이다. 이러한 국가의 힘을 배경으로 해서만 자본은 이윤창출의 근거가 되는 독점을 창출할 수 있다. 그러나 최근의 자본주의발전단계는 이러한 국가중심적인 시각을 상당부분 무력화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세계체제론은 국가자율성론을 부정하려고 노력하며 심지어는 경제결정론으로까지 불리지만, 체제 내부에서 행위의 주체가 실제로는 국가에 다름 아니라는 것은 아이러니로 보인다. 초국적 자본과 초국적 기업과 초국적 국제기구들의 활동은 전세계를 다시금 새로운 수준으로 절합하면서 이러한 국가의 중심적 활동성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민족국가 중심적 시야를 벗어나 세계적 시야를 가지려고 하지만, 그 내부에서 나타나는 행위의 양상은 과거의 제국주의적 시각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 세계체제론의 한계로 지적될 수 있겠다.













참고문헌

이매뉴얼 월러스틴, 『월러스틴의 세계체제 분석』, 당대, 2005

이수훈, 『세계체제론』, 나남, 1999

안토니오 네그리 & 마이클 하트, 『제국』, 이학사, 2001

조정환, 『지구제국』, 갈무리, 2002

정성진, 「세계체제론: 맑스주의적 비판」, 『진보평론』2호, 1999

비버리 J. 실버.지오반니 아리기, ‘남과 북의 노동자’, 『미국의 세기는 끝났는가?』7장,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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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힐의 향연 - 한자의 신화와 유토피아 이산의 책 34
다케다 마사야 지음, 서은숙 옮김 / 이산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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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눈박이 창힐 에피고넨(요즘말로 풀어쓰면 '따라쟁이')들의 흥미진진한 모험담을 만난다. 본문만 치면 300쪽이 못 되는 이 책에는 실로 많은 역사적 사례들이 풍부하게 나열되어 있다. 그 구성 또한 자못 흥미롭다. 이 책은 중국의 문자를 중심으로 하지만 넓게 보면 문자활동을 하는 문명 전반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입말과 글말의 하나됨을 꿈꾸며 인간이 기울였던 숱한 모험들이 정교하게 수놓여 있다.

이 책은 일본의 산토리 학예상을 수상한 작품이라 한다. 산토리 학예상은 신진 학자의 저작에 수여하는 권위 있는 상이다. 카이에소바주 시리즈로 번역된 연작으로 국내에 잘 알려진 나카자와 신이치 역시 산토리 학예상의 수상 경력을 지닌 학자다. (<티베트의 모차르트>가 수상작임). 이 책을 읽으면서 놀란 것은 작가의 필력만이 아니다. 번역의 왕국으로 이름난 일본이 얼마나 지독한 노력을 기울여 타문화를 이해하려 해왔는가 하는 점에서 경이로움은 더욱 배가되었다. 신진 학자 다케다 마사야가 인용하는 작품들은 우리로서 접해보지 못한 무수한 동서양의 고전들이다. 얼마나 많은 작품들이 일본어로 번역되어 있는지 책을 읽으면 금세 눈치챌 수 있다. 이런 문화적 기초자료에 힘입어 일본의 인문학과 문화가 서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들의 기반이 얼마나 탄탄한지에 골몰하게 된다.

이 책의 내용은 매우 흥미롭지만, 일반 학술서처럼 논리적인 전개에 신경을 써서 현란한 이론의 빛을 방사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일단 일반인들을 위한 교양서의 수준에서 담론을 끌어간다. 이것은 단순한 재능이 아니다. 쉽게 잘 정리해서 말할 수 있다는 것은 학자의 미덕 중 최고의 덕목이라 할 수 있다. 국내 프랑스 철학자 가운데 이런 재능 지닌 사람으로 이정우를 꼽고 싶다. 프랑스 철학의 흐름을 정리해내는 솜씨는 가히 압권이다. 이것은 그가 펴낸 강의록 시리즈를 통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각석하고, <창힐의 향연>에는 '한자의 신화와 유토피아'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한자의 신화란 말 그대로 한자를 창조했던 일컬어지는 창힐을 비롯한 한자 발생의 초기를 드라마처럼 그려보인다는 말이고, 한자의 유토피아라는 말은 보편언어를 꿈구었던 인류 공통의 노력을 가리키는 말이다.

