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뒷세이아 - 그리스어 원전 번역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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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가 만약 전체로서 도달할 수 없는 순수한 결정체라면, 그것은 영속된 시간을 거부할 것이다. 또한 그것이 놀랄만큼 정교하며 아무도 알지 못할만큼 작다면, 그것은 스스로의 공간을 선택받지 않을 것이다. 세계의 실체들은 본질로서 부여된 이름 속에 그 자체 하나의 의미를 담고, 운명은 있어야만 하는 모습 그대로 오롯하여, 심연은 깊지만 적막은 없다. 그때 모든 것은 세계의 일부가 아니라 세계 그 자체를 새긴 투명한 그림과도 같을 것이다.  

  이러한 충만함으로부터 일리오스의 해안과 성벽들이 자라난다. 트로이는 흙과 모래가 아니라 세계에 의해 존재하며 -- 따라서 트로이가 실존하지 않는다는 발견은 놀라운 일이 아니며 그것이 실존한다는 증거들 역시 놀라운 일이 아니다 -- 그곳의 영웅들은 신체나 정신의 일부가 아니라 신성이자 격정, 욕구의 총체로서 존재한다. 그들은 밝고 무한한 대지 위에 각각의 원형으로서 놓여 있고, 가치들의 그림자에 의해 더럽혀지지 않은 본성이 모든 관계를 지배한다. 불변하는 진리와 도덕의 준거들도, 관음증 걸린 신과 호수 위를 걷는 남자도, 무의식과 그것이 낳은 괴물들의 역사성에도 의지하지 않은 채, 모든 이는 자기 자신으로서 가진 유일무이한 긍정성을 표현한다. 그렇기에 페넬로페와 오뒷세우스의 이별은 비극이 아니라 신화이며, 헥토르를 향한 아킬레우스의 추격도 신과 더불어 달려간다. 세계는 어떤 의미에서조차 하나가 아닐 수 없다. 의지로서의 신탁과 예언은 주어진 세계의 궤적을 그릴 뿐, 결과에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결과 그 자체와 같다. 어디에서건 가둘 수 없을 순수한 역동성은 여전히 살아있고, 오직 표층으로 떠오른 노래가 전(前) 예언자의 목소리를 통해 가만히 존속할 따름이다. 이 꾸밈없는 원시적 광기와 움직임은 『일리아스』 서사시 전체에 걸쳐 있다. 그들에게 대화란 오직 행위이다. 감각에 의해 전달될 표현 속에서조차 이미지는 끊임없이 살아있다. 생각과 언어는 다만 노래에 이르러 나타날 뿐이다.   

  그러나 곧 그것이 나타난다. 일리오스의 순수성이 여명으로부터 밤에 이르는 동안, 그것은 신성을 모방하고 하나의 흐름으로 충만했던 세계에 균열을 풀어놓는다. 균열의 틈에서 새어나오는 목소리는 스스로를 의식이라 부른다. 더 이상 모든 것은 하나가 아니요, 하나가 될 수 있는 무언가가 된다. 기억은 세계의 가능성을 현존으로부터 분리시키고, 형상들은 사물의 이면을 향해 진동하기 시작하며, 불확실하면서도 모든 것이 포함될 세계 전체가 자신의 외부를, 그리하여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말하자면 그것은 하나의 세계에 대한 창조이고, 또한 창조의 이름으로 점지워진 세계의 시작이기도 하다. 요컨대 의식 존재로서의 인류의 근원은 신도 낙원도 번갯불도 아니다. 그것은 목마다.  

