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드팀전 > 나를 언제나 의문을 품는 사람으로 만들어주오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그린비 크리티컬 컬렉션 15
프란츠 파농 지음, 남경태 옮김 / 그린비 / 2004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파농의 책을 읽다가 대학교 역사 수업시간이 떠올랐다.식민지 해방투쟁과 관련된 수업이었다.첫 시간에 강사는 이 수업의 기본 전제에 대해 말했다.일제 식민지 시기 우리 민족의 반제국주의 전선은 크게 두가지이다.하나는 민족개량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폭력혁명론이다.우리 역사는 분단으로 인하여 폭력혁명에 대한 부분은 진지하게 다루어지지 않았다.반면 민족 개량주의는 당시 현실 속에서 어쩔 수 없는 아주 현실적인 선택이었다.하지만 강사왈...그거 다 뻥이다.그리고 한 학기 수업에서 왜 민족개량론이 뻥일 수 밖에 없는지를 설명하고 식민지 현실에서 폭력혁명이 유일한 반제국주의 투쟁방법일 수 밖에 없었음을 이야기하자고 했다.

일제시대 우리민족의 과제는 두가지로 압축된다.반봉건과 반제국주의.반봉건은 유교적 중세성에서 벗어나 개인의 자유와 민권의식을 함양해야하는 내적 과제이다.이와 함께 외세라는 제국주의의 물결에 저항하여 민족의 생존권을 지켜야하는 외적 문제 역시 해결되어야 했다.이러한 이중억압 구조의 혁파는 지상과제였다.많은 지식인들이 그 대안을 사회주의 혁명에서 찾았다.해방 이후 초기에서 중도좌파계열이 대중의 상당한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것도 혁명전통의 순수성과 토지분배문제에 대한 민중들의 이익을 반영하고 있었기때문이다.이 책<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의 서문에서도 사르트르는 이렇게 말한다.  "민족혁명이 성공하려면 사회주의 혁명이어야 한다."

사회주의 혁명의 특징중 하나는 프롤레타리아의 폭력혁명이다.개인의 자유와 사적 자본축적을 이룩한 한 역사의 주체 부르주아지가 변증법의 틀에서 안티테제에 이르는 때가 필연적으로 온다.노동력만을 유일한 자본으로 하는 프롤레타리아의 투쟁은 승리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거쳐 사회주의 이상이 건설된다.프란츠 파농은 이 책에서 사적 유물론의 단계론적 세계관을 식민현실을 토대로 부정한다.파농은 저개발국에서 부르주아지 존재의 필요성에 대해 부정한다.식민지 사회에서 부르주아지는 식민 모국의 부르주아지와 자신을 동일사하려는 속성을 보인다.거기에 그들은 편협한 민족주의의 이름으로 민족을 대표하는 권력을 얻게 된다.이들은 또한 식민 모국이 심어준 인종주의적 편견을 그대로 답습한다.식민사관을 그대로 답습하여 "조선놈들은 게을러서......" 라는 식의 민족 부르주아지의 정서가 피부색을 달리한 사람들에게 적용되면 그게 인종주의적 편가름이된다.민족 부르주아지는 점차 자신의 민중들에게는 등을 돌리고 식민 모국,외국자본가들을 지향한다.결국 식민 모국으로 부터 독립이 될 지라도 광범위한 압력을 통해 식민모국은 그 영향력을 직접지배때보다 넓히게 된다.더 간단하게 말하면 식민국가는 신신민지의 형태로 바뀌게되는 것이다.

파농은 식민지의 자본축적이 중개업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파악한다.식민지는 경제적으로 이중의 수탈을 받는다.하나는 자원의 공급시장이요 또 하나는 잉여생산물의 수요시장으로서의 역할을 갖는다.민족부루주아지는 이 사이에서 중개라는 형태를 통해 자본을 축적한다.파농은 해방이후 중개업에 대한 국유화로 자원의 분배형평성과 민족부르주아지의 사적 자본 축적의 통제를 주장한다.

파농이 보기엔 혁명의 주체는 사회주의혁명처럼 프롤레타리아가 아니다.파농은 프롤레타리아를 식민지사회에서 나름대로 수혜를 보고 있는 사람들로 본다.이들이 점차적으로 민족 부르주아화 되며 민족정당에 대한 지지를 보이게 된다.식민 모국은 지속적으로 분리정책을 주도한다.결국 프롤레타리아와 식민부르주아가 혼재하는 도시층과 농민과 기타원주민들이 산재한 농촌과의 분리가 이루어진다.파농은 혁명주체로서 후자인 농민을 들고 있다.그는 농민들의 혁명역량과 의식의 건강성에 대해 과하다 할 정도의 믿음을 가지고 있다.농민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정치교육의 강화이다.농민을 비롯한 대중들이 자신들의 위치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현재의 억압을 뚫고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농촌으로 잠입한 투사나 지식인들이 그 단초 역할을 한다.하지만 파농은 그들의 역할에 과다한 짐을 싣지는 않는다.그들 역시 민중속에서 그들에게 동화되어 배워야한다고 말한다.

이 책이 탈식민논의의 초석이 된 것은 파농이 심리학자였다는것이 큰 역할을 한 듯하다.식민지의 구조와 경제체제만을 논의한 것이 아니라 식민지 인들이 갖게 되는 내적 식민화의 부분을 파농은 심각하게 우려하고 그 원인의 소재를 밝힌다.우선 식민화된 인간의 공격성에 대해 날카롭게 지적한다.인종주의적 이분법이 내재화된 이주민들은 원주민 통제를 위해 가공한 폭력을 일삼는다.식민지 사람들은 그들에게 이질감을 느끼면서도 원주민처럼 되길 꿈꾼다.하지만 이러한 꿈은 꿈일뿐 지속적으로 좌절을 겪게된다.내적 억압은 같은 억압을 받는 원주민을 향한 폭력으로 발산되는 양상을 보인다.특히 식민지 룸펜 프롤레타이아의 폭력은 주의를 요한다.혁명초기의 룸펜프롤레타리아의 폭력성을 어느방향으로 잡느냐에 따라 양날의 검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파농은 기본적으로 식민지체제의 폭력과 원주민의 대항폭력에 같은 가치를 부여한다.식민체제가 폭력적일 수록 대항하는 힘도 커지는 것은 당연하다.파농은 이 에너지가 혁명투쟁으로 전환되기를 꿈꾼다.각성된 민중의,민중을 위한,민중에 의한 무장혁명이다.폭력투쟁은 게릴라전 양상을 띄게 될 것이며 또 식민모국의 유화정책에 교란될 것이다.파농은 단호히 전체의 변화가 아니라면 타협은 없다라고 말한다.또한 식민모국의 이분법적 사고로 내적 식민화된 사람들의 인식 해방도 병행되어야 한다고 말한다.즉 검은 사람보다 더 검은 하얀피부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 또 그 반대도 항상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 세밀한 관찰을 요구한다.

