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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도 길을 잃는다 - 창비장편소설
박정요 지음 / 창비 / 1998년 1월
평점 :
품절
올해 초 이름난 열 권짜리 소설을 읽었다. 본디 잘 팔린다는 책을 읽는 성미가 아닌데, 하도 뛰어나다고 선전을 해대기에 사서 읽었다가 크게 실망을 했다. 내가 혹시 잘못 읽었나 싶어 아내에게도 읽어 보라고 했다가 읽고 난 아내에게 항의를 받았다. 뭐하러 그런 책을 읽으라고 했냐는 것이었다.
<어른도 길을 잃는다>는 그 대하소설에 실망한 뒤에 우연히 읽게 된 소설이다. 네 해 전에 초판이 나왔는데 아직도 다 팔리지 않은 걸 보면 읽은 사람이 별로 많지 않은 모양이다. 그런데 나는 이 책을 붙잡자마자 마치 빨려들어 가듯 단숨에 끝까지 읽어 버렸다. 그리고 긴 여운에 잠겼다.
전라남도 해남의 땅끝마을에 사는 행남이는 딸부잣집의 여섯째 딸이다. 위로 오빠 하나와 막내 남동생만을 애지중지하는 할머니와 아버지, 어머니 밑에서 천덕꾸러기로 나뒹구는 행남이 눈으로 60년대 말의 바닷가 농촌 마을의 풍광이 그려진다. 하필이면 가뭄이 들어 그나마 찢어지게 가난한 농촌은 더욱 피폐하다.
그런 속에서도 열한 살 행남이는 할머니한테 노상 '가시랑년' 소리를 들으면서도 선머스마처럼 뛰어다니면서 조금씩 아버지의 비밀과 마을의 비밀을 알아가게 된다. 할머니가 왜 그토록 집에 수걸이를 들이는 것을 반대하였는지, 그리고 실성한 쫑알댁 할머니가 하루에도 몇 번씩 항아리에 맑은 물을 받아 이고 거멍숲에 제사를 지내러 다니는지, 아버지는 왜 외딴집 할아버지네 집에 남모르게 양식을 갖다놓은 것인지. 그것은 행남이가 세상에 태어나기 몇 해 전 이 마을에서 벌어진 어떤 사건 때문이었다.
할머니는 요즘 유행하는 말로 '가문의 영광'을 위하여 큰언니를 서울 은행원에게 시집 보내기 위해 온갖 수작을 부리고, 그 덕분에 혼사는 이루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엉뚱한 사건에 연루되어 어머니가 숨어 버리고, 이어서 나타난 수걸이 아버지 서금석은 마을에 평지풍파를 일으키고 행남이네 집안을 쑥밭으로 만들어 버린다. 물론 큰언니의 혼사는 없던 일로 되어 버리고 딸들을 절대 밖으로 내돌리지 않던 아버지가 넋을 놓자, 할머니는 아버지의 짐을 줄이기 위해 손녀들의 도시행을 허락한다.
어른들이 그토록 꼭꼭 숨겨 놓았던 비밀들은 막상 알고 보니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것이었다. '다 큰 어른들이 우왕좌왕하다가 길을 잃었다는 것이다. 내가 그토록 안타깝게 알고 싶어했던 사건의 전말은 그렇게 실없고 황당하고 잔혹한 것일 뿐이었다. 충분한 논리도 치밀한 구성도 없이 잔혹한 사건만 나열된 아주 조잡한 옛이야기 같았다. 이제는 시시해져버린 동화 한 편보다도 만화 한 편만큼도 못한 어른들의 세계였다.'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것 가운데 잘못된 것은 이데올로기 말고 또 있었다. 바로 가부장제가 그것이다. 행남이네 집 뒷방에는 비극의 인물 하나가 살고 있다. 그 집안의 두찌니 조숙희. 한해 앞서 태어난 집안의 장손 아들이 두 돌을 못 넘기고 죽자 그 죄를 뒤집어쓰고 사람 아닌 짐승 대우를 받으며 뒷방에서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식욕을 다스리지 못한 채 살아 있었다. 그러나 집안의 몰락하고 아들딸들이 다들 떠난 뒤 집안의 기둥 노릇을 하게 된 것이 바로 두찌니 또딸이였던 것이다.
이 소설은 무엇보다도 재미있다. 무거운 역사와 주제를 담고 있지만 작가의 감칠맛 나는 이야기 솜씨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게 된다. 이 소설을 읽고 괜히 시간만 손해 봤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항의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