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드팀전 > 베르베르감독 '환상특급' 연출하다
나무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뫼비우스 그림 / 열린책들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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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주변에 베르베르 책이면 모두 사보는 사람이 있다.그에 대한 칭찬에 입이 마를 줄 모른다.몇년전 베르베르의 <상대적이며..>를 읽은 이후 별 관심을 두지 않았던 나로써는 낯선 느낌이었다.물론 그의 노작들을 읽지 않은 상황이었으니 그이의 칭찬에 왈가왈부할 수 없었다.그래서 베르베르의 <나무>가 나왔을 때 고민하지 않고 책을 골랐다.

반짝 반짝 윤이 나는 표지와 가벼운 책의 무게가 맘에 들었다.간간히 프랑스풍의 만화도 호기심을 사기에 충분했다.그의 글을 읽기 시작했다.아주 쉽게 쉽게 책장이 넘어갔다. 책을 읽는 동안 10여년전에 보았던 TV 시리즈 '환상특급'을 떠올렸다. 당시 유명한 감독들이 여흥삼아 한두편씩 특이하고 짧은 드라마를 만들었다.스필버그 감독도 아마 그중에 있었던 것 같다.<나무>는 베르베르가 자판위에 써내려간 '환상특급'같은 소설이다.

우선 베르베르의 엉뚱한 상상은 즐거움을 주긴한다.그러나 왠지 어디선가 본 듯한 그런 느낌을 주었다.신선한 상상의 익숙함같은 것일까... 그 역시 이번 소설을 짬짬이썻다고 밝힌다.쓰는 과정이 그랬듯이 보는 사람도 짬짬이 읽기엔 충분했다.하지만 거기엔 반짝이는 아이디어 왜엔 없었다. 무릇 소재만을 가지고 멋진 소설이라고 하기엔 왠지 어색하다.그리고 그의 글에선 문체를 느낄 수 가 없다. 멋진 문장만이 문장이라는 것이 아니다.무릇 글을 쓰는 사람은 문장에 자신의 세계가 반영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점토로 인간을 만든 신과 같이 작가는 펜으로 또는 자판을 눌러서 기호에 지나지 않는 문자를 살아 숨쉬게 하는 것이다.

베르베르에게도 나름대로의 스타일이 있으리라 생각된다.만약 그러한 것이 있다면 과학기자 출신답게 포름알데히드에 갖힌 문장이 아닐까? 나름대로의 개성과 매력이라고 칭할 수 도 있겠다.하지만 개인적 관점에서는 그다지 매혹적이지 못했다. 우리가 글을 읽는 것은 소설가의 상상력만을 보기 위해선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비판은 베르베르를 늘 따라 다니던 것일지 모른다. 그래서 였는지 그는 소설 중에서 자신의 작품에 대한 평단의 비판을 은유적으로 조롱하고 있다. 수백년이 지나 지금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소설이 문학적으로 인정받는 세상을... 한 백년쯤 기다려 볼 일이다.

어디 긴 여행가며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읽는 책을 위해서라면 이 책은 아마 훌륭하게 목적을 달성시켜 줄 것이다. 짧은 시간 쉽고 재미있게 읽으며 한 권의 책을 읽었다는 자족감을 얻기 위해서라면... 물론 나의 베르베르에 대한 평가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나 역시 베르베르의 필생의 역작이 될 <개미>를 읽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조정래를 평가하는 데 <태백산맥>을 보지 않고 몇몇 단편에 근거를 두는 것과 같을 것이다.) 언젠가 그의 출세작이자 대표작인 <개미>를 읽게 될 날까지 그에 대한 평가는 아직 유보상태이다. 하지만 이번의 <나무>는 그에 대한 애정을 키워주기엔 너무 갸날픈 어린 나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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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드팀전 > 정치학자의 미술보기
아름다운 사람 이중섭
전인권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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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인권...들국화의 리드싱어...접시안테나까지 단 사람. 그의 이름을 처음 들었을때 난 부시시한 한국락의 아이콘을 생각했다. 물론 동명이인이다. 전인권의<아름다운 사람 이중섭>을 읽었던 건 벌써 몇년전이다.하지만 그 글은 아직도 인상적으로 남아았다. 내가 처음 접한 전인권의 책은 <편견없는 김대중이야기>라는 정치 평론집이었다. 그랬던 그가 다음으로 들고 나왔던 책이 뜬금없이 <이중섭>이었다. (최근에는 <남자의 탄생>을 냈다. 책이 좀 팔렸다고 한다.)TV 책 프로그램에서 그의 신간이 선정되기도 하고 미디어홍보도 그런대로 효과적으로 이루어졌나 보다.

