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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에 숟가락 하나 - MBC 느낌표 선정도서
현기영 지음 / 실천문학사 / 1999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늬 몸에 날 돋아시냐? 늬 손에 날 돋아시냐?'
'멍석 말라, 비 왐져! 장독 덮으라, 비 왐져!'
처음 접하지만 정감넘치는 제주도 사투리이다. 책을 읽는 내내 제주도의 풍경이 떠올라 여행가서 찍은 사진들을 꺼내보곤 했다. 푸른 옥빛 바다와 봉긋한 오름들이 좋아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부러워했다. 그렇게 아름다운 제주도의 이면에 4.3, 6.25 등으로 인해 아픈 상처가 있었음을 나는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다.
50의 나이가 되어버린 주인공은 아버지의 죽음을 겪고 나서 언젠가 닥칠 자신의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이며, '오늘의 밝은 태양보다 망각된 과거'에 사로잡힌다. 어린시절 주인공에게 있어 아버지란 사랑과 정을 나누는 대상이기보다는 무능하고 그의 앞길에 장애가 되는 사람이었지만, 지금에 와선 연민의 정과 지난날 행동에 대해 죄책감을 느낀다. 아버지란 그렇게 끈끈한 무언가가 있는 모양이다.
똥깅이가 첨으로 썼던 소설 '어머니와 어머니'. 비록 나에겐 작은 어멍이란 없었지만 나의 어머니도 똥깅이의 어머니처럼 고생을 많이 하셨기에, 마치 나의 어머닌양 가슴 한편이 뭉클해져옴을 막을 수 없다. 무거운 짐에 눌려 머리를 숙인 채 산에서 내려오다 나뭇짐 마중 온 아들 똥깅이를 만나서도 짐을 나눠주기보다는 아직 괜찮으니 먼저 나뭇짐에 걸린 으름덩굴을 따먹으며 따라오라시는 어머니. 그 어머니가 바로 사랑하는 나의 어머니인 것이다.
똥깅이의 어린시절을 따라가면서 때론 웃기도 하고 때론 가슴 시리기도 했다. 몸이 약해 줄창 침을 흘렸던 똥깅이의 목에 돼지코를 달고 다니게 한 것, 헌병이 되어 돌아온 아버지가 자랑거리에서 한순간에 놀림감이 되버린 일, 그시절 인기를 끌던 변사의 무식이 들통나는 해설 '여기는 영국의 파리~', 후훕, 이러한 에피소드들을 읽으면서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한편, 비온뒤 한내의 배고픈 다리를 한 사내가 무모하게 건너려다가 그의 말과 마차가 물에 떠내려간 사건, 죽은 그의 말은 그제서야 평생 짐이었던 마차에서 벗어났다는 해설,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ㅠㅠ
책의 후반부는 사춘기 시절 성에 눈뜨는 과정을 그린 것인데 순수하던 아이들이 갑자기 시커먼 어른들로 성장해버린 느낌이 있어 약간의 씁쓸함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