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불
 
합장하고 절을 했다. 온화한 미소의 불상이 난롯불 너머 부드럽게 빛났다. 지그시 감은 눈부터 입가의 곡선, 자연스럽게 편 손가락까지 시선의 테를 그렸다. 불상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이따금씩 올려 볼 때마다 불이 흔들리며 그 위에 그림자를 남기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일까 불상의 금빛도 눈앞에서 너울거렸다. 절을 마치고 가만히 섰을 때 그때서야 빛도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음을 알았다. 커다란 쇳덩어리가 움직였을 리 없었다. 그러나 바람보다 찬 불상이라도 조금은 떨어야 할 것만 같은 겨울이었다.
스님은 징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고요하게, 이어 세게 터지는 징소리는 나무의 잠을 깨워줄 것이었다. 동이 트려면 아직 먼 새벽임에 시린 맨발과 흘러나오는 입김이 적응치 못하고 안달하는 것이었으나 그러나 나는 거기 가만히 서있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그래왔으며 외려 이렇지 않은 날이 이상하게 보이리만치 서있었다. 마지막 징소리가 남아 나무기둥이 웅웅거렸다. 사뿐한 발소리에 이어 절을 하는 세 번 가사가 바스락거리고는 목탁이 맑게 울렸다. 스님의 쉰 목소리는 끊어질 듯 이어졌다. 귀를 막고 싶은 충동이 일순 일었다. 산사를 홀로 지키는 목소리는 내게 이유 없이 구슬픈 것이다.
목탁소리에 맞춰 절을 하고 합장하고 절을 하고 다시 합장하고 멈추어 모든 소리가 사라졌을 때,
“갑시다.”
는 스님의 말씀에 삐걱거리는 문을 열고 나왔다. 발이 시려 급하게 신발을 신고 방에 들었다. 방에서도 스님의 염불이 귓가를 맴돌았다.
어떤 절의 수도승들은 천년이 넘는 세월을 끊이지 않고 말을 한다. 그들 중 누구도 한마디 않고 조용해지는 순간 세상은 멸망한다고 그들은 믿는다. 갑자기 그 생각이 났다. 스님이 홀로 지키기 이전의 스님도 하루를 거르지 않고 일어나 염불을 외웠을 것이고 그 이전의 스님도 이 절을 세운 누군가도 원래 있던 곳에서 그렇게 염불을……. 나는 장구한 역사가 흘러들어온 곳이 지금의 외로운 순간임에 갑자기 우울해지는 것이었다.
다시 잠이 들어 밖의 참새소리를 듣고 일어났다. 날이 새어 창호지는 이미 흰 막이 되어있었다. 공양시간이 다 되었기에 들려오는 선생님, 선생님. 소리를 듣고 옆으로 넘어갔다. 밥과 김, 김치뿐인 조촐한 공양이다. 공양을 마치고 곧바로 짐을 챙겼다. 세 번의 절과 합장을 하려 대웅전으로 향했다.
지난번 머무른 절의 범허스님께선 말씀하셨다.
“불가에선 환생을 믿죠?”
“불가에서 말하는 환생이란……. 세상엔, 속세엔 이리저리 아귀 싸움이 많아. 이데올로기, 돈…… 공산주의가 무너지면 그것이…… 옳은가, 그건 아닌 법이라. 그렇다고 민주주의가 무너지면 그것이 옳느냐. 자본주의가 무너지면 그것이 옳느냐. 그건 아닌 법이라……. 인간이 욕심을 부리게 되고 그에 행하는 일엔 문제가 따르기 나름이라. 그래서 환생이란…… 인간을 초월하는, 그런…… 존재가 되기 위한 것이라.”
작은 체구의 스님은 말주변이 없었다. 말보다는 웃는 편을 택했는지 양 볼에 주름이 괴어있었다. 그리고 그에 어울리는 오래된 미소는 보는 이의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그걸로 충분했다. 스님은 말을 잘 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부처께 절을 드리며 마음을 비우는 게야…….”
꺼진 난로 곁의 불상은 차가워 보였다. 손을 대면 부드러운 곡면너머로 한기가 전해져 오지 않을까. 다시금 천년을 생각했다. 내가 이 절을 떠나도 스님은 계속해서 염불을 외고 있을 것이다. 이미 그래왔든 지난 천년에 거기 있던 스님들이 그리고 이 후의 스님들도 염불을 욀 것이고 그 후의 스님도, 때가되어 이 절이 사라지면 어느 곳에서 다시…… 아니, 절을 하는 순간만은 마음을 비우는 거다, 경외마저 비우는 것이다, 나는 노력했다.
산사를 나왔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내리고 있었다기보다는 흔들리고 있었다는 표현이 맞았다. 눈앞을 가득 메운 눈은 천천히, 고요히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 가끔 지나가는 바람이 눈을 흔들 뿐이다.

비가 내렸나보다. 물소리가 똑, 똑, 들려왔다. 아직 어두운 밤이다.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숨을 쉬고 있는 걸까. 우습게도 그런 생각이 들어 크게 한번 들이쉬었다. 꽤나 거친 숨이 다시 나갔다. 입에선 쓴맛이 났다. 양치를 하지 않고 잠들었나. 일어나야겠지, 하면서 그냥 누워있었다. 눈 뜬 채로 어둠을 구경했다. 곧 눈이 어둠에 익었다. 누워있는 침대, 책상, 벽에 붙은 앨범커버. 무엇하나 없어지거나 생긴다 해도 얼마간 못 알아챌 익숙함이었다. 어둠 속에서 볼 땐 이것들이 지루하단 생각이 들지 않았다. 바뀌는 것이 없어도 새롭다. 매 초마다 새롭게 느껴진다.
삐걱거리는 몸을 일으켜 화장실까지 간 뒤 양치를 했다. 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시계가 있는 곳을 응시했다. 어두운 탓에 잘 보이지 않았다. 불을 켤까 망설이다 스위치 밑의 손목시계를 찾았다. 2시 15분. 생각보다 이른 시간이었다. 오랜만에 염불이나 드려볼까……. 신자도 아닌 주제에 너무 장난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누워 이불을 목까지 끌어당겼다.