중국대륙에서 한자로 의사소통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는 여러 사례를 통해 잘 알 수 있다. 국공합작를 해 일본에 대항하던 중국군대들이 서로 의사소통이 안돼 전투에서 황당한 경험을 하는 장면을 읽은 적이 있다. 하나의 글자를 쓰지만 그 글자는 읽는 사람들은 서로 다르게 발음하는 상황에서 빚어진 웃지 못한 촌극이 그 내용이었다. 이런 상황은 지금까지 중국의 골치거리다. 이 책의 출발점은 이것이었을 것이다. 한자라는 문자가 동아시아를 전제 지배하고 있지만, 정작 중국인들은 한자를 개량하거나 대체하고 싶어 한다. 쾌적한 문자환경을 지닌 우리로서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정말 문자 때문에 고생을 하는 중국의 경우에서 있을 법한 일이다. 일본의 경우엔 복잡한 문자환경을 지녔다. 이런 문자환경이 일본인의 정신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하는 것은, 가라타니 고진의 <일본의 정신분석>이란 책이 잘 나와 있다. 음독과 훈독의 상황은 일본인의 정신구조와 문화적 패턴을 일정한 방식으로 틀짓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중국의 문화환경에 대한 것이 출발한 이야기는 16, 17세기 서양에 폭풍처럼 일었던 계몽주의, 그리고 이성 중심의 사유를 바탕으로 한 '보편언어의 꿈'으로 이어진다. 동서문명교류의 역사가 자연스럽게 이야기된다. 의도적으로 주제를 잡지 않았지만 하나의 테마 안에 서양과 동양은 어떻게 서로를 바라보았는가가 그려지는 것이다. 참 매끄러운 전개다. 문자의 수용을 둘러싼 동서교류의 역사는 이 책의 3, 4, 5장의 주를 이룬다. 흥미로운 사례들이 정말 많이 나온다. 하지만 어렵지 않다. 너무 깊거나 지리하지 않게 물수제비 돌처럼 논지의 머리를 탁탁 치고 나간다. 제비가 저공비행하듯 날렵하게.

정말 잘 씌어진 에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에세이'가 원래 '시도' '시험' 등의 의미를 지닌 것임을 되새기게 해준다. 현기증 나는 학술서가 아님에도 학술서의 맛을 볼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 이산출판사의 책들은 무조건 믿을 만하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확증시켰다. 본문 활자의 편안함도 읽는 즐거움을 더했다. 지칠 만하면 등장하는 도판자료 역시 읽기에 좋았다. 이 창힐 에피고넨들의 모험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보편언어를 꿈꾸었던 서양이나 자신들의 입말을 잘 고정시켜줄 글말을 찾는 중국인의 노력 모두 계속되고 있다.

우리의 문자 한글을 생각했다. 상형문자도 표음문자도 아닌 한글, 상형문자이면서 표음문자의 특징을 모두 갖춘 기묘하고 기발한 문자, 그래서 언어학자들이 자질문자-이때는 자질은 영어의 피겨Figure로, 한 사물의 움직임과 모습을 다 나타낸다-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런 한글 역시 끊임없이 개발하고 다시 손질하지 않으면 그 값어치를 살릴 수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한글은 아직 성장하고 있는 문자다. 어쩌면 완전한 문자의 완성은 없는 것인지 모른다. 불가능한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유토피아의 꿈을 꾸지 않는 사람에겐 더 나은 미래란 오지 않는다. 그 미래를 향한 에피고넨들의 모험은 그래서 중단될 수 없고, 그래서 감히 아름다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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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을 움직인 한국재벌의 어제와 오늘
지동욱 지음 / 눈과마음(스쿨타운)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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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국사회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재벌이나 정경유착만큼 대표적인 키워드도 없을 것이다. 돈 많은 것이 죄가 되는 사회, 그럼 돈 없는 것이 자부심이 되어야 할텐데 돈 없는 것 역시 죄가 되고 심한 박탈감을 느껴야 하는 그런 사회에서 나는 자랐다.

생각해보면 그리 길지도 않은 삶속에서 그 사회는 상상이상의 변화를 겪었다. 물론 나무로 불을 때서 밥을 해야하던 내 어머니 세대가 겪은 변화보다야 못하겠지만 말이다.