파농이 궁극적으로 말하는 탈식민화는 식민상태에서 벗어나는 소극적 입장은 아니다.파농은 말한다.탈식민화는 언제나 폭력적인 현상일 수밖에 없다.탈식민화란 쉽게 말해서 어떤 '종의 인간이 다른 종'의 인간으로 바꾸는 것을 말한다.과도기 같은 것은 전혀 없고 오로지 전면적이고 완전하고 절대적인 대체만 가능하다.파농의 이러한 주장은 현체제에 적용하는것은 과격한 주장이란 비난을 받기 십상이다.파농의 60년대 알제리와 현재의 시대는 다른다.하지만 억압받는 소수국이 거대한 제국에 저항하며 생존권을 유지하기 위해 폭력에 의존하는 것 외에 또 다른 길이 쉬이 찾아지지는 않는다.물론 개량주의적 타협을 배제한다면 말이다.

우리 민족은 파농의 이야기에 정서적으로 닿는 부분이 생긴다.식민지를 겪었기때문이다.파농이 지적한 내적 탈식민화가 우리사회 제반 부분에 적용되는 것도 식민지 역사라는 토대가 있기때문이다.우리의 의식적 탈식민화는 일본제국주의의 억압대상자로서만 한정되지 않는다.신식민지상황 속에서 미국과 서구문명에 의존적인 역사 역시 내적 탈식민화의 영토가 된다. 또 등떠밀려나갔던 자의적으로 나갔다 미국의 세계전략 일원으로 참가했던 베트남전, 해외시장,국내등지에서 벌어지는에서의 경제적 착취문제등에도 자성해야만 한다.사르트르와 파농은 이렇게 자성의 목소리를 높인다.

"동포들이여 우리의 이름으로 온갖 범죄가 저질러 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것에 대해 한마디도 다른 사람에게 내뱉지 않는 것은 옳지 않다.법정에 서는 게 두렵다면 자신의 영혼에게라도 말해야 한다."

 "내 몸이여,나를 언제나 의문을 품는 사람으로 만들어주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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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드팀전 > 관계론으로 고전일기 그리고 딴지걸기
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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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은 지루하다는데 나는 동양고전에 관심이 많았다.몇자 안되는 글의 함축성이 좋았다.그 깊이를 다 알수는 없으나 넘겨짚은 이해로도 충분히 매력적이었다.거기에 어디가서 몇자 읊어주면 그럴싸 하게 보였다.대학들어가면서 당연히 그쪽 관련 수업을 찾아들었다.그래봤자 결국 교양수업 몇개 일 뿐이니 고전에 대한 나의 이해가  남들 보다 뛰어나다 말할 수는 없다. 대학가서 웃겼던 건 비슷한 고전강독을 서너차례들었다는 것이다.지금 그 강의 명들은 기억나지 않는다.대개 <동양 사상의 이해> <동양문화사><중국 정치의 이해> 뭐 이런 것들이었다.그런데 이 강의가 전부 신영복 교수의 <강의>에 나오는 것과 비슷한 커리큘럼으로 짜여진 수업들이었다.<동양사상의 이해>야 그렇다 치자.이름이 그럴싸 해서 들었던 <동양문화사>강의. 첫 시간 교수님은 "동양문화의 핵심은 중국이다.그리고 중국 사상의 근원이 형성된 곳은 춘추전국 시대 즉 제자백가의 시대이다."이런 말로 한 학기 강의의 개괄을 하셨다.그리고 한한기 동안 신영복 교수 <강의>의 목차와 유사한 수업이 진행되었다.더 웃긴건 <중국 정치의 이해>였다.나는 처음에 문화대혁명,모택동,주은래,등소평 ...뭐 이런 거 나오는지 알고 수업신청했다.그런데 왠 걸.또 첫 수업시간에 강사는 "이 강의는 사마천의 <사기>가 텍스트이다."라고 하는 것이다.그리고 한 학기 동안 춘추전국시대 이야기만 한참 했다.당연히 논어,맹자,한비자 이야기가 빠질리 없다.중간 고사는 서울대 출판부에서 나온 한자 많이 쓰여있는 <사기 열전> 독후감이었다.결국 비슷 비슷한 강의를 세차례나 들었던 것이다. 문제가 있다면 열심히 듣지 않았다는 것과 땡땡이가 많았다는 것.제대로 배웠다면 훨씬 좋은 리뷰를 쓸 수도 있었을 것을.공부도 다 때가 있는 법이다.

 

신영복 교수는 그의 학문적 깊이와 개인적 경험에서 뿜어져 나오는 인품 등으로 많은 사람에게 존경받는 분이다.<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처음 읽었을 때의 그 벅찬 감동과 충격은 아직도 남아있다.뿌연 안개같은 실타래를 시퍼런 칼로 두동강 내는 느낌이었다.나 스스로를 작게 만들고 또한 다시금 풀무질해야 한다는 강한 욕구를 느끼게 해주었던 글이다. 이 책 <강의>에서도 신영복 교수의 선명함은 드러난다.실천을 가장 우선시 하는 그의 현실적 세계관과 변혁을 위한 끝없는 자기성찰이 돋보인다.그는 단순한 어구풀이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그는 동양 고전을 우리의 현실과 새로 만들어야 할 세계에 이입 시킨다.현실과 끊임없이 대화하는 고전,바로 이책의 가장 큰 강점이다. 

 이 책에 나오는 제자백가의 사상을 하나 하나 따로 짚어 말할 바는 아닌 듯 하다. 동양 고전을 읽는 신영복 교수의 독법에 대한 부분이 더욱 중요하다.이 책은 단순한 강독이 아니기 때문이다.책 서문에서 신영복 교수는 분명히 자신의 독법을 밝히고 있다.그것은 '관계론'이다. 신 교수는 유가,도가,법가등 이곳에 등장하는 사상의 한 구절 구절을 인용하며 그것이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말하고 있음을 강조한다.'관계론'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 '존재론'이다.신영복 교수는 유럽 근대사의 구성원리가 '존재론'에 있다고 밝힌다.즉 존재론적 구성원리는 개별 존재의 실체성을 부여하고 그 개별 존재들이 사회안에서 이해관계를 조정하기 위해 합리와 이성에 기댄다는 것이다.반면 동양 사상의 근원은 '관계론'으로 규정한다.동양사상의 근원이 되는 고전들은 공통되게 인간성 함양을 목표로 하고 있다.또한 나와 타인,나와 자연,나와 사회라는 관계망을 대전제로 하는 철학인것이다.주역의 효를 예로 들어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효는 득위해야 좋은 것입니다.양효라고 해서 어떤 자리에 있거나 항상 양의 성질을 발휘하는 것은 아닙니다.개별적 존재에 대해서는 그것의 고유한 본질을 인정하지 않거나 그러한 개별적 본질을 인정하는 경우에도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깁니다.이는 동양적 전통에서 매우 자연스러운 생각입니다.

 주역 이외에도 저자는 논어,맹자,노자 그리고 불교의 연기론까지 거론하며 모든 것이 '망'이라는 관계를 다루고 있고 그 중요성에 대한 담론들임을 입증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관계론'에 대해 저자가 중요시하는 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가장 큰 문제 제기는 상품자본주의 사회에 있다고 하겠다.대개 소비자본주의라는 말을 쓰는데 비해 저자는 상품자본주의라는 말을 사용한다.이 상품 자본주의는 서구식 근대화를 의미한다.저자는 '관계론'이라는 동양의 가치관을 이용하여 서구 자본주의 근대화의 폐해를 풀어보고자 하는 것이다.