잎이 진 후의 교정을 거닐었다. 나는 온통 갈빛으로 물든 거리가 좋아 발걸음 따라 부서지는 나뭇잎의 경쾌한 소리에 집중하며 천천히 걷는 것이었다. 사라락, 사라락, 무엇보다도 그 소리, 낙엽의 소리엔 기다림이 배어있었다. 겨울, 황혼, 그 혹은 그녀. 기다리지 않아도 낙엽소리가 들리면 기다리는, 기다려야할 것만 같아진다.
이대로 눈도 비도 한참 오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었다. 눈도 소리가 나는 것이나 그러나 그것은 기다림의 소리가 아니었다. 뒤에서 다가오는 누군가를 돌아보기보다는 앞을 바로 보며 헤쳐 나가는 소리인 것이었다.
멀리 운동장 골대 쪽을 보니 아직 집에 가지 않고 공을 차는 아이들이 있었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 아이들이 입은 하얀 티가 펄럭였다. 방금 골이 들어갔는지 왁자지껄했다. 잠시 멈춰 서서 그들을 보고 있을 때 뒤에서 기다리던 낙엽소리가 들렸다. 나는 다시 걸었다. 아까보다 더 천천히 걸었고 부드러운 낙엽소리는 가까워졌다.
“보충이 끝났나 봐요?”
그녀가 내 물음에 반문했다.
“여지껏 기다린 거예요?”
“뭐 이것저것 하다 보니…….”
나는 얼버무렸다. 그녀가 웃으며 옆으로 다가왔다. 우린 말없이 걸었다. 사라락, 사라락, 가을의 소리는 멎지 않았다. 내가 아직 기다리는 그녀의 또 다른 웃음, 황혼. 해질녘의 노을은 타오르기 시작했다. 붉은 줄기를 뿜어내며 눈에 스몄다.
문득, 내가 말했다.
“요즘 들어 꿈을 자주 꾸네요.”
“무슨 꿈이요?”
“글쎄 현실의 꿈이라 해야 하나. 직접 보고 듣고 느끼는.”
그녀는 웃었다.
“항상 침대에서 일어나요. 매우 뻐근하고, 답답하고. 입 안도 쓰고. 신기하게도 모든 게 진짜 같더라고요. 불을 켜면 눈도 시고. 어느 하나 빠지는 것 없이 완벽한. 그런 꿈이요.”
“다시 잠드나요?”
“그렇긴 해요. 그런데……. 누가 불을 켜서 일어나죠.”
“누군지 봤어요?”
나는 웃었다.
“걸읍시다.”
“…….”
그녀는 입을 열었다 닫았다. 교문에 가까워졌다.
“그럼 어떤 느낌이에요, 자각몽을 꾸면? 하늘도 날 수 있거나 보고 싶은 사람, 먹고 싶은 음식도 마음대로 만들 수 있나요?”
“오히려 너무 현실적이라 그런 게 안 되는 것 같아요. 노력한다면야 만들 수 있겠죠. 그런데, 아까 말했잖아요. 어느 하나 빠지는 것이 없다고. 그냥 그대로가 좋아서 노력하고 싶지 않아요. 뜬금없이 하늘을 난다거나 하면, 현실이 아닌 게 돼버리잖아요.”
그녀가 웃었다.
“이미 현실이 아니잖아요.”
“그런가요?”
“나 같으면 이것저것 해볼 것 같아요. 하늘도 날고 물 위도 걸어볼 수 있고…….”
반짝이는 그녀의 눈 속에 투명한 하늘빛이 보였다. 나는 그 일순의 생기에 행복했던 것이다. 거기엔 아이들의 그것이 있던 것이다.
“다음에 한 번 해봐야겠네요. 무척 궁금해 하는 것 같은데.”
사랑스러움에 나는 말했다. 그녀는 잠시 말이 없더니 손을 잡으며 말했다.
“아뇨. 그러지 마세요. 다시 현실로 돌아가기가 너무 힘들 것 같아요.”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버스정류장이다. 시골에서 부모님이 올라오신다고 했다. 약속했던 저녁이 이렇게 떠나자 못내 아쉬웠다. 기다리며 어깨를 감쌌다. 은은하고 달콤한 향이 났다. 누군가 내 이름을 멀리서 부른다면, 수화기 너머, 오랜만에 수화기 너머 듣는 목소리가 있다면 스쳐지나가는 무엇이 있기 마련이었다. 떨어지고 싶진 않으나 그러나 만약 그녀의 목소리를 오랜만에 듣는다면 무엇보다도 이 달콤한 향이 가장 먼저 생각날 것이었다.
기댄 그녀가 말했다.
“무슨 옷을 입고 있었어요?”
“뭐가요?”
“꿈속에서요.”
“파란색이요. 첫날이었을 거예요, 아마. 예뻐 보여서 파란색을 입으라 말하고 싶었는데, 뭐 이미 좋아하잖아요. 그리고 이브닝드레스 같은 거였어요. 평소에 입긴 무리가 있죠.”
버스가 오고 손을 놓았다. 뒤쪽에 앉은 그녀에게 차창 밖에서 손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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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내가 마주할 때
 
명절이 되면서부터 2공단 옆 시장아파트에선 모든 것이 하나 둘씩 사라져간다. 그곳 골방 한구석에 틀어박혀 누우면 그림자가 다가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눅눅한 새벽 야간조의 질척이는 발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이어 술에 찌든 아침을 깨부수던 싸움소리가 잦아간다. 텅 빈 2교대, 다시 야간조의 발걸음 대신 타닥거리며 계단을 오르내리는 소리, 주소를 잘못 찾은 배달부의 외침이 몇 번 지나고 나면 물그죽죽한 밤이 찾아온다. 별이 있어야할 곳에 검은 연기만이 울먹이면 마침내 온 것이다. 삶을 찾아왔다가 도리어 죽음만 안고 가는 희멀건 얼굴들이 사라진 것이다.