어린 시절 내가 살던 동네에는 어마어마한 대저택이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 집이 일억원이라고 했다. 도대체 일억원이라는 돈이 얼마인지 상상을 할 수 없었던 나는 그때의 기억때문인지 지금도 일억원이 어마어마한 돈이라는 느낌이 있는데 그 일억원으로는 요즘 웬만한 아파트 전세얻기도 힘들다고 들었다.

그 몇 십년 동안 돈의 가치는 형편없이 떨어졌고 우리는 어쨌든 모두 그때보다는 부자가 되었다. 누군가의 집에 티비가 있으면 저녁마다 그리 모였던 적이 있었는데 이제 많은 사람들이 집에 홈시어터를 구비해놓고 산다고 한다.( 여담인데 홈시어터가 무슨 말인지를 몰랐던 나는 무슨 베이비시터같은 걸까 고민했던 적이 있다..^^;; )

이 책은 십원짜리 하드를 먹다 간혹 오십원짜리 부라보콘에 감격하던 내가 베스트라빈스 아이스크림을 만원어치 사먹을 수 있게 된 과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일제시대와 한국전쟁을 거친 대한민국이 어떻게 경제성장을 해왔는지를 재벌과 정권과의 관계로 분석하고 있는데 그 과정이 무척이나 흥미롭다.

특히 왜 그 곡창지대인 호남이 못 살까가 늘 궁금했었는데 이승만정권이 들어선 후 호남지주세력이 몰락해 가고 월남한 세력이 부상하는 과정은 내 궁금증을 한꺼번에 풀어줬다. 

거기다 이승만이나 박정희등 권력자들의 끝없는 권력에의 야욕은 그 권력자체의 맛도 맛이었겠지만 하도 잘못한게 많아 그냥 물러났단 죽겠구나 하는 위기의식이었을거란 새삼스런 이해(?)까지 들더라.

무조건 성장위주의 정책으로 야기된 불평등과 무조건 돈만 벌면 된다는 도덕불감증, 실력보단 연줄을 이용하는 우리 사회에 만연된  천민자본주의의 과정을 따라가는 건 가슴답답한 일이다.

어찌되었건 그 사이 대한민국의 위상은  높아졌고 경제력은 세계속에서 조금 나은 인간대접을 받는데 큰 기여를 했다.  

물론 그 불평등한 분배, 환경의 문제, 이미 우리사회에 깊이 침투해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문제, 더 나아가 우리보다 경제력이 없는 나라에서 행해지는 부끄러운 행태등 우리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들은 성장보다 더 어렵고 오랜 시간이 필요할 힘든 과정으로 우리앞에 남아있지만 말이다. 그리고 진정으로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그 문제는 지금 대부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우리 세대에서 풀기 시작해야 할텐데 하는 조바심도 든다 

정권이 바뀌고 나면 늘 전임자에 대한 처벌이나 비리가 드러나야하는 슬픈 우리의 현실. 몇 일전 중앙일보 기자가 쓴 글을 봤더니 노무현정권이후 우리 사회가 많이 맑아졌다고 도대체 누가 이 정권의 실세냐는 불평들이 나온다는데 이렇게만 마무리 된다면 노무현정권은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 역사에 큰 발자국을 남기는 거란 생각이 든다. 물론 이 정권이 지나간 후 뚜껑은 열어봐야 겠지만 말이다.

서울올핌픽이 민주화선언을 이끌어내는 원동력이 되었다던지, 삼성 사남매의 이름이 틀린다던지 하는 실수는 있지만(물론 내가 모르는 다른 실수들이 있을 가능성도 있고 말이다) 미국의 원조나 대일청구권의 자금 베트남 특수 그리고 세상을 떠들석하게 했던 사건들, 경제수치등이 일목요연 잘 정리되어 있어서 나같이 경제쪽에 무지한 사람에겐 재벌의 형성부터 오늘날까지를 훓어보기에 별 다섯개가 아깝지 않은 책이다.

이 책을 권해주신 사마천님께 다시 한 번 깊이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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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보슬비 > "韓-美두 농부, 21세기 新유목민을 비판하다"

"韓-美두 농부, 21세기 新유목민을 비판하다"

  
[동아일보]

호모 노마드(Homo Nomad·유목하는 인간). 21세기의 신(新)인류다. 세계화와 더불어 휴대전화와 무선인터넷으로 무장한 ‘디지털 노마디즘’이 피할 수 없는 흐름으로 떠올랐다. 기업 경영에서도 쉼 없이 이동하며 제국을 이룬 몽골의 이 최고경영자(CEO)의 새로운 모델로 부상한 지 오래다. 유목주의는 ‘세계화’와 ‘디지털’이라는 두 키워드가 점령한 현대의 금과옥조처럼 수용되고 있다.