 

대개의 리뷰어들과 서평들이 신영복 교수의 글에 대해 딴지를 걸지 않고 있다.글의 내용과 그의 알려진 인품을 고려하면 쉽사리 딴지걸기가 쉽지 않다.나 역시 신영복 교수의  <강의>를 아주 재미있게 읽었기 때문에 굳이 비판적으로 보고 싶진 않다.하지만 그의 글을 읽으면서 무언가 꼬투리 잡고 싶은 마음도 생겼다.사실 내가 생각하는 바와 조금 다른 부분에 대한 궁금증이라고 보는게 나을성 싶다.

 

우선 언제가도 한번 말했지만 현재 한국적 상황에서 '관계론'강화라는 것에 대해 의문이 생긴다.우리사회는 관계의 그물망이  지나치게 촘촘하다.물론 여기서 말하는 관계가 신교수가 말하는 관계성의 인식과는 다른 차원일 것이다.그가 말하는 관계라는 것은 자연과 인간,인간과 인간의 거시적이고 형이상학적 관계성에 대한 이해를 뜻한다.그것이 속도와 소비로 집약되는 현대의 자본주의 폐해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있기때문이다.관계성의 회복을 통한 소외의 극복이라 볼 수 있다하지만 문제는 그 관계성의 회복이라는 것이 현실에서 어떠한 형태로 변형되는 가를 살피는 것이 또한 땅에서 하는 이야기가 된다는 것이다.우리 사회는 의식적인 면에서 전근대적 양상을 많이 따르고 있다.굳이 그것이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단 전근대적 보수성이 관계망의 형태를 띠고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양상을 띤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신영복 교수는 현재 우리사회의 개인들이 분자화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듯 하다.맞는 말이면서도 또 그렇지 않기도 하다.가장 분자화 되어있다고 보는 젊은 층을 예로 들어보자.그들이 제멋대로 인 것 같지만 대개는 보수적 가부장제 하에 종속화 되어 있다.과거에 비하면 많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의식의 전근대성은 여전하다.가족중심주의와 혈연중심주의가 그들 분자화되어 있는 개인에게도 내재화 되어있다.또한 사회를 나가보자.탁 까놓고 이야기해서 지방대 출신으로 아무리 능력좋아도 대기업 사장되기 힘들다.여러가지 기회의 차별도 있겠으나 우선 학연에서 밀릴 수 밖에 없다.그 학연이라는 것은 무었인가.관계망이다.부정적인 관계망이며 망국의 네트워크이다.그런데 그 내부에서는 상호이익이라는 원만한 인간관계가 형성된다.앞서서도 말했지만 신영복 교수의 관계망이 이러한 부정적인 상황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그는 늘 낙관적인 미래를 말하고 희망을 전파하기에 이러한 변질은 나의 우려이자 노파심일 수도 있다.

 

우리사회에서 개인은 약하고 집단은 힘이 세다.그래서 그런지 우리 사회의 개인은 혼자 있으면 다 바보가 된다.그러다가도 몇몇이 모이면 목소리가 커진다.우리 몇만 있으면 세상에 무서울게 없다는 식이 된다.통속적인 예는 길거리에서도 볼수 있다.조금 확대하면 이는 집단주의 정서와 곧바로 연결된다.신교수의 네트워크가 늘 낙관적인 방향으로 향하지는 않을 것이다.그렇다면 그것은 폐쇄적 집단주의 성향을 띤 관계망으로 발전되는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묵자의 예를 들어보자.이 책에서 묵가는 겸애와 반전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었다.현대적으로 말하자면 아나키스트적 공동체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거기에 계급적으로도 하층계급이 주를 이루었기에 괜히 민중적으로 보인다.그래서 그런지 어떤 분들은 묵가의 사상에 매력을 느낀다고 한다.묵가의 진보적 속성이 현재 벌어지는 우리사회의 이슈들과 맥을 같이하는 부분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하지만 간과하기 쉬운 몇몇 구절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이런 부분이다.

(묵가는) 실천의지를 추동하기 위한 장치로서 귀와 신의 존재를 상정하고...

 ...강고한 조직과 엄격한 규율을 가진 집단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묵가는 방어전을 펴기 위해 축성을 하고 방성기구를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종이에 부적을 써서 그걸 가지고 적을 이길 수도 있다고 믿었다.귀신의 존재를 실재적으로 믿고 있었다는 것이다.일부에서는 묵가를 일종의 사교집단으로 파악하는 경우도 있다.이것은 당대에도 비주류였고 유가전통에서도 어긋나기 때문에 후대가 탈색시킨 이야기라고 볼 수도 있다.그리고 그 시대적 상황에서 부적이니 귀신이니 하는게 가능한 이야기라고도 생각한다.동학 또한 그러한 신비주의가 있었으니 말이다.그렇다면 개인의 의지는 철저히 배재된 집단자살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살길이 있었으나 거자의 신념을 위해 묵가의 민중들은 생사여탈권 마저 넘긴 상태가 된 것이다.옛날에는 의를 지키기 위해 다 그랬다고 말할 수 있을까.지금보다 신념과 가치가 존중받았던 시대였으니 가능했을 수도 있다.즉 이러한 비판도 현시대적 관점이라는 것이다.하지만 한 개인의 생명은 그때나 지금이나 개인에게 가장 소중한 것임에 틀림없다.묵가의 사상은 분명이 현대에 돌아봐야할 여러 가치들을 제공해준다.하지만 묵가의 이러한 사교적 모습,또는 작은 병영사회적인 모습에 대해 저자는 그다지 알려주지 않는다.묵가라는 집단 관계망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개인의 희생은 별 의미가 없는 것인가.

 

또한 이 책은  강의의 편의상 그랬겠지만 너무 도식적 구조를 많이 따르고 있다.즉 이분법을 피한다고 하면서도< 서구=존재론=상품자본주의=부정의 대상/ 동양=관계론=화동의 사회=복원의 대상> 과 같은 대립구도를 시종일관 사용하고 있다.신영복 교수는 이를 당파성으로 설명한다.하지만 강의의 편의상이거나 또는 당파성의 필요에 의해서라 하더라도 이런 이분법적 대립각은 너무 용이한 길을 찾으려는 편의주의적  설명이라는 혐의를 받기 쉽다.