그것은 무서운 과정이었다. 빈 소리의 문틈을 거니는 죽음의 그림자는 칙, 칙, 거리며 발을 끌었다. 나는 이제껏 죽음의 소리다 믿던 것들이 그러나 차라리 삶이었음에 죽음은 어떨까 생각되어 부르르 떨고 만 것이다. 시선은 온통 벽의 낙서에 집중되었다. 지우려했던지 살짝 긁은 곳엔 벽지가 까져있었다. 벽이 벌거벗은 곳에 스민 곰팡이는 날이 어둑해질수록 더욱 커보였다.
‘돼지새끼 설날’
전날까지도 망설이던 그의 소리가 자리를 비웠는지 확인해보고 싶었다. 잠바를 걸치고 문을 나섰다. 열자마자 매캐한 굴뚝냄새가 코를 찔렀다. 추운 탓에 배에 힘을 주고 몸을 움츠려야 했다.
둘러싼 계단의 한가운데, 이 빠진 그릇처럼 더러운 화단에 내려가 담뱃불을 붙였다. 매서운 칼바람은 움푹 팬 골을 일부러 찾아왔는지 마당에서 돌고 있었다. 이를 바득이며 나는 돼지새끼를 찾았다. 밖에 나와 있진 않았으나 그의 방에 불이 켜져 있었다.
그것을 보고 가슴이 뛰었다. 내일이면 시작인 것이었다. 침을 늘여 담배를 죽이고 화단에 던졌다. 다시 올라간 방 안에선 냉돌이 시려 잠이 오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이 되어 돼지새끼의 방문을 두드렸다. 탕탕거리는 신음이 마당에 울렸다. 잠긴 문을 열고 짧은 머리를 디민 돼지새끼의 눈은 아직껏 부스스했다.
“더 잘 거냐.”
“지금 몇 신데.”
나는 말없이 그의 찢어진 눈을 보며 내버려 둘까 고민했다.
“이렇게 일찍 나갈 필요 없잖아.”
“쭉 둘러봐야 돼. 사람 있나 살펴야 할 것 아냐.”
“들어와 봐.”
현관에 들어가 신발을 벗었다. 담배연기에 찌든 녀석의 방은 내 방보다 좁아보였다. 그가 바닥에 널린 옷가지를 넘어 침대에 풀썩이며 앉았다. 안은 먼지로 가득 찼다. 굴러다니는 콜라병을 집어 마시며 그가 말했다.
“몇 시쯤 오지?”
“그 여자가 밥 주는 걸 봤을 때가 점심이니까 아마…… 1시쯤이면 올 거다.”
“어떻게 해, 마당에서 잡는 수밖에 없어? 아님 어디로 오는지 봤어?”
“교대 시간 바뀐 이후론 본 적 없어.”
“나도 본 적 없는데.”
“마당에서 잡아. 둘이서 개새끼 하나 그냥 잡을 수 있어.”
그는 끄덕이며 하품했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쓰게 한 모금 했다.
“내가 일층 볼 테니까 네가 이층 봐. 오면서 봤는데 3층엔 없어.”
“알았어. 근데 만약, 누가 오기라도 하면 큰일 나는 거 아냐? 그 막, 감옥 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아?”
“하라면 해. 이제 와서 딴소리 말자고 했지. 똥갠데 누가 신고하겠냐.”
돼지새끼는 졸린 눈을 비비고 일어났다. 나는 그의 뒤룩뒤룩 살찐 몸뚱이가 아무것이나 주워 입는 폼이 역겨워 철문을 열었다. 비가 올 듯 하늘은 우중충했다. 네모난 구멍너머 구름이 울고 있었다.
그 여자를 생각했다. 여자는 매일 새벽 짙은 화장을 하고 옆 건물로 가는 3층 통로를 이용한다. 또각거리는 구두는 월요일에는 가벼운 소리를 냈고 금요일에는 무거운 소리를 냈다. 단 하루도 구두의 울림은 쉬는 날이 없었다. 그것이 잠든 눈꺼풀 사이를 가르고 지나가면 나는 눈을 떴다. 살며시 문을 열고 발목의 힘줄을 보았다. 매끄러운 그녀의 살결은 뱃속에서 발길질하는 아이처럼 꿈틀거렸다. 짙은 화장품 향기가 나지 않을 때면 더 이상 그녀의 구두 뒤축도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나는 그럼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어느 순간에서부턴가 이날, 내가 기다려온 죽음의 그림자가 문틈을 거닐기까지 기다리며 잠을 청한 것이다.
“야!”
돼지새끼가 뒤에서 소리쳤다.
“안 들려? 지금 빠따 들고 나가야 하냐고.”
나는 잠시 아니, 한마디를 잊어 대답하지 못한 것이다.
“……들고 나오지 마. 오해받을 수 있으니까.”
돼지새끼가 문을 닫고 잠갔다. 저쪽으로 가라 손짓하고는 반대로 걸었다. 복도, 계단, 마당 어디에서도 사람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줄줄이 늘어선 철문을 지나 그리고 계단을 내려갔다. 한 발짝 옮길 때마다 심장만 가슴팍을 부여잡도록 쿵쿵거릴 뿐 정신이 바로 서지 못했다. 찾을 수 없는 것을 찾는 것은 더욱 힘든 것이었다. 나의 신경은 날카로워야했으나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것이었다.
마당까지 내려와서야 안심할 수 있었다. 아무도 없었다. 돼지새끼는 아직 2층 난간을 드문드문 잡으며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주머니를 뒤적거려 담배를 찾았다. 불을 붙이고 입에 갖다 대었다.
그때, 나는 녀석과 마주했다.
‘도망가.’
푹 꺼진 눈이 나를 보고 있었다. 지난 밤 비를 맞았는지 더러운 회색 털이 북실거렸다. 바람이 불 때마다 엉망으로 나부끼는 것이었다.
‘도망가.’
녀석의 눈은 검은 구멍 같았다. 두 개의 검은 구멍이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담배를 그렇게 들고 서있었다. 들이 쉴 수 없었다. 숨도 쉬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도망가, 얼른.’
돼지새끼에게 소리쳤다.
“야!”
고개를 돌리니 눈이 휘둥그레져 내 쪽을 보는 것이었다.
“내려와!”