그러나 유목주의의 유행에 문제는 없는 걸까. 유목주의와 대척점에 서 있는 정착민의 철학을 지닌 두 명의 농부가 ‘현대의 미신’인 유목주의를 비판하는 목소리를 높였다.

환경운동가인 천규석 씨가 지은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실천문학사)와 미국의 시인 겸 문명비평가인 웬델 베리 씨가 쓴 ‘삶은 기적이다’(녹색평론사)는 책이 최근 잇따라 출간됐다.

저자들은 정착민의 대표 격인 농부이자 지식인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천 씨는 서울대 미학과를 졸업한 뒤 1965년 귀향해 지금까지 농사를 지으며 한살림운동 대구 공동체를 만드는 등의 활동을 해 왔다. 베리 씨는 뉴욕대 등에서 영문학, 문예창작을 강의하다 1960년대 중반에 사직하고 켄터키 고향마을로 돌아가 40년간 농사를 지으며 40여 권의 책을 집필했다.

천 씨는 자신의 책에서 “21세기 디지털 시대의 대안적 생활방식으로 급부상한 유목주의가 사실은 침략주의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불완전한 생활방식”이라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유목으로 생계를 꾸려갈 경우 가구(5인 가족 기준)당 30여만 평의 땅이 필요한 반면 농경으로 살려면 1가구에 필요한 땅은 일모작이냐 이모작이냐에 따라 900∼1800평에 불과하다. 즉 “최소한의 토지에서 최대한의 에너지를 생산하는 생태 경제적 측면에서 유목은 지속이 불가능한 생계 양식이며 자급자족적이지 않은 결핍적 존재”라는 주장이다.

이는 과거 유목민이 도시와 국가를 세울 때 필연적으로 인근 농경민에 대한 침략과 농업생산물의 탈취를 통해 국가를 유지하려 했던 데에서도 드러난다. 천 씨는 “지금 전 세계를 휩쓰는 세계시장 제국주의도 그 침략성, 수탈성에서 유목주의와 닿아 있다”며 칭기즈칸은 오늘날 미국과 그 확대 연장선상에 있는 ‘세계시장’이란 신제국주의의 선구자라고 비판했다.

베리 씨의 ‘삶은 기적이다’는 미국의 사회생물학에드워드 윌슨 씨가 쓴 ‘통섭’에 대한 비판 형식의 책이지만 유목주의에 대한 비판이 곳곳에 배어 있다.

그는 현대 사회의 이동 현상을 비판하면서 “독창성과 혁신에 대한 숭배는 실은 무엇이든 사고파는 일에 내가 꼴찌가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옆에 있는 사람의 발을 밟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는 획일주의자가 저지르는 어리석은 짓거리”라고 주장했다.

‘통섭’에서 윌슨 씨는 ‘오늘날 우리는 전 지구를 홈그라운드로 삼게 되었다’고 말하지만 베리 씨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인간도 전 지구를 알았던 적이 없다. 이 ‘세계여행’의 시대에도 전 지구 위에 살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실은 너무 커진 이동성 때문에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어디서도 살고 있지 않다. 우리가 지구의 어느 한 부분이라도 친밀하게 구체적으로 정확하게 애정을 갖고 알고자 한다면 구체적으로 어느 한 장소에 오래 살아야 한다.”

유목주의자가 숭상하는 혁신과 낯섦, 가 보지 않는 곳을 발견하는 일 대신 친숙함, 자신이 살고 있는 장소에 대해 잘 아는 것을 더 중요한 가치로 여겨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프랑스 곤충학자 앙리 파브르가 생애 마지막 30여 년을 ‘사방 벽으로 둘러싸인 자갈밭 한 뙈기’ 안에 있는 곤충들과 그 밖의 동물을 연구하면서 소중한 발견을 할 수 있었듯이 말이다. 혁신은 인간의 재능과 수단에 의해 한정되지만 친숙함은 살아 있는 한 무한히 확대되며 삶의 한계에 의해서만 한정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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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피아니스트 나남신서 943
H. 쇤베르그 지음, 윤미재 옮김 / 나남출판 / 2008년 9월
평점 :
절판