 

이렇게 딴지를 걸었지만 정당한 비판이라 보기 어려울 수 있다.앞에서도 말했지만 읽으면서 생겼던 몇 몇의 의문과 주관적인 감상을 옮겼기 때문이다.우리 사회에 더 급박하게 필요한게 무었인가를 두고 내 견해와 약간의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우리사회에 더 많은 '개인'이 필요하다고 본다.우리사회가 압축근대의 암호를 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사회 각 영역을 지배하는 것 역시 시스템이라기 보다는 전근대적 불합리성이 너무 많이 작용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또한 대다수 개인의 내면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역시 부정적 관계론의 그림자이지 싹수없는 개인의 존재감이 아니기 때문이다.물론 고전이 현대에 요구하는 것이 개인의 성찰이라는 측면에서 개인주의의 근원도 이러한 자기성찰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신영복 교수의 <강의>는 관계론이라는 틀(당파성)을 가지고 읽어낸 한 가지의 길일뿐이다.고전의 바다는 넓고도 넓다.퍼담아도 퍼담아도 마르지 않는 샘이라고도 한다.나 역시 한바가지 쯤 퍼 담고 싶은 바람은 있다.하지만 아직은 형편없이 부족하다.스스로의 길을 만들 수 있을 날은 올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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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드팀전 > 20t세기 피아니스트-1

지금부터 6년전 98년 월간 객석에 실린 기사입니다.지금이랑 조금변화는 있겠으나  큰 틀은 비슷하겠지요.^^  

 

윌간 ‘객석’은 창간 14주년을 맞이해 음악사상 ‘연주가의 세기’였던 20세기를 정리하는 연재 특집을 진행하고 있다. 지난 호의 ‘10인의 지휘자’에 이어 이번 호에는 ‘10인의 피아니스트’를 선정해 발표한다. 이 기사에 소개될 ‘20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 10인’은 지난 호와는 조금 다른 구성의 선정위원단에 의해 선정되었다. ‘피아니스트’라는 점이 고려되어 우리나라의 원로와 중견, 그리고 신예급의 평론가와 칼럼니스트들과 함께 역시 원로급과 중견급, 그리고 신예를 망라하는 피아니스트들이 선정위원에 참여했다.

선정위원은 김주영, 유윤종, 유형종, 강충모, 이영록, 김범수, 최갑주, 박승민, 김길영, 박은희, 임화섭, 이성일, 김상현, 우광혁, 송영택, 류태형, 김방현, 이재준,신민자, 이혜경, 김용배, 김영호, 김대진, 이순열, 선병철, 박제성, 박성수, 서동진, 김정순, 윤정열, 신수정(응답순서) 등 모두 31명이었다.

역시 복수 투표와 점수제 투표를 혼합한 방식으로 투표를 진행한 결과 고득점 순으로 1위부터 30위까지가 1.호로비츠 2.리히테르 3. 아르투르 루빈슈타인 4.박하우스 5.길렐스 6.브렌델 7.미켈란젤리 8. 폴리니 9.아르헤리치 10.굴드 11.켐프 12.슈나벨 13.코르토 14.하스킬 15.리파티 16.기제킹 17.아슈케나지 18.페라이어 19.아라우 20. 라흐마니노프 21.루돌프 제르킨 22.피셔 23.프랑수아 24.쉬프 25. 체르카스키 26.루프 27.백건우 28.무어 29.베르만 30.나트, 데 라로차 (동률)의 순으로 나타났다. 간발의 차로 여기에 들지 못한 피아니스트는 굴다, 솔로몬, 크라우스, 바렌보임, 코바체비치 등이다.

결과를 살펴보면 최근 10년 사이에 세상을 떠난 호로비츠, 리히테르, 미켈란젤리, 켐프, 아라우, 제르킨, 체르카스키 등이 비교적 높은 평가를 받은 것으로 나타난 것이 특징적이다. 지난 호의 ‘지휘자’의 선정결과와 가장 큰 차이점은 현존하는 피아니스트들 중에 브렌델, 폴리니, 아르헤리치 등 3명이 ‘10인’ 안에 들었고, 여성 피아니스트들 중에서도 아르헤리치, 하스킬, 데 라로차, 릴리 크라우스 등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는 점이다. 켐프, 슈나벨, 코르토, 하스킬 등은 아쉽게도 아주 근소한 차로 ‘10인’ 안에 들지 못했다. 그밖에 선정과정에서의 특기할 만한 사항은 각각의 피아니스트를 소개하는 본문기사에 소개한다.

참고로 ‘객석’ 1989년 6월호에 소개된 특집기사(pp.75∼81) ‘한국 피아니스트 100인이 선정한 현존 명피아니스트 10인’에서의 순위는 1. 폴리니 2.호로비츠 3.아슈케나지 4.브렌델 5.아라우 6.데 라로차 7. 페라이어 8.아르헤리치 9.켐프 10.침머만 11.부닌, 미켈란젤리 13. 리히테르, 헤블러 15.루돌프 제르킨 16.백건우 17.바두라 스코다, 베르만 18.루프의 순서였다. 물론 각각 ‘현존’과 ‘20세기 총망라’로서 두 기사의 선정 기준이 다르긴 해도, 지난 9년 사이에 세상을 떠난 피아니스트들이 상당수 되고, 또 언급되는 피아니스트들도 순위 차이만 있을 뿐 상당 부분 겹치고 있어 당시와 지금의 선호도의 변화를 살핀다는 의미로서 두 기사를 비교해 보는 것은 상당히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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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드팀전 > 20세기 피아니스트 -2

20세기를 빛낸 10인의 피아니스트

1. 블라디미르 호로비츠(1904∼1989)

20세기의 대지휘자들은 ‘카리스마’라는 단어로 특징지어질 수 있었다. 20세기의 위대한 피아니스트들은 어떨까. 섬세, 예민, 선병질적, 신경질적, 신경과민, 까다로움, 변덕, 자존심, 만, 고집불통 등의 단어들이 유난히 쉽게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이는 19세기 낭만주의 예술가들이 보여준 특성들과 거의 고스란히 일치한다. 쇼팽과 리스트를 떠올리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호로비츠를 보라! 마치 느긋하고 따뜻한 성품의 소유자인 듯 보이는 말년의 사진에 익숙해진 이들에게는 이런 말들이 이해되기 힘들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분명히 까다로웠다!

호로비츠는 ‘피아니스트는 자신의 악기를 가지고 다니지 않는 유일한 연주가’라는 명제를 뒤집었다. ‘지휘자들마저 자신의 악기인 오케스트라를 대동하고 다니는데, 피아니스트는 왜 안되지?’라는 그의 순간적인 의문은 ‘점보 747을 타고 하늘을 나는 피아노’를 만들어냈다. 전속 요리사와 정수기도 연주회에 꼭 따라다녔다.

그렇지만 그의 연주를 듣는 사람들은 그 ‘까다로움’에 항상 감사해야 했다. 완벽한 테크닉과 무궁무진한 표현력을 바탕으로 철저히 주관에 입각해 빚어낸 호로비츠의 개성적인 피아니즘 역시 보통의 예민함과 보통의 감수성으로는 빚어지지 않는 위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공화국의 수도 키에프에서 탄생할 당시 그의 이름은 블라디미르 고로비츠였다. 아버지는 기술자였고, 어머니와 누이는 피아니스트였으며 동생은 바이올린을 했다. 피아노도 처음에는 어머니에게서 배우기 시작했다. 안톤 루빈슈타인의 제자였던 또 하나의 위대한 피아니스트인 펠릭스 블루멘펠트에게서 배운 것이야말로 호로비츠를 러시아 피아니즘 전통의 적자이자 20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만든 시작이었다.

18세의 나이에 가진 데뷔 연주회의 성공으로 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했고, 1925년, 21세의 나이에 서유럽으로 건너가, 이듬해 함부르크에서 가진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의 대성공으로 명성을 확고히 했다. 28년, 뉴욕 필과 역시 차이코프스키 1번을 협연하며 이루어낸 카네기홀 데뷔 또한 그에게 성공을 안겼다.