고함에 놀란 녀석이 시장 쪽 통로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다리를 절뚝이며 발발 기는 것이 잡힐듯했다. 나는 따라 달렸다. 화단을 빙 돌아 달려가고 그리고 돼지새끼는 통로서 가까운 계단으로 뛰었다. 거의 동시에 돼지새끼와 내가 통로 앞에 도착했을 때 녀석은 문을 빠져나갔다. 숨이 찼다. 숨이 찬만큼 열이 받았다.
‘씨발, 씨발!’
땀으로 뒤범벅이 된 돼지새끼의 이마가 번들거렸다. 멀뚱거리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는 꼴이 보기 싫어 철문을 발로 차버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으로 향했다. 뻐근한 무릎을 끌고 3층으로 올라간 것이다. 나는 차가운 바닥에 누워 앞으로 어떡할지 막막해진 것이다.
그게 다시 올라올까, 올라오면, 다가가도 가만있을까, 다시 마주치면, 다시 마주치면, 문부터 막는 거야, 문부터, 아니 그 여자한테 한번 말해볼까, 미쳤다고 하려나, 미쳤다고 할 거야 분명, 발로 차거나 뺨을 때리거나, 울지도, 울지도, 절대 말하면 안 되는 거다, 나랑 돼지새끼 둘이서 잡는 거야, 둘이서 나눠먹고 그러면, 그러면 아무도 모르게 끝나는 거야.
여름이었다. 그때는 그래도 봄바람이 일렁이는 여름이었다. 움튼 덩굴은 화단의 더러움을 감췄다. 때때로, 아주 드물게 풀벌레가 날아다닐 때면 살아 움직였다. 여자는 옆 수돗가에서 손을 씻고 있었다. 포근하게 튀는 물방울이 반짝였다. 하늘색 원피스와 늘어뜨린 검은 머리칼이 아스라이 살랑였던 것을 기억한다. 자락 아래로 드러났던 발목이 희었던 것을 기억한다. 햇살은 그렇게 그늘을 드리우며 그녀를 비췄다.
여자는 손을 씻고 바구니 하나를 들고 나왔다. 저만치 있던 녀석은 절룩거리며 기어갔다. 바구니를 내려놓으면 먹기 시작했다. 움츠러든 그대로 숙인 모가지만을 움직이는 것이었다. 나는 나의 골방에서 창문 틈새로 그러나 더 활짝 열어 그러나 마침내는 난간에 기대어 바라보았다. 시간이 흘러 한여름이 되어서는 뜨거웠다. 빛이 그어놓은 선에서 한 발짝 떼어 서있던 나는 타들어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것은 벽과도 같았다. 담장을 넘은 나는 말라비틀어져 간 것이다.
오후조로 배정받은 가을이 되어서야 나는 나의 골방으로 돌아왔다. 잠시나마 그림자가 그만큼 기울 때가 되면 뜬금없이 눈이 시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돼지새끼가 보초를 서는 게 어떻겠냐고 묻는다.
“서기엔 날이 너무 추워.”
“아까처럼 그 시간 외에 오면 어떡하려고.”
서긴 해야 할 것이나 그러나 방 안에서 설 수도 없었다. 돼지새끼와 내 방은 모두 2, 3층이어서 마당과 통로가 다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말했다.
“그 여자네 방으로 간다.”
돼지새끼의 표정이 굳었다. 조용해진 그의 숨소리가 진심이냐며 묻고 있었다.
“그 여자네 방으로 가야돼. 통로 바로 옆이니 그 새끼가 지나간 다음에 슬며시 나와서 막아버리면 돼.”
“야, 근데 이건. 이건 아니잖아. 똥개 하나 잡는 건 죄가 아니라 쳐도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잖아. 다른 거 생각하자, 차라리 덫을 만들던가. 난 그건 불안해.”
심장이 뛴다.
“잔뜩 겁먹었으니까 덫 같은 건 쓸모없어. 그 여자네로 간다. 아무것도 안 건들면 문제없을 거야.”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들에 도리어 시간이 갈수록 피가 쏠렸다. 조각난 말들이 핏줄을 타고 관자놀이부터 걸쭉하게 꿀럭였다.
“다시 돌아오면 어쩔 건데. 난 불안하다고. 이건 아냐, 제발 다른 거 생각하자.”
돼지새끼의 이야기는 더 들리지 않았다. 나는 호흡이 가빠 일어났다. 박동이 발소리와 겹쳐 쿵, 쿵, 소리를 냈다. 문을 나섰다 다시 들어와 신발장을 뒤져 철사를 꺼냈다.
그 여자의 방 앞은 하얀색이다. 칠이 벗겨진 나무의 결 사이로 갈색이 돌아다녔다. 하얀 바탕 안에서 갈색은 춤추고 그리고 튀어나온 ‘101’이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나를 바라보는 숫자와 마주하며 차가운 쇠 손잡이를 잡았다. 문을 흔들었다. 아무 기척도 없었다. 철사를 구부려 조심스럽게 쇠가 달각이는 소리를 들었다. 찰칵, 돌려 열었다. 돌이킬 수 없게 활짝 열고 들어가 숨을 들이쉬었다. 그 여자의 향기가 그리고 달콤하고 아늑함에 멈춰 섰다. 불거지던 핏줄이 가라앉고 숨이 멎었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그래서, 파업은 한답디까.”
지난겨울이었다. 사무실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 야간관리소장의 눈치가 예사롭지 않아 라인조장에게 물었다. 간혹 전등이 나간 사무실 문을 나설 때면 어둠 속에서 흙빛 얼굴을 들고 나와 껄떡대는 것이었다. 근무이상 점검을 할 때 안경 너머로 그의 눈이 굴러가는 것을 보았다. 누렇게 뜬 눈두덩의 살이 꿈틀대고 있었다.
라인조장은 내 말을 듣더니 씨익 웃었다. 까만 그의 얼굴이 누런 이를 다 드러내고 웃고 있었다.
“다음 주다, 아마 계속 이런 식이면.”
“처음부터 그렇게 나갈 거랍니까?”
“그렇게라니.”
“철야로 갈 거냐고요.”
“인원도 많으니 할 만해. 우리와 3조는 다음 주고 2, 4조는 그 다음, 그렇지.”
“……알겠습니다.”