  목마의 이중성, 세계에 맞닿은 외연과 놀랍도록 감춰진 내부의 이 모순된 균형은 새로이 나타난 원형적 단위들의 이면성을 직접적으로 제시한다. 바다를 닮은 바퀴달린 거대한 목조상은 진흙과 프로메테우스의 관용으로 빚어진 못생긴 무리들에게 추수할 수 없는 대지 위의 심연을 의도한다. 결국 신의 제물을 가장한 채 신의 모습으로 만들어진 목마 속에서 인류는 필연적으로 신의 제물을 가장한 채 신의 모습을 모방하는 존재로 잉태되었고, 모든 것이 영원히 -- 그리고 아주 미세하게 -- 바뀌어버린다. 행위란 고뇌와 망설임을 통해서만 비로소 나타날 수 있으며, 존재는 신성을 받아들이고 욕망을 충족하는 한편 격정을 사유한다. 이제 노래는 위대한 인간의 여정이 되어 교차되는 공간과 시간적 흐름 속에 놓인다. 예언은 도달하게 될 목적이 아니라 고고한 선택의 갈림길에 세워진 표지가 된다. 그렇기에 아킬레우스의 분노가 신적인 의지를 향해 내려오는 반면, 오뒷세우스의 귀향은 인간 의지의 가능성을 포함한다. 말하자면 오뒷세우스의 여정에 주어지는 신들의 조언은 필연적 결과에 대한 예언이 아니라 예언되는 결과들에 대한 선택의 계시이고, 그가 나아갈 세계의 부분들에 관한 도움에 머무른다. 일리오스의 영광된 해안가와 에우마이오스의 은밀한 헛간 사이에는 어찌할 수 없는 간극이, 현존을 세계의 저편에 머무르게 한 균열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은 정말로 단순한 표현일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이미 너무나 많은 것이 변하고 만다. 이제 세계의 잠재성은 가능성의 교차를 통해 기억으로서 과거를 이루며, 본질은 삶이 되기 위한 무언가를 필요로 한다. 그것이 바로 여정이며, 서사시적 현실이다. 신성과 격정의 계기들을 통해 세계는 회백색 공간의 여백을 채워나간다. 따라서 헥토르의 죽음은 일리오스의 모든 것을 통해, 그리고 그 모든 것 또한 헥토르의 죽음을 통해 존재하는 반면, 오뒷세우스의 지혜는 자신으로부터 분리된 세계의 공백으로 나아갈 무한한 공간과 시간을 위하여 존재한다. 고로 순수성을 가장한 목마의 내부에 자리잡은 현실은 스스로 만들어낸 세계의 가능성들을 교묘히 뒤섞음으로써 자신의 목적이 바라보는 세계를 향해 나아간다. 놀라운 것은 그것이 더 이상 세계를 향해 움직인다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위해 움직인다는 사실이며, 그로인해 새로이 지향된 의도들은 탈색된 세계를 얻고 신성은 예정된 조화를 의식 앞에 펼쳐놓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오뒷세우스의 지혜란 총체적 세계에 출현한 내면성 그 자체이다. 거기에는 어떠한 일관성도 도덕성도 없다. 간단히 말해 그의 행위란 모조리 기만이다. 

  이것이야말로 외부와의 일치 속에서 최초로 나타난 균열을 비추는 원형적 단어다. 폴뤼페모스를 통해 불려진 그의 이름은 그러한 본성을 가장 잘 표현한다. 그는 라에르테스의 아들 도시의 파괴자 오뒷세우스이며, 동시에 오르실로코스를 죽인 나그네와 크레테 출신의 거지이고, 한편으로는 데우칼리온의 아들 아이톤이자, 숫양에 매달린 '아무도 아니'다. 이들은 오뒷세우스의 모습이고 동시에 어느 것도 완전한 그의 모습은 아니다. 이타케의 위대한 왕이 귀향의 여정을 통해서 보여준 것은 헤시오도스가 소원한 서정적 교훈도, 플라톤이 말했던 조화로운 지성적 영혼도,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닮은 숭고함도 아니다. 그런 모든 영역들 이전에, 오뒷세우스는 세계가 바라는 모든 요구를 충족하며 세계 그 자체로 하여금 자신의 행위를 긍정하도록 한다. 요컨대 오뒷세우스가 사이렌 자매의 노래를 듣고자 하는 것은 자신을 시험하고자 함이 아니며, 헬리오스의 가축들을 죽이지 않고 제우스의 심판에서 살아남는 것도 인내와 겸양의 결과가 아니다. 그가 이스마로스를 약탈하고 페넬로페의 구혼자들을 살해한 행위가 용인되는 것 역시 결코 그들에게 절대적인 죄악이, 그에게는 그것을 심판할 정의가 있어서가 아니다. -- 물론 그가 오직 자신이 바라는 바를 이루기 위한 비정함이나 잔인함만을 가진 것도 아니다. -- 다만 그는 세계가 제시하는 외재적 본성들의 틈새에서 다른 이들보다 스스로를 더욱 잘 드러내고 있을 따름이다. 외부를 향해 뻗어있는 원형으로서의 원시성과 함께 내면에 자리잡은 목적적 기만은 세계 속에서 그의 행위를 결정하며 또한 심판한다. 그는 다른 이들보다 올바르지 않다. 단지 그는 본질적으로 다른 이들보다 -- 서사적 의미에서 -- 더 완전할 뿐이다.  

