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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 - 시칠리아에서 온 편지
김영하 글 사진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김영하의 글은 그 어떤 코메디 프로그램 보다 나를 웃긴다. 코메디 프로를 즐겨보지 않아 장담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의 글 곳곳에는 피식, 또는 깔깔거리게 하는 뿅망치가 숨어있다 어느순간 튀어나와 내 허파를 툭툭 건드린다.
코드가 맞다, 하는 표현은 이런 것일 거다. 각자 살기 바빠 다소 소원해진 남동생과도 아직은 웃을 때만큼은 코드가 맞는다. 남들은 무덤덤한데 우리 둘은 웃겨 죽겠는 지점이 있다. 그렇게 실컷 웃고 서로를 쳐다보면 남매애 같은 걸 확인하는 것 같아 흐뭇해질 때가 있다. 인생에 같이 슬퍼해주는 사람이 중요한 만큼, 함께 웃어줄 사람도 절실하다. 살다 보면.
책 <네가 잃어버린 거을 기억하라>는 사실 김영하가 웃기자고 쓴 글이 아니다. 소설가로 교수로 라디오 진행자로 어디에서나 무난히 역할을 잘 소화해내던 그가 문득 이건 아니다, 해서 일상 탈출을 감행한 여행기라 절박한 상황에서 쓴 글이다. 그렇지만 원래 웃기던 사람이 어려운 일에 닥쳤다고 해서 그 유머 감각까지 몽땅 버리기야 하겠는가.
예를 들면 이런 글이다.
P.216
좁은 골목으로 문이 난, 미술관 옆 건물 1층의 아파트를 빌리며 나는 주인 여자에게 물었다. 햇빛은 들어오나요? 주인은 작은 창 하나를 가리키며 그렇다고 했다. 그러나 방에서는 명백하게 곰팡내가 났다. 아무래도 빛이 들어올 것 같지 않은 집이었지만 주인은 단호하게 그렇다고 했다. 다음 날 아침 중정으로 향해 난 창으로 정말 햇빛이 들어왔다. 그러나 의붓어미에게 내미는 용돈처럼 인색한 빛이었고, 끝내 발끝만 들여놓았다가 이내 달아나는 수줍은 빛이었고, 맹렬히 번식하는 곰팡이들을 박멸하기에는 턱없이 미약한 및이었지만, 적어도 그 빛이 들어온 곳만큼은 눈부시게 환했다....
그가 여행한 곳은 시칠리아다. 유럽역사는 물론, 여행 한 번 가지 못한 나로서는 시칠리아가 교과서에서나 접한 단어 이상은 아니지만, 그의 여행기를 보고나니 한번쯤은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사실, 꼭 시칠리아가 가고 싶다기 보다, 그냥 이 책 속에 나온 그런 여행을 하고 싶다는 게 더 맞을 것이다. 여행기에서의 시칠리아는 제 시간에 맞춰지는 게 없는 곳이라 여행하기 편한 곳은 아니다. 그 버벅거림이 주는 의외의 즐거움, 김영하는 그걸 찾을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 여행기가 재밌는 것 같다.
P.281.
"시칠리아에 다시 오게 될까?" 뱃전에서 아내가 물었다.
"다시 오게 될 거야."
"어떻게 알아?"
"그냥 알 수 있어."
나는 힘주어 말했다. 아내가 뱃머리에 부서지는 흰 물살을 굽어보다 말했다.
"난 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
"어떤 사람?"
"난 모든 일이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으면 안절부절못하는 사람이었어."
"그런 면이 있지."
아내는 정말 걱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특히 여행 같은 거 떠날 때는 더더욱 그랬지. 예약하고 확인하고 또 확인하고. 그런데 시칠리아 사람들 보니까, 이렇게 사는 것도 좋은 것 같아."
"이렇게 사는 게 뭔데?"
"그냥, 그냥 사는 거지. 맛있는 것 먹고 하루 종일 떠들다가 또 맛있는 거 먹고."
"그러다 자고."
"맞아. 아무것도 계획하지 않고 그냥 닥치는 대로 살아가는 거야."
"가이드북 보니까 이탈리아에 이런 속담이 있대. 사랑은 무엇이나 가능하게 한다. 돈은 모든 것을 이긴다. 시간은 모든 것을 먹어치운다. 그리고 죽음이 모든 것을 끝장낸다."
"갑자기 뜬금없이 웬 속담?"
아내가 짐짓 딴지를 걸어왔다.
"그러니까 여행을 해야 된다는 거야."
"결론이 왜 그래?"
"결론이 어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