“전기 끊을지도 모르니 두꺼운 옷감은 죄다 챙겨오라고.”
대꾸하고 나왔다. 내가 무슨 표정을 지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날의 작업은 매우 더디게 진행되었다. 딱히 누군가 무엇이 문제랄 것은 없었다. 몸이 기억하는 그대로의 손짓이 지나갈 뿐이었던 것 그러나 의미가 없었다. 그것은 천장에서 드릴을 끌어내릴 때 허공이 이렇게나 길었나 싶은 것이었다. 닿는다기보다 휘저으며 어긋나 있었다. 작업라인에 떨어진 다른 이들의 그림자에서도 비어있는 눈동자를 읽을 수 있었다.
무슨 하루인지를 보내고 골방으로 향하는 길에 반장이 앞서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 며칠 전서부터 그의 걸음이 이쪽으로 향하는 것을 보고도 말없이 뒤따랐다. 옷에 서리 앉도록 추운 골목에는 안개가 잔뜩 끼어 있었다. 가로등이 내리까는 누런 기둥 서너 개 뒤떨어져 걸었다. 나는 숨죽여 그의 검은 뒷모습을 걷고 그리고 시장계단을 올라 그는 101호 앞에 멈춰서 문을 두드리고 그리고 숨어 보다가 그가 들어가면 슬며시 ‘101’에 다가가 귀를 바짝 대는 것이었다. 이어 여자의 신음이 들린다.
나는 부릅뜨고 숨이 막혀 쉬지를 못해 그러나 조금씩 새어나오고 그러나 마침내는 그녀의 신음에 맞춰 숨을 쉬었다. 처음엔 얕고 얕다가 점점 차오르고 짐승의 비명처럼 꺽꺽 내지르는……. 그녀가 한 번씩 내지를 때마다 나의 숨은 들어가고, 내려갔다. 물 깊숙한 곳에서 억지로 꼴깍이며 목구멍을 넘기듯 숨을 마셨다. 마지막은 살짝 간격을 두고 부드럽게 가라앉는 한숨이었다. 항상 마지막 순간이 맞지 않았다. 나는 그 간격을 제대로 맞추지 못해 그녀보다 조금 늦게 푹 꺼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기다리고 섰다.
벌컥거리며 그의 구두소리가 들렸다. 평소보다 빠르다. 허우적대던 나는 빨리 자리를 뜨기 위해 도망을 뛰듯이 그러나 그가 문을 열고는 뒷모습에 말을 걸었다.
“어이!”
고동치고 있었다. 아주 천천히 뒤를 돌아 그의 얼굴을 보았다.
“아, 대답이 늦기에 난 또 다른 사람일 줄 헷갈렸잖아. 맞다. 자네 여기 살았었지?”
그의 목소리가 거추장스럽게 흔들렸다.
“예, 무슨 일로.”
“여기 아가씨가 나랑 어찌해서 아는 사인데 요즘 여기 산대더라고. 아까 간만에 연락이 왔었어. 잠깐 와본 거니 신경 쓰지 말고. 아는 사이야?”
“아뇨. 딱히 본 적도 없었어요.”
“아, 그런가? 뭐 그럼 다음에 인사라도 하면은.”
까만 얼굴의 이빨이 씨익 웃었다.
“난 그럼 한 대 피우고 들어갈 테니 가봐.”
방에 들어가서도 불을 켜지 않았다. 잠이 오지 않았다. 들여다본 눈꺼풀 너머에는 그녀의 뱃속에서 꼬물거릴 아이의 손가락이 있었다. 나는 바스락거리다 다시 나가 ‘101’과 노려보고 문을 두드리려다 부수려다 골방으로 돌아와서는 누군가의 목을 조르는 상상에 목구멍이 치밀어 바닥이 시린 줄도 몰랐다.
돼지새끼의 발소리가 가까워지자 신발을 벗고 들어갔다. 창백한 하늘색 벽지는 차갑게 식어있었다. 침대와 싱크대가 보이고 그리고 바닥에 흩어진 푸른색 노트가 보였다. 조심스럽게 들고 펼쳐있는 페이지를 보았다. 예쁜 글씨지만 감정이 휘몰렸는지 흔들리며 씌어 있었다.
‘생각해둔 세 가지 결말이 있었다. 두 가지는 행복하고 다른 하나는 슬플 거라 여겼다. 그런데 모두 아니었다. 다 같았다. 어쩌면 믿고 있던 첫 번째 마저, 그러니까 그저 생각인데 첫 번째도 슬플 것 같다. 끝날 수밖에 없으면 뒤돌아볼 때 아무 생각도.’
돼지새끼가 건들지 말자며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를 흘끗거리고 노트를 다시 원래 있던 대로 내려놓았다. 멋쩍은 듯 말하려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문 닫아. 다른 사람 없었지?”
“어. 근데 진짜 불안한데…….”
“괜찮아. 그 여자 오면,”
‘후려쳐.’
“그 여자 오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돼지새끼에게 잠시 밖을 보고 있으라하고 화장실에 들어갔다. 따뜻한 물이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손을 씻고 얼굴을 문질렀다. 거울이 보였다. 거울 속의 내가 보이고 그리고 마주했다. 간밤의 추위로 굳은 머리칼이 축축하게 젖어있는 게 꼭 녀석 같았다. 휴지를 말아 머리에 문질렀다. 보기 싫어 박박 문질렀다.
그녀가 매일아침 이 거울을 본다는 생각을 했다. 화장하지 않은 얼굴로 세수를 할 것이고 그리고 향기로운 비누로 손을 씻고 그리고 머리를 감고 그러나 너무 바쁜 때는 여기서 화장을 그녀는, 무슨 표정을 지을까 궁금했다. 표정으로 기억되는 사람이 있다. 이목구비는 또렷이 기억나지 않는데도 표정으로 알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그의 피부색이나 눈의 깊이, 혹은 드리운 그림자로 기억되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그녀는 표정으로 기억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의 표정이 쉽사리 떠오르지 않았다. 어쩌면 그녀는 다른 것으로 찾아야할 것이나 그러나 나는 그게 두려웠다. 웃었을까 생각했다. 그녀는 웃었었다.