학교 도서관 같은 델 가면 보면대에 사전을 펼쳐놓은 걸 볼 수 있다. 오다가다 궁금한 점 있으면 별도의 대출절차 없이도 누구나 펄럭펄럭 찾아보라는 배려같은 것인데, 그 자리에 놓여도 좋을 만한 책이 바로 <위대한 피아니스트>다. 제목만 보아서는 어느 피아니스트의 평전처럼 보이지만, 바흐 이래의 피아니즘의 변천사를 인물 위주로 엮어놓은 참고서에 가깝다. 피아노 음악을 중심으로 하는 '음악의 이해'같은 과목이 있다면 교과서로 채택될만하다(분량이 650페이지가 넘고 책값이 비싼게 흠이다. 할인도 안해준다. 쩝). 나 역시 매일 조금씩 강의듣는 기분으로 틈나는대로 읽었다. 다루는 방대한 내용에 비해 서술이 쉽고 재미있는 일화를 많이 들려주기 때문에 마음만 먹는다면 사나흘에 읽어치울 수도 있다. 하지만 교과서를 속독한다고 해서 그게 다 머리에 들어오란 법은 없고, 필요한 부분을 그때그때 찾는 능력을 키우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므로, 시간을 두고 꾸준히 훑어나가기를 권한다.

이 책에서 집어낼 수 있는 중요한 흐름이란 게 있다면 다음의 두가지다 :

1. 연주자와 작곡자의 관계 - 연주자는 악보에 충실해야하는가?
2. 피아노는 타악기인가?

첫번째 물음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당연한 답을 갖고 있는 듯하다. 스트라빈스키가 말하듯이 "여기는 당신 집이 아니"기 때문에, 연주자는 작곡가의 지시를 숙지하고 충실히 잘 따라야 한다,는 것이 소위 현대적 개념이다. 악보를 제대로 읽고 음표와 지시어대로 연주하는 것이 음악원 우등생들의 첫번째 조건인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악보의 절대성이 인정된 것은 근래의 일이라고 한다. 음악에 대한 지극히 낭만적인 해석(표제적 해석)이 허용되었음은 물론이고, 작곡가의 허락 없이도 곡을 수정하는 일이 연주자의 권리처럼 인식되었으며, 심지어는 여러 개의 곡을 짜깁기한 새로운 곡을 만들어 버젓이 연주하기까지 했다. 피아노 연주회는 한바탕의 쇼에 지나지 않았고, 즉흥연주와 쇼맨쉽이 뛰어난 사람들이 대가로 환영받았다. 모짜르트의 순회연주가 '음악회'라기보다는 '재주자랑'일 뿐이었다는 사실엔 할 말을 잃게 된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사태는 피아니스트와 작곡가가 같은 사람인 경우가 많았다는 사실로 일부 설명된다. 대부분의 피아니스트는 자작곡을 연주하는 기교가였고 살롱이나 궁정에 봉사했다. 그런 와중에서도 피아노라는 악기에 종속되지 않고, 과장된 테이스트(개성의 표현 쯤으로 해석하면 되겠다)보다는 진지한 음악적 해석을 추구하는 음악가들이 꾸준히 출현했다. 그들이 오늘날 우리가 음악사적 '대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사람들이다. 현대의 피아니즘은 악보에 대한 충실한 재현을 기반으로 개성을 인정하는 양상을 띠고 있다. 그러나 저자 쇤베르크가 지적하는 대로, 이것은 어디까지나 20세기 후반(~21세기 초반)의 시대적 유행일 뿐이다. 이지적인 시대에도 낭만주의는 살아있다. 다만 득세하지 못할 따름이다. 피아니스트 개개인에게서도 음표와 개성간의 충돌과 합의의 험난한 과정을 읽을 수 있다. 생물학의 유명한 명제 "개체 발생은 계통발생을 되풀이한다"는 음악에서도 유효한 셈이다. 쇤베르크의 관점에서 보자면, 피아노 분야 뿐만 아니라 바흐 이래의 음악사 전체가 낭만주의와 脫낭만주의 간의 진자운동으로 정리될 수 있다. 음악사를 개괄하는 데에 퍽 유용한 방식이라고 할 수 있겠다.

