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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힐의 향연 - 한자의 신화와 유토피아 ㅣ 이산의 책 34
다케다 마사야 지음, 서은숙 옮김 / 이산 / 2004년 12월
평점 :
품절
네눈박이 창힐 에피고넨(요즘말로 풀어쓰면 '따라쟁이')들의 흥미진진한 모험담을 만난다. 본문만 치면 300쪽이 못 되는 이 책에는 실로 많은 역사적 사례들이 풍부하게 나열되어 있다. 그 구성 또한 자못 흥미롭다. 이 책은 중국의 문자를 중심으로 하지만 넓게 보면 문자활동을 하는 문명 전반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입말과 글말의 하나됨을 꿈꾸며 인간이 기울였던 숱한 모험들이 정교하게 수놓여 있다.
이 책은 일본의 산토리 학예상을 수상한 작품이라 한다. 산토리 학예상은 신진 학자의 저작에 수여하는 권위 있는 상이다. 카이에소바주 시리즈로 번역된 연작으로 국내에 잘 알려진 나카자와 신이치 역시 산토리 학예상의 수상 경력을 지닌 학자다. (<티베트의 모차르트>가 수상작임). 이 책을 읽으면서 놀란 것은 작가의 필력만이 아니다. 번역의 왕국으로 이름난 일본이 얼마나 지독한 노력을 기울여 타문화를 이해하려 해왔는가 하는 점에서 경이로움은 더욱 배가되었다. 신진 학자 다케다 마사야가 인용하는 작품들은 우리로서 접해보지 못한 무수한 동서양의 고전들이다. 얼마나 많은 작품들이 일본어로 번역되어 있는지 책을 읽으면 금세 눈치챌 수 있다. 이런 문화적 기초자료에 힘입어 일본의 인문학과 문화가 서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들의 기반이 얼마나 탄탄한지에 골몰하게 된다.
이 책의 내용은 매우 흥미롭지만, 일반 학술서처럼 논리적인 전개에 신경을 써서 현란한 이론의 빛을 방사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일단 일반인들을 위한 교양서의 수준에서 담론을 끌어간다. 이것은 단순한 재능이 아니다. 쉽게 잘 정리해서 말할 수 있다는 것은 학자의 미덕 중 최고의 덕목이라 할 수 있다. 국내 프랑스 철학자 가운데 이런 재능 지닌 사람으로 이정우를 꼽고 싶다. 프랑스 철학의 흐름을 정리해내는 솜씨는 가히 압권이다. 이것은 그가 펴낸 강의록 시리즈를 통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각석하고, <창힐의 향연>에는 '한자의 신화와 유토피아'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한자의 신화란 말 그대로 한자를 창조했던 일컬어지는 창힐을 비롯한 한자 발생의 초기를 드라마처럼 그려보인다는 말이고, 한자의 유토피아라는 말은 보편언어를 꿈구었던 인류 공통의 노력을 가리키는 말이다.
중국대륙에서 한자로 의사소통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는 여러 사례를 통해 잘 알 수 있다. 국공합작를 해 일본에 대항하던 중국군대들이 서로 의사소통이 안돼 전투에서 황당한 경험을 하는 장면을 읽은 적이 있다. 하나의 글자를 쓰지만 그 글자는 읽는 사람들은 서로 다르게 발음하는 상황에서 빚어진 웃지 못한 촌극이 그 내용이었다. 이런 상황은 지금까지 중국의 골치거리다. 이 책의 출발점은 이것이었을 것이다. 한자라는 문자가 동아시아를 전제 지배하고 있지만, 정작 중국인들은 한자를 개량하거나 대체하고 싶어 한다. 쾌적한 문자환경을 지닌 우리로서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정말 문자 때문에 고생을 하는 중국의 경우에서 있을 법한 일이다. 일본의 경우엔 복잡한 문자환경을 지녔다. 이런 문자환경이 일본인의 정신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하는 것은, 가라타니 고진의 <일본의 정신분석>이란 책이 잘 나와 있다. 음독과 훈독의 상황은 일본인의 정신구조와 문화적 패턴을 일정한 방식으로 틀짓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중국의 문화환경에 대한 것이 출발한 이야기는 16, 17세기 서양에 폭풍처럼 일었던 계몽주의, 그리고 이성 중심의 사유를 바탕으로 한 '보편언어의 꿈'으로 이어진다. 동서문명교류의 역사가 자연스럽게 이야기된다. 의도적으로 주제를 잡지 않았지만 하나의 테마 안에 서양과 동양은 어떻게 서로를 바라보았는가가 그려지는 것이다. 참 매끄러운 전개다. 문자의 수용을 둘러싼 동서교류의 역사는 이 책의 3, 4, 5장의 주를 이룬다. 흥미로운 사례들이 정말 많이 나온다. 하지만 어렵지 않다. 너무 깊거나 지리하지 않게 물수제비 돌처럼 논지의 머리를 탁탁 치고 나간다. 제비가 저공비행하듯 날렵하게.
정말 잘 씌어진 에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에세이'가 원래 '시도' '시험' 등의 의미를 지닌 것임을 되새기게 해준다. 현기증 나는 학술서가 아님에도 학술서의 맛을 볼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 이산출판사의 책들은 무조건 믿을 만하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확증시켰다. 본문 활자의 편안함도 읽는 즐거움을 더했다. 지칠 만하면 등장하는 도판자료 역시 읽기에 좋았다. 이 창힐 에피고넨들의 모험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보편언어를 꿈꾸었던 서양이나 자신들의 입말을 잘 고정시켜줄 글말을 찾는 중국인의 노력 모두 계속되고 있다.
우리의 문자 한글을 생각했다. 상형문자도 표음문자도 아닌 한글, 상형문자이면서 표음문자의 특징을 모두 갖춘 기묘하고 기발한 문자, 그래서 언어학자들이 자질문자-이때는 자질은 영어의 피겨Figure로, 한 사물의 움직임과 모습을 다 나타낸다-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런 한글 역시 끊임없이 개발하고 다시 손질하지 않으면 그 값어치를 살릴 수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한글은 아직 성장하고 있는 문자다. 어쩌면 완전한 문자의 완성은 없는 것인지 모른다. 불가능한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유토피아의 꿈을 꾸지 않는 사람에겐 더 나은 미래란 오지 않는다. 그 미래를 향한 에피고넨들의 모험은 그래서 중단될 수 없고, 그래서 감히 아름다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