그날은 잠이 오지 않았다. 야간조 때는 일을 마치고 골방의 일부가 되어 잠을 잤다. 스멀거리는 숨소리에 끈적해진 방바닥은 내 무거운 머리통을 잡아당겼던 것이다. 견디지 못했으나 그러나 잠을 잘 수 없었다. 한참을 뒤척이던 나는 박차고 일어나 담배를 피우러 나갔다. 그 때 그녀와 처음 마주쳤다.
생각해보면 언제나 같았다. 그녀는 손을 씻고 바구니를 들고 나왔다. 단지 몇 분, 내가 마당에 있었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다를 게 없었다. 바구니를 들고 나오며 나와 눈을 마주쳤다. 살짝 웃었다.
나는 이후 그 시간 마당에 나간 적이 없다.
돼지새끼와 함께 4시간씩 번갈아가며 창밖을 바라봤다. 내가 버틸 때가 되고 얼마 후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사락이는 소음너머로 간혹 긋고 내려오는 빗방울이 있었다. 자욱한 안개에 내리까는 다른 빗방울과 달리 급하게 들이받는 것이었다. 창문 가까이서 내릴 때면 통, 통, 소리를 내며 튀었다. 숨을 쉴 때, 나는 그 소리에 맞추려 애를 썼다.
파업을 시작하고 전경버스가 몇 대 들어서더니 포위망을 만들었다. 공장 측에선 목이 쉬도록 함성을 터뜨렸다. 격해지면 구호인지도 알아들을 수 없게 일그러졌다. 이따금 인원 모두가 밀물처럼 몰려나가 각목으로 헤드라이트를 박살내고 멍 하나씩을 안고 왔다. 셔터를 반쯤 내린 공장 앞에서 진을 치고 보란 듯이 붕대를 감았다. 칼바람을 정면으로 맞고 앉아있으면 아무는 것보다 부르터서 터지는 상처가 더 많은 것이었다. 또 한 번의 바람으로 상처에서 피가 피어오르기 시작할 무렵 조장이 내게 심부름을 시켰다. 구급상자를 가지러 간 나는 돼지새끼가 가방을 뒤지는 것을 보았다.
“뭐 하십니까, 지금.”
돼지새끼의 허연 얼굴이 붉어지더니 말을 더듬었다.
“아, 제 가, 가방에서 뭣 좀 찾으려고요.”
“장난하십니까?”
열이 올랐다. 턱 주변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예?”
“지금 손 대고 있는 게 제 거 아니냐고요.”
돼지새끼는 놀라 눈을 굴리더니 뛰기 시작하고 그리고 욕을 내지르며 따라 달린 나는 어렵잖게 잡아 얼굴을 몇 대 갈겼다. 바닥에 엎어져버린 돼지새끼의 코에서 피가 흘렀다.
“일어나.”
돼지새끼는 코를 훔치며 일어났다. 숨이 가쁜지 헉헉대었다. 눈을 똑바로 못 뜨고 바닥만 보고 있었다.
“뭐 훔쳤냐.”
“어, 없습니다. 때마침 들어오셔서…….”
“너 어디 살아.”
“시장아파트요.”
거짓이냐 물어도 같은 대답이었다. 그는 2층에 산다했다.
“다음에 또 뭐 없어졌단 얘기 나오면 너 집까지 찾아간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돼지새끼는 고개를 수그려가며 사과했다. 나는 말없이 상자를 챙겨서 나갔다. 밖에선 작은 무리가 전경과 다툼을 벌이며 욕질이 튀고 있었다. 시리도록 찬 공기가 사방으로 깨지는 것이었다.
파업은 두 주 정도 지나 타결로 일단락을 맺었다. 다시 생산라인이 가동되고 드릴이 내려왔다. 별 다른 게 없었다. 도중엔 소화기 분말냄새에 코가 매웠고 전과 후엔 굴뚝냄새가 진동을 했다. 서로 다른 가스들이 자리를 비우고 메운 것밖에 없었다. 물건이 없어졌단 얘기는 나오지 않았다. 파업기간 중에도 그와 껄끄러운 스침이 있었으나 인사하지 않았다. 철야가 끝나고 아파트서 봤을 때에야 그가 먼저 말을 건넸다. 몇 번 공장에 같이 출근하고 나서는 지금의 사이가 되었다.
돼지새끼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개소리라 했다.
봄이면 파릇하게 뿜어져 나오는 밭 옆에서 개를 사육했다고 한다. 거기엔 스물 남짓까지만도 먹을 것이 없어 깡말랐던 그가 있었다. 그리고 기억도 못할 아주 어릴 때부터 혹은 태어나기 전부터의 개들이 있었다. 그것들이 나고 자라 어디에 쓰이는지 새로 들어오는 개들은 어디서 데려오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저 무서웠다. 퍼런 천막 옆을 지나갈 때면, 특히 밤이면 어둠 속에서 눈만 번뜩이는 수십의 개들이 짖어댔다. 빠릿한 걸음으로 지나가도 계속해서 소리가 따라오는 것만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귀를 물어뜯기는 느낌인 것이었다.
카랑이며 높게 물어뜯는 것은 그러나 아무것도 아니었다. 차츰 밤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을 때쯤 익숙해진 것이나 그러나 이빨만을 드러내고 으르렁대는 것은 항상 방 안까지 따라오는 것이었다. 털이 곤두서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으면 흰자위가 없는 개의 검은 눈동자가 떠올랐다. 한 마리, 딱 한 마리가 그의 머릿속에선 떠돌았다. 개들의 철창 속에 그리고 거기다 두꺼운 판자로 가둬놓은 놈이 있었다. 놈은 얼굴도 드러내지 못하고 작은 틈으로 철창 너머를 노렸다. 처음 보았을 때 그는 알 수 있었다. 다른 녀석이 아닌 놈만이 으르렁대고 있던 것이다. 간혹 퍼렇게 번득이는 눈동자 밑에는 보이지 않아도 드러난 송곳니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번은, 돼지새끼가 아버지에게 물었다.
“얘들은 누가 사간대요?”