신간서적의 후광이었는지 어느 대형 서점에 가보니 이미 철 지나 서점 귀퉁이에 가 있어야할 <이중섭>이 그의 <남자의 탄생>과 함께 인문코너 앞에 떡하니 자리잡고 있었다. 반가왔다. 좋은 책이었는데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가 다시 돌아온 셈이다. 이중섭은 아마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우리 화가 중에 하나 일 것이다.교과서에도 그의 황소작품 몇 편이 실려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코로 거친 숨을 푹푹 몰아쉬며 앞으로 달려나가려는 거친 황소... 그 외에 우리가 이중섭에 대해 기억하는 것은 대부분 그의 기행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정치학자이자 미술애호가인 전인권은 이중섭의 작품과 그 작품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시대 순으로 정리한다.그리고 그의 작품에 얽혀 있는 작가의 심리를 한국인의 집단심리와 연관하여 추리하고 있다. 우리의 전통적인 가치인 원형적인 세계관과 이중섭의 군동화를 연결한다. 그리고 그의 소 작품에서 힘과 용기,우직함 외에도 마더콤플렉스의 요소를 읽어낸다. 이미 평단에는 알려져있는 내용이었을지 모르지만 막연히 이중섭의 기행과 작품 몇점에 대해 알고 있던 나에겐 신선한 접근이었다.

지금도 내 책상위에 이중섭의 군동화 복사본이 한 장 놓여있다.그의 군동화는 자신의 어린 아이가 죽고 난 후 그려지기 시작했다고 한다.중섭의 어린 자식이 죽고 난 며칠 후 그는 친구 구상과 함께 술을 마셨다.그리고 갑자기 펜을 꺼내 아이들을 그렸다.의아해 하던 친구가 왜 아이들을 그리냐 물었을때 그는 '먼길 떠나는 우리 아기 외롭지 않게 동무들을 그려서 가는 길에 함께 보내줘야겠다' 고 울먹였다고 한다.

그의 군동화에 얽힌 에피소드이다. 그가 죽은 아이를 위해 그린 군동화에는 한국인이 이상향으로 그리던 대동사회의 모습이 담겨있다.아이와 바람과 게와 물고기가 서로 둥그렇게 어우러져 있다.평화롭고 동심이 가득한 세계이다. 이렇듯 너무나 한국적인 화가이자 너무나 한국적인 아버지.그 뿌리 한 올까지 우리 사람이었던 이중섭. 그의 작품을 보면 왜 마음이 따뜻해 지고 평화로와 지는지 전인권은 이중섭에 대한 한없는 애정을 담고 우리에게 보여준다.

서양의 화풍으로 서양의 그림을 그린지가 100여년이 넘었다.미술계 뿐만 아니라 요즘 문화판은 이것 저것 외국 사조라는 것을 선진적으로 받아들이는것 만으로도 한 평생 누리며 살 수 있다.학계도 마찬가지도.이름난 프랑스 사회학자나 철학자들의 물건을 조금 조금 나누어 팔아먹어도 교수니 지식인이니 하며 행세할 수 있다. 하지만 그중 누가 다음세대까지 사람들의 기억속에 남아 있을 수 있을까? 우리가 기억하는 사람,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중섭과 같은 우리의 혼이 살아있는 따뜻한 우리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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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드팀전 > 카프카의 향기 코끝을 스치더니
해변의 카프카 (하)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춘미 옮김 / 문학사상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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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의 세계는 이원론적이다. 대부분의 성장소설이 그러하듯이 <해변의 카프카> 역시 이원론적 세계에서 방황하는 청년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이미 이원론적 세계는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다. 이승/저승, 현실/가상, 일상/꿈 혹은 3차원의 세계/4차원의 세계. 하루키는 가시계와 비가시계의 경계가 있다는 이미 영화나 소설에서 많이 이용한 소재를 응용한다. 다른 세계를 넘어서는 데는 바로 문이 있는 것이다. 세계의 경계선에 있는 이 문은 바로 '입구의 돌'이다. 나카타 노인의 여정은 '입구의 돌'이라는 세계의 문을 열기 위한 장치이다.