이렇게 가는 곳마다 성공만 한 피아니스트가 또 있을까. 33년, 토스카니니의 뉴욕 필과의 베토벤 시리즈는 성공과 함께 토스카니니의 딸 완다를 그의 품에 안겼다. ‘토스카니니의 사위’는 또 하나의 막강한 권력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36년, 불과 32세의 나이로 그는 은퇴를 선언했다. 1939년 무대에 복귀한 그는 20년이 채 흐르기 전인 53년, 다시 은퇴한다. 왜 이렇게 자주 은퇴와 복귀를 거듭한 것일까. 역시 그의 까다로운 성품 탓으로 돌릴 수밖에 없다.

1965년, 지금은 ‘역사적 귀환’이라 기억되는 연주회를 카네기 홀에서 열었다. 이후 그가 남긴 역사적 연주회는 78년 백악관에서의 ‘미국 데뷔 50주년’ 연주회, 86년 모스크바와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의 ‘61년 만의 귀향 연주회’ 87년 베를린에서의 ‘최후의 연주회’ 등이다. 89년 심장발작으로 사망, 밀라노에 있는 토스카니니의 무덤 옆에 묻혔다.

150여 장에 이르는 방대한 음반을 남긴 호로비츠. 그중에서 ‘이것이 그의 명반이다’라고 꼬집어 내기 무척 힘들다. RCA 레이블의 호로비츠 전집은 그의 예술혼을 엿보는 데 가장 큰 도움을 주는 것이다. 이밖에도 ‘역사적 귀환’ 실황녹음(소니), 최만년의 도이치 그라모폰의 소품 위주의 녹음 등도 새겨들을 만한 음반들이다.


2.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테르(1915∼1997)

리히테르의 연주에서도 간혹 섬세함과 신경질적인 면이 내비치기는 한다. 만년에 이르러 그의 연주가 느려지고 무뎌졌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내면의 사유에 충실해지기는 했지만. 그러나 그를 들어 까다롭다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완벽한 기교와 강력한 연주력이 언뜻 그런 느낌을 줄 수도 있었겠지만, 오히려 작곡가와 청중들 사이의 영적 교류를 가능케 하는 음악의 구도자 같은 이미지로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굴드는 ‘리스트’ 타입과 ‘리히테르’ 타입의 두 부류로 연주가를 분류한 적이 있다. 단순히 말해 이는 악마적인 기교파냐 진중한 사유파냐, 또는 외향적이냐 내향적이냐 하는 분류였다. 다시 말해 리히테르는 중용과 절제를 통해 음악의 본질을 꿰뚫는 연주를 들려준 모범적인 연주가의 전형이라는 얘기다.

역시 리스트가 시작한 ‘암보로 연주하기’의 관행에 대해 철저히 반대했던 이가 리히테르였다. 그래서 그의 연주회에는 피아노 악보대에 항상 악보가 놓여 있었고, 그의 옆자리에는 그것을 넘기는 보조자가 있었다. 그리고 청중들이 연주가의 모습에 현혹되어 음악을 파악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무대 위의 조명을 최소화했다. 따라서 피아노 바로 위에 작은 조명을 켜놓고 연주하던 리히테르였다. 이도 또한 리스트가 시작한 ‘왕자 연주가’의 전통을 거부한 것이었다. 최근의 많은 연주가들은 그의 이러한 합리적인 태도에 대해 존경과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그가 겪은 가족사의 질곡도 만만찮다. 그 질곡은 그의 아버지의 비극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폴란드계 독일인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빈 음악원에서 공부한 피아니스트였다. 하지만 결투로써 법을 어기고 도망자의 몸으로 우크라이나로 흘러들었다. 그리고 제자였던 어머니와의 사이에서 리히테르를 낳았다. 그의 아버지는 제2차 세계대전중에 독일계라는 이유만으로 체포되어 피살당한다. 리히테르가 불과 26세 되던 1941년의 일이었다. 리히테르는 이 당시 모스크바 음악원에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와의 연락도 끊겼다. 전쟁이 끝난 후 소련 당국은 리히테르에게 어머니가 사망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그녀는 후퇴하는 독일군을 따라 독일로 망명했던 것이고, 우연히 라디오를 통해 리히테르의 연주를 들은 어머니가 그에게 연락해 이들은 서로의 생존을 확인했다. 리히테르가 철의 장막 밖으로 나온 1960년에야 20여년 만의 모자상봉이 이루어졌고, 3년 뒤 그의 어머니는 숨을 거두었다.

피아니스트로서 리히테르를 ‘대기만성형’이라 보는 시각도 있는데, 이는 분명 잘못된 것이다. 22세의 나이에 네이가우스의 문하에 들어가 정식으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지만 어린시절의 그의 천재성도 만만찮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오래도록 네이가우스의 문하에 남아 있었던 것은 이 위대한 스승이 그의 큰 그릇을 알아보고 유달리 아꼈기 때문이다. 실제로 네이가우스는 프로코피예프에게 리히테르를 소개했고, 리히테르는 1940년, 25세의 나이로 프로코피예프의 피아노 소나타 6번을 초연했다. 이 어려운 소나타의 초연을 선뜻 맡긴 것은 리히테르가 당시 이미 완성된 피아니스트였다는 점을 증명한다.

그가 늦게 시작했다는 시각은 첫째 서너 살만 되면 피아노 앞에 앉히는 20세기의 잘못된 음악교육관행 때문에, 둘째 그가 40이 넘도록 철의 장막 뒤에 가려진 채 숨은 공력을 쌓았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그가 서방세계에 알려진 순간부터 그야말로 원자폭탄을 떨어뜨린 듯한 파장을 퍼뜨린 것이 이를 증명한다.

말년에 필립스 레이블을 통해 발표한 리히테르 에디션과 최근 BMG를 통해 국내에도 소개된 멜로디아의 리히테르 에디션(12CD) 등이 그의 연주예술을 이해하는 지름길을 제공한다.


3. 아르투르 루빈슈타인(1887∼1982)

'그의 경이적인 신통력에 감탄하고, 시(詩)를 사는 생활인임을 실감했다.’ 루빈슈타인의 1966년의 내한 연주에 대해 이강숙이 남겼던 감탄어린 평이다. 당시 루빈슈타인은 79세였다(그의 생년이 1886년이라는 설과 1889년이라는 설, 그리고 1890년이라는 설도 있으나 여기서는 1887년이라는 가장 유력한 설을 기준으로 잡았다). 어쨌든 그로부터 10년 뒤인 1979년에야 비로소 그는 연주무대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그리고 90세를 넘기며 장수했다.

낭만주의 시대의 끝자락에 걸쳐 있는 그를 흔히 ‘마지막 낭만주의자’라고 칭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하지만 80세가 넘어서의 귀족같이 여유로운 생활에서 낭만주의의 이미지를 끌어내서는 안될 것이다. 폴란드에서 태어난 그는 역시 쇼팽의 이미지로서 기억된다. 하지만 그가 지녔던 딜레마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아주 어릴 적부터 두각을 나타낸 그는 20세기 초의 신동 연주가였다. 비정상적으로 빠른 템포나 화려한 기교를 내세운 그는 미소년적인 수려한 용모와 세련된 무대매너로서 더욱 열광적인 청중의 반응을 얻어낼 수 있었다. 가는 곳마다 청중들의 환호와 찬사가 이어졌지만 비평가들은 냉담했다. 그는 사실 불성실하게도 너무나 많은 음을 빠뜨렸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모르는 청중들은 겉치레만 잘하면 속아넘어갔다. 이것은 루빈슈타인 자신도 느끼는 딜레마였다.