그의 아버지는 초점 없는 눈처럼 말수가 적었다. 언제나 흐릿한 눈동자로 목줄을 끌고 거슬리는 개가 있으면 후드려팼다. 개들은 맞을 때마다 소리를 내고 그리고 귀청에는 맞는 소리도 들려왔다. 돼지새끼는 어렸을 적 그 광경을 따라다니며 몽둥이가 휘둘릴 때마다 눈을 끔뻑였다. 끝나고 나면 어김없이 고분고분해진 개들이 힘도 주지 않고 목줄을 따라갔다. 한 때 잠잠해지는 놈들을 보는 맛에 우히거리며 따라다니던 돼지새끼는 그러나 언젠가부터 아버지가 자신을 보는 눈빛이 그것과 같다는 것을 느껴 그만두게 되고 그리고 그때부터 괴로워졌다. 나가다 우연히 보기라도 하는 날엔 목덜미에서부터 식은땀이 타고 흐르는 것이었다. 맞는 소리에 질끔이고 눈을 감으면 개의 비명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의 귀에는 오로지 딱, 딱 소리만 들려와 그러나 더 두려운 것이었다. 개가 맞는 것이다 개가 맞는 것이다 되뇌려도 눈은 감기고 그리고 개의 소리는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 순간에도 말을 꺼내기가 그토록 힘들었다. 물음에는 어쩌면 예상했듯 침묵만이 따랐다. 그의 아버지는 눈앞에서 버티고 있는 한 마리를 땅에서 떼어낼 뿐이었다.
개의 발버둥과 사람의 침묵 사이에 서있던 돼지새끼는 눈을 어디에 두어야할지 몰랐다. 문득 아버지와 눈이 마주쳤을 때 그는 예전보다 더 흐려졌다고 느꼈다. 돼지새끼는 여전히 궁금한 것이나 그러나 감겨오는 두려움에 아버지가 무어라 말하는지도 듣지 못하고 뒷걸음질 치다 빠른 걸음으로 내달았다. 그의 눈빛이 평소에도 그런지 자신을 볼 때 유독인지 돼지새끼의 목덜미에는 어김없이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 것이었다.
“어쩌면,”
돼지새끼는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개를 사가는 사람들은 개일지도 몰라.”
그는 농담이라도 한 것처럼 히죽거렸다.
돼지새끼는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답을 알 수 없었다. 대답해줄 사람은 이미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가 친구 집에서 잠시 여름방학을 보내는 동안 모든 것이 불타버렸다. 소식을 듣고 달려간 집터엔 개들의 시체가 검은 뼈를 드러낸 채 수북이 쌓여있었고 시체안치소 약도가 그을린 문짝에 붙어있었다. 폭발한 것도 개들에까지 불지를 이웃도 없었다. 답은 하나였다.
이후 그는 삼촌의 집에서 지냈다. 형편은 다를 것 없었지만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처먹었다. 눈에 보이는 족족 쓸어 담아서 지금의 살찐 돼지새끼가 되었다. 그렇게 한번 바뀐 체질은 노력해도 달라지지 않았다.
무엇이 겁나는지 곤두세우던 돼지새끼는 앉아서 졸았다. 바람이 심해져 창을 흔드는 소리에 움찔 깨고는 나를 보는 것이었다. 멋쩍게 시선을 돌린 그의 눈에 말을 고르는 빛이 역력했다.
“나 잘 때 무슨 일 있거나 하진 않았지?”
“안 지나갔어. 아무도 없었고.”
“아니, 내가 막 소리 지른다든가…….”
창밖에선 거세진 빗발이 눈앞을 흔들고 있었다. 네모난 구멍 속으로 빨려드는 물보라는 드나들 곳 없는 빛을 가리우는 것이었다. 나는 검어지는 저 건물 속 묘한 끌림에 그러나 녀석이 지나가는 것을 못 보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그런 일 전혀 없었다.”
“다행이네.”
돼지새끼는 무슨 말을 하려는 듯하다 입을 다물었다. 창을 넘어 전해오는 먹먹한 빗소리에 그가 코를 킁킁이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크게 말해.”
돼지새끼는 동그랗게 뜨며 나를 보았다.
“비 때문에 안 들리니까 크게 말하라고. 잘 때 소리 지른다며.”
“아. 사실 아버지가 그랬어. 근데 나도 똑같다고 그러더라고. 자주 있는 것은 아냐. 가끔씩 일어나 앉아서 중얼거린다거나 누워 자다 소리 지른대. 근데 그게 아! 이러고 크다는 거야.”
그는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잠버릇도 원래 따라가나?”
“아니 그런 건 아닐걸. 나도 언제부터 그런 건진 모르겠는데 고등학교 때 삼촌네 지내면서 처음 알았어. 숙모년이 놀라서 벌컥 열고는 너 뭐하는 거냐고, 일부러 그런 거냐고 하더라. 뭐 한 것도 없는데. 꼭지가 돌아서 확 나가버릴까 하다가 뭐 좋으라고 내가 나가냐 싶어 뒤집어쓰고 누웠지.”
나도 웃음이 터졌다. 통쾌한 것은 좋은 것이었다.
“나중에 뭐더라, 싶다가 아, 아버지랑 같나보더라고.”
쓰게 입꼬리가 올라간 그의 얼굴에는 땀이 얼룩져있었다. 한바탕 웃고 나니 송골송골 맺혀 매끈해진 것이었다. 넙대대한 이마 위로 빗방울에 가린 달빛이 긋고 지나갈 것만 같았다. 돼지새끼는 손을 올려 땀을 닦았다. 그리고 웃는 것이었다. 나는 다만 누가 그랬듯, 불 지른 사람이 사라진다고 불이 꺼지진 않는단 말이 그러나 걸려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언제부터 그랬는데?”
곰곰이 생각하는 돼지새끼의 눈이 더욱 쳐졌다.
“아마 내가 어렸을 때 처음 봤을 거야, 물론 그 이전부터 그랬을지도 모르지. 꽤 조그말 때였는데. 나도 갑자기 문밖에서 고함치는 소리가 들리기에 나와 봤더니 아버지는 주무시고 아무도 없더라고. 그 때 무슨 생각했는지 알아?”
“뭐라 생각했는데.”