이 소설에서 모든 인물들은 몇가지 주요 소재로 수렴된다. 해변의 카프카라는 그림,고무라 도서관,입구의 돌 등이 바로 그것이다. 하라키는 이러한 소재에 인물을 배치한다. 소설 초반부는 상당히 스피디하게 읽힌다.도대체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두 사건이 -카프카의 가출과 숲속에서 일어난 집단실신 사건- 나카타라는 인물의 특이성과 결합되어 읽는 재미를 준다. 그리고 다른 두 사건이 어떻게 하나의 예정된 인연으로 한 곳에 수렴되어 가는지 기대하게 만든다.

하루키는 그 과정에서 모순적으로 완결된 세계에서 불완전성이 가지는 미학에 대한 애정을 과시한다. 하루키가 즐겨사용하는 음악적 장치이다. 이 소설에는 불완전성의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몇가지 음악이 등장한다. 해변의 카프카란 노래의 두가지 불협화음,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라디오 헤드의 노래,베토벤의 피아노 삼중주등이다. 슈베르트나 라디오 헤드의 몽환적이고 불안전한 느낌등은 하루끼가 등장인물의 말을 통해 직접 설명하고 있다. 호시노 청년에 사랑하게 된 베토벤의 '대공' 트리오 역시 이러한 요소중에 하나이다. 클래식에서 피아노 3중주 편성은 현악 사중주의 안정감에 비해 음향적으로 무척이나 불안정한 편성이다.하루키는 식상한 음악 요소를 과다인용하며 불완전성이 세계 인식의 발판이란 어찌보면 니체적 인용을 끄집어 내고 있다.

<해변의 카프카>의 가장 큰 패러디는 바로 신화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일본의 겐지 모노가타리의 생령 신화이다. 하루키가 신화를 뼈대로 삼고 있는 것은 이윤기가 신화에 대해 남긴 말을 생각해보면 이해하기 쉽다. 신화는 살아있는 현재의 반영이라는 것, 하루키의 말을 빌자면 세계는 메타포이기 때문이다. 신화라는 메타포를 통해 세계의 인식을 꽤하는 것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매력적인 소설 소재인 것 만은 사실이지만 공식에 대입하는 듯 직접적인 패러디일 경우 그 매력이 어떤지는 알 수 없다.그리고 사족삼아 숲(비가시적 세계)의 입구를 지키는 병사들의 말 '절대 돌아보지마'는 거의 에우리디체 신화를 옮기고 있다. 굳이 뱀의 다리를 만들어 상투적으로 보이게 하는 이유는 무었일까? 어쩌면 비가시적 세계 역시 상투성을 벗어날 수 없다는 이유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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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드팀전 > 최고의 책사랑 안내서
서재 결혼 시키기
앤 패디먼 지음, 정영목 옮김 / 지호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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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첫장을 펼치고서야 이 책이 번역된지 2년정도 지났음을 알았다.이제서야 비로소 읽었다.나의 편견때문이었다.나는 이 책이 애서가의 책 브리핑인지 알고 있었다.그래서 책 제목에 대한 공감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늘 눈길 밖에 있었던 것이다.(정말 나의 불찰이고 무지의 소산이 아닐 수 없다.)

늦었지만 이 책은 최근에 본 에세이 집 중 최고였다고 할 만하다.만약 책을 멀리하던 사람이 이 책을 본다면 잊혀졌던 책에 대한 애정이 살아날 것이다.또 책을 애인삼았다고 자부하는 사람은 그 인연이 백년은 연장될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서재 결혼 시키기>는 책을 사랑하는 한 가족의 이야기이고 책에 얽힌 수많은 에피소드와 숨은 애정을 표현한 책이다.책 읽기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한두가지쯤 공감할 이야기들이다.책의 제목이 된 에세이는 책을 둘러싼 두 애서가의 헤게모니 투쟁과 정리의 과정이 씌여있다.서로 다른 취향의 책을 어디에 배치할 것이며 같이 가지고 있는 책은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책에 둔감한 사람이라면 '그것도 문제거리야'라고 할 만한 주제이다.하지만 내 책은 나의 일부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정체성의 문제이기도 하다.나 역시 이를 미루어 걱정해본봐 있어서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물론 내 반쪽이 될 사람에게 공개적으로 이야기한 적은 없다.하지만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와중에도 어떻게 나의 지분을 넓힐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다.최근에 들어서 한가지 공유한 부분은 서로 읽는 책은 사지 않는다는 것이다.그리고 책을 상대에게 빌릴때는 교환형식을 취한다는 것이다.어찌 그리 야박하냐고 탓할 수 있겠지만..나는 그런 비난에 '그 정도도 많이 양보한 것이다'라고 밖에 답할 수 없다.