‘불완전한 쇼팽, 불완전한 리스트’로서의 딜레마.

20대까지 이런 연주를 계속하던 그는 30대를 넘기면서 기교를 갈고 닦는 데 전념했다. 그리고 이런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것은 그의 연주생활의 중기로 분류되는 1937년, 그의 나이 50세가 가까워서이다. 이로부터 절정기를 구가하는 그는 1957년, 70세에 이를 때까지 정력적인 활동을 펼친다. 이를 중기로 분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진정한 대기만성형의 연주가는 루빈슈타인인 셈이다.

70세가 넘어서 그의 연주는 화려한 기교에 더 이상 집착할 수 없었다. 다시 낭만주의를 회상하게 된 그의 연주에서는 기름기가 빠졌다. 위에서 언급된 대로 몽롱하고 환상적인 낭만주의 시대의 마법과 시정으로 돌아가 섬세한 감정의 진동을 표현하려 했다. 그러나 이미 많이 노쇄해 표현력이 감퇴되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청중들은 그가 전달하는 이미지만으로도 그러한 것들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연주는 주로 RCA 레이블의 음반을 통해서 들을 수 있다. 역시 쇼팽이 레퍼토리의 중심을 이룬다. 생상스의 피아노 협주곡 2번과, 슈만의 크라이슬레리아나, 그리고 라인스도르프가 지휘한 차이코프스키와 그리그의 협주곡 등도 유명한 음반.


4. 빌헬름 박하우스(1884∼1969)

박하우스가 ‘건반 위의 사자’로 통했다는 것은 유명한 얘기다. 하지만 좀 어색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우리가 기억하는 박하우스의 모습은 주로 만년의 높은 정신성을 담은 구축적이고 균형잡힌 음악에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젊은 시절의 사진을 보라! ‘독일산 사자’라는 별명은 그의 젊은 시절을 두고 일컫기에 알맞다. 외모도 외모려니와 그는 젊은 시절, 독일 피아니스트로는 드물게 화려한 기교와 강렬한 힘으로 각광을 받았다.

19세기 이후 피아노의 비르투오소는 동유럽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이는 독일 작곡가들이 현란한 기교의 과시보다는 음악의 구축미를 중시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기교파 박하우스의 등장은 20세기 초의 독일에서는 상당한 화젯거리였다.

라이프치히에서 정통 독일계 혈통을 이어받아 태어난 그는 7세 때인 1891년 라이프치히 음악원에 들어가 음악을 배우기 시작했다. 10대 중반의 이른 나이로 음악원을 졸업한 그는 1899년부터 당시 큰 스케일과 구축력으로 유명했던 위대한 피아니스트 오이겐 달베르트를 사사하게 되었다. 그에게서 베토벤에 대한 해석을 물려받게 되었는데, 이는 그가 훗날 ‘기교파 박하우스’가 아닌 ‘예술가 박하우스’로 완성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00년 16세의 나이로 런던에 데뷔했고, 이듬해 아르투르 니키쉬 지휘의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며 20세기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리고 피아노를 포효하게 하는 연주를 선보이며 유럽 각지를 누볐다. 그는 만년이라 할 수 있는 1950년대 이후에는 녹음에 집착해 데카 레이블에 많은 녹음을 남겼는데, 이는 독일음악 팬들에게는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가 남긴 음반들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과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집의 녹음일 것이다. 한스 슈미트 이세르슈테트가 지휘하는 빈 필하모닉과의 연주로 50년대에 녹음된 이 전집 중에는 역시 1959년 녹음된 5번 ‘황제’가 가장 유명하다. 피아노 소나타 전집은 1950년대 초부터 그가 세상을 떠난 1969년까지 녹음된 것이다. 칼 뵘이 지휘하는 빈 필하모닉과의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2번은 위대한 명반 중의 하나로 꼽히는 것이다.


5. 에밀 길렐스(1916∼1985)

네이가우스 문하의 두 피아니스트, 리히테르와 길렐스가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높이 평가받는다는 것은 역시 그 스승의 영광이기도 하면서 러시아 피아니즘의 영광이기도 할 것이다.

길렐스는 리히테르보다 한 해 늦게 우크라이나의 오데사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발군의 기량을 선보여 17세 때인 1933년, 전 소비에트 콩쿠르에서 1위를 차지했다. 그때까지 길렐스는 천부적인 재능과 손가락의 힘과 테크닉을 향상시키는 철저한 훈련이 합일점을 이루어 탄생한 사회주의 예능 교육의 성공작으로서 인식되고 있었다. 만일 거기에 머물렀으면 연주기계로 전락하는 비극이 일어날 수도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다행히 네이가우스를 만났다. 1935년부터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그에게 배우게 된 것이다. 게다가 구소련이 자랑스럽게 내놓는 강철 같은 타건과 테크닉을 지닌 청년 피아니스트의 자격으로 서방세계의 콩쿠르에도 나갈 기회가 주어졌다.

그래서 그는 정책적으로 서방에 소개되기 시작했고, 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구도의 형성으로 ‘철의 장막’이 쳐진 이후에도 한동안 유일하게 서방을 오가며 연주를 할 수 있는 구소련의 연주가였다.

1954년의 파리공연과 55년의 미국 데뷔 공연은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불러일으켰고, 이후 길렐스에 이름에는 ‘강철 터치’라는 상표가 따라붙게 되었다. 하지만 길렐스의 예술성을 설명하는 데 이런 상표는 오히려 해가 되는 것이었다. 과연 길렐스가 가진 것이 육중한 체구와 두터운 손, 막강한 손가락 힘에서 뿜어나오는 폭발과도 같은 터치와 오케스트라마저 압도해 버릴 듯한 소리의 중량감뿐일 것인가.

오히려 길렐스는 섬세한 신경과 따뜻한 인품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리고 블루멘펠트의 조카이자 고도프스키의 제자였던 스승 네이가우스의 영향으로 고전적인 정신의 계승자로서의 면모가 두드러졌다. 따라서 그의 연주에서는 정연한 질서와 견고하게 쌓아올리는 구축력이 두드러졌고, 따라서 그가 모차르트와 스카를라티를 연주해도 베토벤의 음악을 듣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70년대에 오이겐 요훔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과 녹음한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1번, 2번(DG)과 80년대 들어 죽음 직전까지 녹음한 베토벤의 소나타들(DG)은 귀중한 유산으로 남았다. 한편 최근에 BMG를 통해 국내에도 소개된 멜로디아 레이블의 ‘길렐스 에디션’은 60년대에서 80년대까지의 다양한 레퍼토리를 소개하고 있어서 좀더 다양한 측면에서 길렐스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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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드팀전 > 20세기 피아니스트-3

6. 알프레드 브렌델(1931∼ )

브렌델이야말로 20세기의 피아니스트들 가운데서 가장 특이한 존재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유난히 개성이 강하고, 신경질적이고, 까다로워서 그렇다는 얘기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라서 그렇다. 언제 그렇게 되었는지도 모르게 소리 소문 없이 조용히 20세기를 대표하는 피아니스트의 자리까지 올라와 있는 것이다. 하지만 누구도 그를 무시하지 못한다. 그는 어떻게 보면 공기와 같이 원래부터 ‘그저 그냥 있는’ 존재같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다른 연주가들의 떠들썩함에 비한다면 말이다.