“왜 그 판자때기로 가둬놓은 놈 있잖아, 내가 말한 적 있지?”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가 그놈이랑 꿈에서 싸우고 있구나 생각했지.”
“누가 이길 거라 생각했는데?”
“글쎄다. 잘 기억은 안 나는데. 어릴 땐 물론 그놈 흰자 없는 눈동자 이길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겠다 싶었기도. 지금 보면 아버지가 이겼을 것 같기도 하고……. 맞다, 누가 이기든 상관없었어. 어차피 개나 아버지나 둘 다 무서웠걸랑. 딱히 이겼다고 해서 누구든 나보고 기분 좋다고 할 것 같지 않았어. 끝나고 그 피 흘리는 게 나를 본다고 생각해봐. 그게 제일 무서운 거야, 알아?”
이번엔 배까지 잡고 쌕쌕대는 숨소리를 재껴내는 것이었다. 말없이 보던 내겐 불에 관한 얘기가 계속해서 속삭이고 있었다. 삼켰던 말의 죄의식을 따라 그리고 침묵이 자리 잡았다.
돼지새끼는 다시 잠에 들 생각이 없는지 서성이는 것이었다. 바지를 들춰내는 걸음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찬장 따위를 열어 뒤지는 행동거지가 거슬렸으나 그러나 궁금한 것이었다. 여타 볼만한 것도 챙길 것도 없자 조금 풀이 죽은 돼지새끼는 이전의 파란 노트를 집어 들었다.
“이거 봐, 일긴가?”
그리 생각던 터라 별 할 말이 없었다. 그는 신경 쓰지 않고 읽어나갔다.
“첫 장이다.
언니가 말하길 쓰는 게 일에 좋다고 했다. 어떻게 써야 할지 얼마나 써야 할지…….
재미없는 내용이고. 그림, 그림. 오늘은 A가 나를 찾아왔다.”
스치는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지난겨울일 것이다 지난겨울일 것이다.
“A가 누구지, 너냐?”
눈가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재미없다. 원래 자리 펴서 놔.”
돼지새끼는 입을 닫고 그러나 조심스레 페이지를 넘기는 것이었다.
“시인가 봐. 그 여자가 직접 쓴 건가?”
희미하게 웃더니 쥔 채로 갖다 주었다. 말대로 시가 있었다.
 



두리번거리던 날이었다
돌담 모퉁이에 박혀 최대한
돌처럼
몸을 비틀었다
검은 돌의 시선을 이리저리 굴렸다
많은 이가 지나갔다
바라건대는
아무것도 나를 보지 않았으면 했다
입을 닫고
보도에 벌어진 볕이 아물 때
까지 섰다 절대 아무도
길가의 모든 것이 나를 보고 있었다 


옮겨 적기라도 한 것처럼 고친 것 없는 또박또박한 글씨였다. 나는 원래 펼쳐져 있던 곳을 찾아 내려놓았다. 돼지새끼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 앉았다. 이제 별말 없는 시간만이 간밤의 피로 위로 녹아내리고 있었다. 여전히 혹은 앞으로 기다리는 것이었다.
여자는, 여자는 지금 어딘가에서 정확히 누군가의 침대에서 잠을 그러나 아마 그 짓을 하고 있을 것이고 그리고 노트만 봐서는 조장뿐이었는지 다른 누구 나인지 여자가, 그 여자가 문 앞의 나를 알고 있었는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시인가 그 무엇 때문에 연해지는 빗소리에도 맞춰 숨을 쉬기 힘들어지는 것이었다. 잡으려도 잡히지 않는 것이었다.
점점 방울이 걷히더니 이내 새벽이 되었다. 남아있는 안개와 연기와 그리고 우중충한 구름아래 녀석이 기어갔다. 돼지새끼에게 낮게 말했다.
“조용히 나가서 통로 막아.”
돼지새끼가 통로 앞에 서고 나는 방망이를 꽉 쥐었다. 같이 숨을 쉬어줄 빗방울이 필요했으나 그러나 비는 그치고 방망이만을 부러뜨릴 듯이 쥐었다. 손바닥이 아려왔다. 멈추지 못했다.
‘가야 돼.’
녀석에게 눈을 떼지 않으려 노력하며 밖으로 나왔다. 돼지새끼가 있을 통로 쪽으로 눈을 돌렸다. 돼지새끼는, 돼지새끼는?
그의 머리가 계단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 보였다.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누군가와 말을 하는 것이고 경비일 것이 그러나 다시 녀석을 돌아봤다. 통로 쪽으로 눈도 돌리지 않고 곧바로 향했다. 걸음이 빨라지고 이내 달리고 냅다 후려쳤다. 빗나가면서 땅바닥을 때리고 말았다. 손이 아려 이를 악물었다.
‘후려쳐.’
잠시 정신을 못 차리던 녀석은 낑낑대며 도망 가려했다. 나는 숨을 다시 크게 들이쉬고 내리찍었다. 맞았다, 머리에 맞았다. 발로 차고 따라 달려 등가죽을 집었다. 녀석의 검은 눈이 나를 보고 있었다. 움푹 파인 구멍 같았다. 으르렁거렸다. 나는 소리 내지 못하게 목을 잡았다. 방망이도 내동댕이치고 그 여자의 방으로 뛰어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얼른 창밖을 내다보고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마당과 그 모든 곳 건물 안엔 아무도 없던 것이다. 나는 녀석을 들어 올려 마주 보았다. 퀭한 눈이 까무러치지도 않고 으르렁대는 것이었다.
뛰는 가슴을 비집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웃음이 나온 것이다.
“푸힛, 푸히히히히, 후히히…….”
바람이 빠지듯 웃음이 나왔다.
전혀, 녀석과 나는 친해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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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르게 읽는 현대소설 세트 - 전8권 - 테마로 읽는 한국 현대소설 125선
김승구 지음 / 천재교육 / 2006년 8월
평점 :
절판


어떤 이야기가 재밌을 지 볼 때 좋긴 하다만, 역시 글은 축약본으로 읽으면 안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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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수학의 바이블 10-가
민경도.이창희 지음 / 이투스북 / 2007년 1월
평점 :
품절


친절한 설명, 좋은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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