책과 교열에 대한 패디먼 가족의 일화도 무척 흥미롭다.특히 패디먼 가족의 강박증적 교열정신은 사실 날 좀 부끄럽게 한다.이유는 알라딘 서평에 쓰는 내글에 생기는 오자와 탈자때문이다.나름대로 변명하자면 회사에서 몰래 글을 쓰다 보니 그렇다고 할 수 밖에.여기 저기 눈치 봐가며 쓰다보면 교정하기 전에 보내기 엔터바를 누르기 십상이다.그러다보면 당연히 오자와 탈자,문맥상 부자연스러움이 많이 생긴다.내 희망이 있다면 패디먼과 같은 사람이 주변에 나타나지 않길 바랄 뿐이다.

패디먼 가족의 모르는 단어찾기의 즐거움도 공감한다.최근에 이응백 선생의 우리말 관련된 책을 하나 구입했는데 이유는 숨은 우리말의 매력때문이다.알라딘의 내 서재 이름(드팀전) 순우리말인데 아주 맘에 든다.이 책 저 책보다 그냥 아무데나 펴서 책을 보고 싶을 때 이응백 선생의 책을 핀다.그리고 그 안에 내가 모르고 있는-사실 봐도 금새 잊어버린다만-아름다운 우리말을 찾아 볼때 우리말의 아름다움에 금새 감탄하게 된다.

내가 이 책을 보며 부러웠던 것은 패디먼 가족의 책 대물림이었다.물론 남편을 비롯해 온 가족이 글을 쓰는 직업과 관련이 되었던 사람들이기에 그것이 가능했을 것이다.패디먼은 아이들이 책과 가장 가깝게 지낼 수 있는 방법은 책으로 성쌓기 라고 했다.그만큼 책이라는 것이 화장실의 거울이나 집안의 시계처럼 일상적이고 보편적이었다는 것이다.그리고 선대부터 물려온 책을 다음대에 가장 큰 유산으로 넘겨주는 것은 정말이지 최고의 보물이다.대물림하는 부모나 한 권이라도 더 챙기려는 자식이나 너무 멋있다.나 역시 수백억을 물려주긴 힘들겠지만 멋진 책들을 내 후세에게 물려주어야 겠다는 소망이 생겼다.아직 모르는 그/그녀가 패디먼처럼 행동해준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