그의 연주도 그렇다. 다른 연주가들처럼 자신의 개성을 담아내기 위해 노력한 흔적은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무색 무미 무취의 연주라 할 수 있다. 다른 요소들을 다 배제하고 ‘남은 것은 그저 음악’인 셈이다. 무엇이 그의 연주를 그렇게 인식하도록 만드는 것일까?

그는 작품의 전체적인 구도를 읽어내는 탁월한 혜안을 가졌다. 따라서 다른 요소들을 많이 집어넣지 않고도 그저 구도를 잡아나가는 것에 의해서만 작품의 의미를 청중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표현해 내는 슈베르트와 베토벤은 다른 그 누구의 연주보다 강한 설득력을 지니게 된다.

그렇다고 그가 전혀 노력 없이 직관에 의해서만 그렇게 된 ‘신적인 천재’라는 얘기는 아니다. 브렌델 자신이 고백하길 자신은 절대로 신동이 아니었다 한다. 과거 체코 땅이었던 모라비아에서 태어나 17세 되던 1948년 첫 연주회를 열었다. 하지만 그리 주목을 끌지는 못했다. 에트빈 피셔라는 위대한 피아니스트를 스승으로 둔 것만은 커다란 행운이었다. 그는 독일-오스트리아계의 정통 피아니스트가 될 자질을 전부 그에게서 물려받았다. 1949년 부조니 콩쿠르에 입상한 경력은 그가 기교적인 측면에서 다른 피아니스트에 절대 뒤지지 않는다는 사실만을 증명할 뿐이다.

빈에 거주하다 런던으로 옮겨 소리 소문 없이, 하지만 알차고 꾸준히 활동을 전개해온 브렌델. 그는 계속해서 연구하며 저술활동도 펼치는 학구적인 면모도 보였다. 그의 성실성만은 연주에 아주 쉽게 반영되는 듯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꾸준한 레코딩을 펼쳐왔다.

이미 그가 필립스에 남긴 녹음들은 상당수가 된다. 베토벤의 소나타와 슈베르트의 소나타가 역시 대표적인 레퍼토리.


7. 아르투르 베네데티 미켈란젤리(1920∼1995)

기인적인 생활을 하다 지난 95년, 마침내 우리 곁을 떠난 또 한 사람의 괴팍한 피아니스트 미켈란젤리. 그는 20세기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피아니스트 중 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1939년 제네바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할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코르토로부터 ‘리스트의 재래’라 불릴 정도로 젊은 시절부터 테크닉과 카리스마를 자랑했던 그는 다재다능하긴 했으나 좀처럼 굽힐 줄 모르는 곧은 성격으로 좌충우돌하기 일쑤였다. 그리고 나서는 생각보다 여리고 섬세한 성격으로 결국 자신이 상처를 받는 결과를 낳았다.

마음에 드는 제자라면 돈 한 푼 안 받고 오히려 생활을 돌봐줘가며 데리고 있던 진정한 예술가적 기질의 소유자. 그도 역시 자신의 피아노를 연주에 끌고 다녔고, 별별 기행으로 가는 곳마다 화제를 뿌리고 다녔다. 그의 행적을 보면 ‘저게 과연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희한하기 그지없다. 카레이서이자, 의사이기도 했던, 마치 폭발하기 일보 직전의 시한폭탄 같았던 그다.

제2차 세계대전에 공군 조종사로 참전했다가 독일군에 생포된 그는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하기도 했다. 음악가로서는 상상하기조차 힘든 ‘경력 아닌 경력’이다. 전쟁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세계무대에서 각광받기 시작한 그는 조금만 기분이 좋지 않아도 연주회를 취소시키기 일쑤였다. 그리고 자신이 계약했던 음반사의 파산으로 경제적 책임을 지게 되자 조국 이탈리아를 가차없이 떠났고, 이후 이탈리아 사람들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제대로 된 소리를 재생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레코딩은 극도로 기피했던 그에게 내릴 수 있는 판결은 ‘완벽주의자이자 천재’밖에는 없을 것이다. 미켈란젤리는 가정용도 아닌 콘서트용 피아노를 분해했다가 다시 조립할 정도로 피아노의 물리적인 특성을 속속들이 잘알고 있었다. 또 피아노를 자신의 몸처럼 다루며 연주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믿기지 않는 제어능력으로 초절적인 기교를 자아냈고, 페달링에도 통달해 있어 자신이 원하는 음향을 마음대로 빚어냈던 마술사이기도 했다. 역시 그런 특성에 딱 들어맞는 레퍼토리가 그가 남긴 가장 훌륭한 음반이다. 도이치 그라모폰 레이블로 발매된 드뷔시의 전주곡 1집과 2집, 영상 1, 2집과 ‘어린이 차지’가 그것. 이 음반을 들으면 드뷔시를 한 번도 듣지 못했던 사람도 드뷔시가 미켈란젤리의 몸을 빌려 그리는 ‘인상주의적인 음화(音畵)’의 마력에 빨려들고 만다. TV 방송용으로 녹음된 줄리니 지휘의 빈 심포니와의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음반(DG) 중에 3번과, 5번 등도 유명하다.


8. 마우리치오 폴리니(1942∼ )

미켈란젤리에 이어 폴리니와 아르헤리치가 선정되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폴리니는 미켈란젤리에게 고작 6개월간 배웠으나 가장 큰 영향을 받은 피아니스트이자 가장 존경하는 예술가로 꼽는다. 아르헤리치도 미켈란젤리에게서 배운 적이 있다. 미켈란젤리는 세상을 떠났고, 폴리니와 아르헤리치도 나름대로의 예술세계를 찾아 비상하고 있는 중이지만, 이들이 후대에 하나의 유파로 묶여 분류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물론 지금 보기엔 이들의 공통점은 예민함밖에는 없어 보이지만. 예술이라는 마법의 세계에서 스승과 제자의 얘기는 신비로움을 더하는 면이 있다.

폴리니라는 이름을 들으면 많은 사람들이 1960년 쇼팽 콩쿠르에서의 심사위원 만장일치 우승이라는 경력과 함께 거기에 딸린 유명한 일화들을 떠올릴 것이다. 당시 심사위원장이던 아르투르 루빈슈타인이 ‘우리 심사위원들 중에 과연 누가 폴리니만큼 연주할 수 있겠는가?’ 하며 감탄했다는 것과, 협주곡이 끝난 후 한 심사위원이 ‘그는 음표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며 한숨을 쉬었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이어지는 또 하나의 유명한 일화는 폴리니가 콩쿠르 우승 후 곧 바로 잠적했다가 약 10년이 흐른 후에 무대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그 사이 자신의 부족함을 보충하기 위해 공부에 매진했다는 일설도 있지만, 이는 분명 잘못 알려진 사실이다.