  이 위대한 완전함은 무엇으로도 훼손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오뒷세우스는 키르케의 동굴에서도, 알키노오스의 저택에서도, 아르고스의 죽음 앞에서도 동일한 원형으로 남는다. 그는 성장하지도 또한 퇴보하지도 않으며, 그의 내면이 바라보는 균열된 세계 역시 그 자신을 비본질적으로 만드는 어떠한 부분도 없다. 어찌되었건 존재하는 것은 여전히 분리되지 않은 세계이며, 그의 기만이 존재하는 모든 목적은 동일한 세계의 지속과 계승을 위해서이다. 결국 그가 겪은 여정은 본질로부터 분리된 그의 자아가 겪어야만 하는 장애나 회복의 계기들이 아니라 시간 자체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시간적 상징과 동일시되는 기억과 그의 외적 훌륭함을 구현하는 육체만이 귀향하는 이십년을 잇는 오뒷세우스의 동일성을 가능하게 한다. 때문에 귀향의 반대는 죽음이 아니라 망각이다. 사이렌의 노래가 강력하고 또한 두려운 것은 그들을 향한 영광이 과거로부터 온전히 남아있으며, 그 과거가 고귀한 칼륍소의 매혹과 마찬가지로 영원과 함께 망각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뒷세우스에게 주체적 동일성과 내면화된 인식 주관의 한계를 짐지우는 것은 지나치게 근대적이다. 말하자면 그에게 있어서도 문제는 삶의 형상적 상태들이 아니라 삶 그 자체이다. 미망(迷妄)은 여전히 신에 비추어 나타나고, 일체된 형상적 삶은 완결된 시간 속에 머무른다. 오이디푸스와 달리 오뒷세우스가 가지고 있었던 운명으로의 항진은 탈각된 형상들을 생성하거나, 그 자체로 비본질적인 영역에 머무르는 일상적 자아가 될 수는 없다. 그의 질문은 아직 '누구'라는 말을 모르며, '왜'라는 말도 낯설다. 현실이 하나의 이야기로, 예언자가 낭송자로 뒤바뀔 때, 환영과 실제의 뒤섞임이 무대와 객석으로 온전히 수렴되었을 때, 그때에야 비로소 역사와 서사시는 의도된 구성과 시선의 공백을 요구하는 비극이 된다. 『오뒷세이아』에서 나타나는 세계의 균열은 아직 『오이디푸스 왕』에서 나타났던 삶과 본질의 분리를 의미하기보다는 -- 비록 그것의 시발점을 내포하고 있다고는 할 수 있더라도 -- 병리된 두 가지 무대의 갈등, 즉 분열되기 시작한 본질적 층위의 간극에 대한 호소를 의미하고 있는 듯하다. 이 무대는 각각의 삶과 본질성을 소유하고 있지만 어느 한쪽으로 이루어진 탈각화된 삶이 다른 무대로 하여금 리얼리티의 반증을 증명하도록 만들 수는 없다. 양자는 동일한 삶이며, 향연이다. 그것은 본질적 세계로부터 분리된 일상과 현실의 대응이 아니라 세계 그 자체가 지닌 본질적 형상들의 갈등을, 그리고 마찬가지로 삶 그 자체의 계기들이 갖는 시간적 동일성의 변주를 의미한다. 페넬로페와의 재화가 아니라 구혼자들의 복수자들에 대한 처리가 여정의 마지막을 이루며, 거기서조차 테이레시아스의 예언은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여전히 이어지는 오뒷세우스의 시간과 파이아케스족의 삶과 올림포스의 존속을 의미한다. 『오뒷세이아』는 하나의 완결, 세계의 구원을 지시하지 않는다. 『일리아스』의 마지막이 아킬레우스의 죽음조차 담고 있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오뒷세우스의 귀환은 서사가 지니고 있는 시간적 동일성을 과거로부터 전해줄 뿐이다.  

  그토록 영원히 열려있는 시간과, 변화와 함께 살아있는 동일한 원형의 모습은 우리가 생각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어떠한 것과도 같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들에게 우리가 아는 바의 이란 수식 이외에는 아무것도 줄 수 없으며, 아마도 이는 지혜를 삼킨 인류의 위대한 소화 작용이 절반만 이루어졌음을 증명할 것이다. 의식에 떠오르는 심연은 음식으로부터 고립된 소화 기관의 반항기로부터 추출된다. 인간 정신의 유한성은 언제나 그리 어렵지 않게 발견되며, 후식이 나올 즈음에는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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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06 16: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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