이 책은 책과 관련되 그동안 내가 소홀히 했던 부분에 대해 많은 것을 일깨워준다.그리고 패디먼의 글쓰기는 유머가 항상 가득하다.이 두가지 때문에 읽는 내내 즐거웠다고 말할 수 있다.애정이 가면 더 많은 것이 보인다고 했던가.나 역시 책에 대한 소소한 애정을 더 많이 쌓아가야겠다는 다짐이 생긴다.그래서 우선 거금들여 만년필을 하나 살까한다.평생 쓸 생각하고 좋은 걸로 고를 생각이다.그리고 친구들에게 책 선물할때 꼭 그 펜으로 헌사를 써주어야겠다.언제든 나의 향기가 그곳에 함께 할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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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드팀전 > 칭찬과 험담의 어설픈 시공간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 증보판 리라이팅 클래식 1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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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 깊으면 골이 깊고 태양 빛이 강한 날엔 그림자가 짙다.' 이 책을 다 읽고 난 후 떠오르는 생각이었다.리라이팅 클래식의 출발을 알렸던 이 책은 여러 언론의 찬사를 받을 만큼 많은 미덕을 가지고 있다.우선 기획단계부터 신선했다.우리가 제목만 알고 읽기를 두려워 했던 책들을 순치하겠다는 것이다. 그것도 새롭게 번역하거나 평역하는 것이 아니라 젊은학자들의 시각으로 해체하고 다시 쓴다는 것이다.이러한 기획자체가 우선 매력적이어서 책이 출간된후 <이성은 신화다>를 읽었다.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을 나름대로 독해해 낸 책이었다.책의 내용 자체가 쉽게 이해되는 그런 류의 철학책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리라이팅시리즈에서는 자기의 시각으로 읽어낸 글쓰기가 인상적이었다. 무슨 무슨 강독류의 책에서는 만날수 없는 신선함이었다.그리고 이어서 나온 니체의 책 역시 니체를 처음 접하는 사람조차 읽기 쉽게 쓰여져 있었다.물론 그 한권으로 니체 철학의 전체를 파악할 수는 없었으나 그의 저작 전체를 망라하며 관통하는 사상의 맥을 짚어내는 데는 성공적이었다고 본다. 그 책으로 인해 더 많은 관심을 유발하고 다른 니체의 책 역시 손을 댈 수 있다면 리라이팅 기획의 승리가 아니였을까 한다.

이번에 읽은 <열하일기> 역시 가장 큰 미덕은 글쓰기에 있다.인문사회학 책들이 훈장처럼 달고 있는 의고적이고 번역투의 문장은 책 어디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저자의 박지원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는 글쓰기를 통해 따분한 책읽기가 아닌 즐거운여행기를 읽듯이 책장을 넘겨 갈 수 있었다.사실 개인적으로는 그것 하나 만으로도 이 책은 높은 평가를 받아야한다고 생각한다.일부에서는 저자의 주관적 애증이 너무 많이 배인것이 아닌가 하며 따가운 시선을 보내기도 한다.물론 사실이다.하지만 이는 인문사회학계에 팽배해 있는 아카데미적 글쓰기에 대한 새로운 도전이라는 차원에서 봐준다면 그다지 눈에 거슬리는 정도는 아니다.그동안 학자들은 자신들의 고루한 글쓰기와 현실과 유리된 언표를 통해 일반인과 유리된 '천공의 성'을 구축하였다.그들은 천공의 성을 기반으로 권력을 획득하고 일반인에 대해 우월적인 위치를 누려왔다. 하지만 김종필 총재도 퇴임사에서 말하지 않았던가? 세상은 변했다고....... 외국서적을 대학원생들 시켜서 번역한다.그리고 한글문법에도 맞지않는 번역서를 자기이름으로 몇 개내고 연구실적이라고 올린다.아직도 이런 학자들이  많은 이 땅에서 자기식으로 읽고 자기식으로 글을 쓴다는 것은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다.

저자를 비롯해 수유연구팀이 고전을 읽어내는 잣대는 포스트모던론이다.특히 <열하일기>는 자살과 함께 국내  이름이 많이 알려진 들뢰즈의 이론이다.90년대 들뢰즈와 가타리의 이름이 처음 알려졌을때 난 그게 한 사람의 이름인지 알았다. '들뢰즈와'는 이름이고 '가타리'는 성이고.....^^  10여년이 지난 지금 당시 제국주의론을 읽고 프랑크푸르트의 비판 이론을 읽던 사람들이 이제는 들뢰즈의 신도가 되어있다.저자가 책 서문에 밝혔던 자신의 지적편력은 동시대 책읽기를 즐기던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일반적인 경우이다.아마 그 전위에 수유연구팀들이 있었겠지만.... 저자는 들뢰즈의 용어들을 중간중간에 감초처럼 넣어가며 열하일기와 연암 박지원을 분석한다.우선 박지원과 들뢰즈의 이론을 연결시키는 상상력이 신선하다. 저자의 시각을 따라가면 연암은 18세기가 낳은 대표적 양반 노마드중에 하나 일것이다. 저자가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은 과거 개인적으로 즐겼던 어느술자리를 떠올리게 했다. 30대 중반의 대학강사들과 우연찮게 합석할 기회가 여러번 있었다.그들은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다가 푸코가 노가리가 되고 보드리야르가 고추장이 되고 부르디외가 이쑤시개가 되고 그랬다.물론 들뢰즈와 가타리도 후식으로 빠지지 않았다. 그들이 모든 이론에 정통한 것은 아니었으나 나름대로 개괄은 하고 있었을 것이라 믿는다. 저자는 그 술자리의 담소처럼 박지원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며 노마드를 들이대고 주름을 이야기하고 리좀을 빗대는 장면을 연출한다.재미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술자리 학출들의 지식인연하는 태도가 떠올라 조금 배알이 뒤틀렸다.(너 자유롭게 사는 구나 하면 될 걸...넌 노마드적인데..라고 한다.어설프기는...^^)