폴리니는 쇼팽 콩쿠르 우승 후 약 1년간 꽉찬 일정으로 순회 연주회를 가졌고, 다시 1년간은 휴식을 취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후 5년간 많지는 않았지만 규칙적으로 연주회를 열었고, 1968년부터 본격적으로 연주회 수를 늘려가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이탈리아의 밀라노에서 건축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아르헤리치와의 묘한 인연을 갖고 있다. 그보다 한 해 먼저 태어난 아르헤리치가 1957년 제네바 콩쿠르에서 우승할 당시 폴리니는 2위를 차지했다. 다음해 폴리니는 제네바 콩쿠르에 재차 도전해 1위 없는 2위를 차지했다. 쇼팽 콩쿠르에서의 우승은 폴리니가 먼저 따냈다. 다음회인 1965년의 쇼팽 콩쿠르에서는 아르헤리치가 우승했다. 이는 두사람이 그 세대를 대표하는 걸출한 연주가였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의 연주 스타일을 한마디로 잘 깎여진 다이아몬드에 비교하기도 한다. 그만큼 완벽하게 다듬어진 치밀함과 빈틈없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피아니스트 김용배는 그의 연주에 대해 ‘기교가 기교로 느껴지지 않는다. 피나는 노력이 전혀 없이 얻어진 듯한, 즉 선천적으로 그저 타고난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그 엄청난 기교가 그의 몸에 융해되어 있었다’고 평했다.

그런 폴리니가 최근 들어 많이 유해졌다는 평가가 많이 나오고 있다. 전에는 맑고 투명하기 그지없어 순수한 얼음같이 차가웠던 연주를 들려주던 그가 천부적 기교의 바탕 위에 인간적인 면모를 쌓아가는 법을 터득했다는 얘기다.

그의 음반으로 손꼽히는 것은 역시 쇼팽의 녹음들이다. 하지만 그의 레코딩에서의 관심도 워낙 넓은 편이어서 현대곡에서 그의 진정한 면모를 찾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9. 마르타 아르헤리치 (1941∼ )

아르헤리치는 94년, 기돈 크레머와의 내한 연주회에서 피아노 현을 끊어뜨리는 ‘시범 아닌 시범’으로 가공할 만한 파워와 타건의 집중력을 한국 팬들에게 확인시켜준 바 있다. 그는 20세기 후반을 풍미한 명 피아니스트임에 틀림없다. 그를 특별히 ‘여류’라는 꼬리표를 달아 따로 분류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의 연주는 남녀를 통틀어도 스케일이 크고 힘차며 역동적인 편에 속한다. 그렇다고 섬세한 시정의 표현에 약하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특히 아르헤리치를 들어 제멋대로이고 변덕이 심하며 신경질적인 피아니스트라 할 수도 없다. 그녀가 여성이라 그렇다는 얘기는 아예 입 밖으로 내지 않는 편이 좋다. 남성 피아니스트들은 더욱 심하지 않은가! 물론 그가 연주회 취소를 밥먹듯 해오긴 했지만. 최근에는 실내악 연주가 많은 편이라 훨씬 덜하다는 얘기다. 그는 자신이 신뢰하는 파트너와의 연주는 취소하는 경우가 드물다.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태어나 여덟 살 때인 1949년에 데뷔했으니 그의 연주인생도 올해로 반백년인 셈이다. 16세 때인 1957년에는 3주 간격으로 열린 부조니 콩쿠르와 제네바 콩쿠르에서 연속 우승하면서 스타덤에 오른다. 하지만 그는 그 때문에 혹사당하기 시작했다. 그후 해마다 150회나 되는 협연은 그를 신경쇠약 직전으로 몰고 갔고 급기야 일단 후퇴해서 휴식기에 들어간다.

1961년부터 그는 미켈란젤리에게 배웠다. 너무나 열정적이고 외향적인 그녀의 스타일이 마음에 안 들어서일까? 아니면 정말 무리한 연주로 감각을 잃은 탓일까? 미켈란젤리는 그녀에게 ‘피아노를 그만두라’는 선고를 내렸다. 어쨌든 그 처방은 들어맞아 그녀는 재차 휴식기를 거친 뒤 1965년의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화려하게 재기했다.

그리고 한동안 뒤도 안 돌아보고 질주하던 아르헤리치는 83년에야 멈춰섰다. 그리고 그녀는 실내악으로 연주의 초점을 돌렸다. 마이스키, 기돈 크레머, 그리고 마음맞는 음악친구들과의 공동작업이 역시 성공을 거두며 나타났다. 프로코피예프 바이올린 소나타(DG)는 그중 대표적인 명반으로 손꼽힌다.

그의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녹음은 모두 3종이 있다. 그중에서 가장 최근의 것인 아바도 지휘의 베를린 필과의 것(DG, 1994년)이 좋으냐 키릴 콘드라신 지휘의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과의 것 (필립스, 1980년)이 좋으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역시 아바도와의 프로코피예프 협주곡 3번과 라벨 협주곡(DG)이나 라벨의 ‘밤의 가스파르’와 ‘소나티네’(DG)도 유명하다.


10. 글렌 굴드(1932∼1982)

굴드에 대해서는 의견이 크게 엇갈렸다. 너무 주관적이고 독특한 스타일, 그리고 한정된 레퍼토리라는 점에서 그를 20세기를 대표하는 피아니스트로 보기 힘들다는 의견이 있었는가 하면, 그래도 그가 20세기 후반의 모든 음악인들에 미친 지대한 영향도 있고, 주관적이라 하더라도 피아노를 ‘너무나 잘 치는’ 연주가이므로 20세기를 대표하는 피아니스트의 대열에 꼭 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굴드에 대해선 ‘신경쇠약 직전’이라고 표현하기가 오히려 어색하다. ‘신경쇠약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이토록 섬세하고 연약하고 깨지기 쉬운 영혼이 또 있었을까. 그는 진정으로 미쳤었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영혼이 음악의 심오한 본질에까지 미쳤다’라고 다시 표현하면 어떨까.

그의 죽음은 어땠는가. 그는 너무 자주 신경증적인 ‘가짜 통증’을 호소했다. 그래서 정작 치명적인 ‘진짜 통증’이 왔을 때 의사는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그는 죽음을 맞이하게 됐다. ‘거짓말쟁이 소년과 늑대’라기 보다 ‘가녀린 영혼과 죽음’에 가까운, 너무나 아까운 죽음이었다.

굴드가 그토록 기인처럼 보였던 이유도 이제는 너무나 명백하다. 그는 그야말로 진정한 예술가였고 순수한 사람이었다. 진정한 예술의 구현을 위해서 주변의 모든 조건들은 가장 적합한 상태로 준비되어 있어야 했지만 그 어느 것도 굴드의 마음에 드는 것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학대하고 희생해 준비한 것으로 진정한 예술을 들려준 것이다.

그의 연주는 기계적인 정확성과 제어능력을 바탕으로 한 기교의 바탕 위에 섰다. 그리고 성부간의 우열이 없다. 바흐에서처럼 다른 곡들도 각 성부가 평등하게 대화하도록 하는 것이 그의 목표였는지 모른다. 그에 따라 모차르트의 소나타 연주(소니)와 같은 결과를 빚어내기도 했다.

굴드의 최종 목표는 바흐가 항상 그랬듯이 푸가였다. 그의 음반을 말하자면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소니)만을 얘기하고 넘어갈 수는 없다. 굴드의 바흐 연주는 모두 굴드가 자신을 희생해서 준비한 위대한 예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은, 예술의 구현을 위해 신경쇠약에 걸리는 사람들이 있는 한, 언제까지나 행복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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