두번째. 피아노의 정체(?)에 관한 물음.
피아노에는 검고 흰 건반이 있고 그것에 붙은 해머가 줄을 때리면 소리가 난다. 피아노 역시 지금의 모습을 갖추는 데엔 오랜 시간과 기술적 진보를 필요로 했다. 하지만 그 기본 원리가 '해머가 줄을 때린다'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포르테 피아노처럼 맑고 다소 빈약한 소리를 내는 종류에서부터 아예 듀엣용으로 두대를 붙여놓은 거대한 피아노까지 그 모습은 다양하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피아노는 타악기인가 아닌가? 건반악기라는 애매한 명칭 말고, 소리를 내는 기본 원리에 입각해서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면 결국 타악기라고 시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 파생하는 또다른 물음은, 그럼 피아노는 두들겨쳐야 하는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피아노줄이 심심하면 끊어지고 해머가 망가지기 일쑤였을 때에도 피아노를 두들겨댄 사람들은 많았다. 그러나 어깨와 팔을 그대로 둔 채 손가락만 매끄럽게 움직이는, 심지어는 손등에 올린 동전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부드러운 연주를 숭상하던 시대도 있었다. 피아노가 타악기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운지법과 같은 연주기법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개성의 폭발에 환호하는 낭만주의와 화려한 타건 사이의 만남 또한 필연적이라는 사실을 보게 된다. 하지만 높이 들어올린 손을 건반에 쾅!하고 내리찍는 피아니스트의 모습에 익숙하다면, 피아노에 매달린 듯이 웅크리고 연주하는 글렌 굴드의 모습도 염두에 두어야 하고, 거의 꼼짝하지 않고서도 천둥같은 포르테를 낼 수 있었다는 다른 많은 피아니스트에 대해서도 소홀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쓰다듬듯이, 기름이 흐르듯이 매끄럽게 - 피아노를 타악기로 연주하기보다는 '하프를 뜯듯이' 다루었다고 해야 할 또다른 기교에 대해 생각하게 해 준 것 역시 <위대한 피아니스트>가 나에게 건네준 선물이다.

이 책이 씌어진 것이 1970년대 후반이므로, 현재 각광받는 젊은 피아니스트에 대한 평가는 거의 전무하다 할 수 있다. 그러나 20세기 초반부터 '위대한 피아니스트'로 꼽힐만한 사람들은 거의 빠짐없이 등장하고, 앞에서 꼽은 두가지 관점에 의해 친절히 설명된다(별로 유명하지도 않은 미국 피아니스트에 대한 설명이 의외로 장황한 점은 '미국인이 쓴 책이기 때문에' 이해해 줄 수 있다). <위대한 피아니스트>는 현대에 이르는 피아노 음악의 흐름을 개괄할 수 있는 기초적 레퍼런스가 필요한 사람에게 적당한 책이다. 집에 보면대가 있다면 펼쳐놓고 싶다. 피아노도 있으면 좋겠고. 음반? 그건 물어서 뭣하나?

 

ps 1. 여느때처럼 시비걸기
다른 책들도 그렇겠지만 특히 인물 위주의 책을 번역할 때에는 인명을 표기하는데 신경을 많이 써야한다고 생각한다. 편집이 덜 된 부분이 적지 않은 것 역시 감점 요인인데, 인명 읽기가 어색한 점은 그 이상으로 눈에 거슬린다. 영어식으로 통일하든지, 아니면 원어의 발음을 조사했어야 한다(후자가 더 적당하다고 본다).  Korngold는 '콘골드'로, Curzon은 '쿠르존'으로 써놨는데, 내가 듣기로는 각각 '코른골트'와 '커즌'으로 발음한다. 이도 저도 아닌 이름표기 때문에 괄호 안의 원어를 보느라고 좀 어지러웠다. 저자 Harold C. Schonberg를 '쇤베르크'로 쓴 것은 원래 그렇게 불리기 때문인가? 미국인이라니 나같으면 '숀버그'로 읽겠는데 말이다. 작곡가 아놀드 쇤베르크와 헷갈리기도 한다.

ps 2. 리스트에 관해서
피아노 쇼의 대마왕이라면 단연 리스트를 꼽을 수 있다. 제멋대로 낭만성과 나잘났다 쇼맨쉽의 최고봉이라 하겠다. 그런 그가, 브렌델과 같은 '지적인' 피아니스트들에 의해 끊임없이 재발견되고 재평가되는 건 참으로 흥미롭다. 리스트에 관심없어하던 나같은 사람을 동하게 할 정도면 이 책은 '뽐뿌'에도 제법 성공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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