저자가 말하는 노마드니 리좀이니 하는 들뢰즈의 개념들이 매력적인건 사실이다.하지만 굳이 그런 심오한 말을 쓰지 않더라도 연암의 자유인적 속성은 풀어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저자만큼은 아니더라도 그의 지적편력과 자유인적인 기질은 여럿이 다루었다.이미 들뢰즈가 그런 용어를 서술하기 전부터 이미 수많은 기인들과 시대와의 불화를 겪었던 사람들은 있었다.오원 장승업은 어떻고 고려시대 만적은 어떠한가....그전까지 우리는 예인적 기질 또는 자유인 뭐 이런 비인문학적인 용어로 말했다.그런데 멋진 프랑스 용어들이 등장하니까 연암은 노마드가 되고 연암을 구속하던 조선이라는 공간은 홈패인공간이 된다. 훨씬 그럴싸해보인다. 저자는 자신이 공부한 들뢰즈와 가타리를 연암이란 대상에 맞춰 옷을 입히려고 무던히 노력한다. 역시 저자는 공부하는 사람이다.

저자가 말하는 노마드에 대해서도 한번 짚어봄직하다. 이건 사실 근대와 탈근대 논쟁에 늘 등장하던 이야기라 신선하진 않다. 또 한번 개인적으로 불운한 추억을 더듬거려본다. 몇년전 미국 유학을 앞두고 있던 한 여성학 강사를 잠깐 만나 이야기 나눌 기회가 있었다. 대충 들은바에 의하면 집도 좀 살고 남편은 좀 더 산다고 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다 '노마드'란 단어가 나왔다. 그 강사는 일반인의 입에서 그런 단어가 나온것이 무척 신기한 듯했다.그 단어 하나로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는 듯했다.(아마 이런 경험들많으실게다.언어는 권력 맞는 것 같다.)그분은 자신은 노마드적으로 살고 싶다고 했다.자신의 주변에도 그런 사람들이 많고.......솔직히 좀 웃겼다. 그녀의 노마드적인 삶을 바탕해줄 수 있는 것은 그의 든든한 재력과 학벌과 박사학위증이다. 하루 하루를 걱정하고 전세금 올려달라는 주인의 말에 부들부들 떠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유목민이란 과연 무었일까? 정규직의 절반도 못되는 임금에 언제 짤려서 정말 유목하게될지 모르는 중공업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노마드란 무었일까? 지나치게 극단적인 예를 드는 건 아닐까 생각한다.하지만 노마드라는 것이 개인의 가치관에 변화를 주는 윤리적이야기라면 충분히 이해가된다.꼭 들뢰즈를 이야기하지 않아도 박민규의 소설<삼미슈퍼스타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나 법정스님,전우익 할아버지 같은 분들이 다 노마드의 실천적 예일것이다.하지만 전범일뿐 일상의 무었이 되기에는 지극히 관념적이고 현실도피적이다. 물론 글쓰는 재주가 있어서 조직에 얽매이지 않거나 도자기라도 빚거나 통나무집이라도 지을 기술이 있다면이야 노마드도 멋질것이다.하지만......대부분은 더러워도 가족생각하며 담배한모금에 비굴함을 참는 샐러리맨이거나 도서관에서 책상파보지만 보나마나 실업예비생이거나 주부이거나 중소상인인데야 .......어떻게 노마드들의 공동체를 구현할 것인가.?

뛰어난 노고에 대한 칭찬에 비해 되지도 않는 험담이 길어졌다.젊은 학자들이 나름대로 열정을 쏟아 우리사회에 지적결과물들을 지속적으로 선보이는 것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앞으로도 이러한 작업이 계속될길 기원하며 더 좋은 노작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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