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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라, 릴라
마르틴 주터 지음, 김혜경.차경아 옮김 / 까치 / 2009년 12월
평점 :
품절
(첫 문단은 줄거리가 있어요)
여기 한 어리숙한 청년이 있다. 미래에 대한 별다른 비전은 없지만 무언가 일어날, 이뤄낼 거란 기대감으로 '잠깐' 웨이터 일을 하고 있는 청년 다비드. 실제 나이보다도 앳된 얼굴의 이 총각은 어느 날 운명의 그녀 소피, 아니 릴라, 아니 마리를 발견한다. 하루라도 마리의 얼굴을 못보면 몸이 달아 안절부절 못하는 다비드와 달리, 마리는 그를 패거리의 허영덩어리 랄프에게 보이는만큼도 관심을 주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날, 다비드는 낡은 골동품 속에서 어쩐지 마음에 드는 소설을 발견한다. 그리고 문학에 관심이 있는 마리에게 그럴듯한 인상을 주기 위해, 충동적으로 자신이 쓴 작품이라며 소설 '소피, 소피'를 그녀에게 건네준다. 그런데 어쩐지 마리의 관심을 끄는데 성공했다. 둘의 사랑이 거의 이-만큼 다가왔을 무렵. 사랑스러운 마리가 굉-장히 고맙게도 작품을 대신 출판사에 보낸다. 다비드가 마리에게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사이 작품은 출판되었고, 그는 정신차리고 보니 한순간에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어있다. 짧고도 불안한 행복은 잠시.... 작품의 원작자가 나타나는데...
로맨스소설이라고 생각하면 좀 뒷통수가 아플 전개다. 남자주인공 다비드는 어렸을때 작문실력이 좋았다고 혼자 곱씹은 것과, 어쩐지 매력같지도 않은 곱상한 얼굴 외엔 이렇다할 장점도 없고, 여자 주인공 마리는 다비드가 아닌 알프레트 두스터, 혹은 페터 란트바이에게 빠진 게 확실해 보인다. 소설의 전개 역시 독자의 기대와는 달리 점점 더 현실적이고, 신랄하게 끝으로 내닫는다.
이 작품에서 재밌었던 건 작품의 긴장을 쥐고, 독자들이 기대하는 '진실이 밝혀지고, 모두가 진실의 태양 아래 깨끗하고 분명한 모습으로 화해의 포옹을 나누는 순간' 은 끝내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작가가 이 상황을 로맨스 코메디식의 해피 엔딩(부족한 남자가 우연히 인생역전을 이뤄 연애까지 얻는 내용)이 아니라, 다비드 개인을 통해서 풀어내는 점이 좋았다.
책의 마지막 문장은 이 책의 제목이자, 다비드가 가짜 작가를 자처했던 '릴라, 릴라' 혹은 '소피, 소피' 의 (원작자가 나타날 것을 두려워한 다비드가 제목을 바꿔 출판했다) 첫 문장과 같다.
'이것은 다비드와 마리의 이야기이다. 부디, 슬프게 끝나지 않기를.'
둘의 마지막 장면 역시, 다비드의 독자들을 몇 주간이나 울린 '릴라, 릴라'를 닮아있다.
작품 전체는 다비드, 마리, 그리고 원작자라고 주장하는 야키 세사람의 관점에서 번갈아가며 묘사되지만, 사건의 중심인 다비드의 심리가 가장 잘 와 닿는다. 작품을 표절하고 (아니 그대로 가져다 쓴) 거짓말을 한 다비드에게 독자의 마음이 동하는 건 아무래도, 마리에 대한 사랑 외에는 그가 기대하는 것이 없기 때문인 것도 있을거다. (유명세와 돈을 좀 즐겼을지언정) 하지만 이 마지막 장면에서 나는 다비드와 마리의 관계의 회복, 완전한 사랑의 결실에 대한 희망을 품기보다는 다비드가 자신이 만들어낸 거짓된 정체성 (쓰지 않은 작품의 작가라는)을 벗고, 현실의 자신으로서, 자신의 이야기를 쓰기시작했다는 것에서 의미를 찾았다.
그는 마리와의 관계가 끝나고서야 이 한 걸음을 내딛게 된 것이 아쉽지만.. 이 문장 이전의 그는 마치 실체가 없어 보인다. 그가 작가로서 이름을 내기전 어설프게 어울리려 노력한 (마찬가지로 어설픈) 예술가 집단에서 그의 존재처럼 누구도 눈여겨 보지 않는. 그가 거짓으로 얻은 이름 외에는 그를 설명할 방법이 많지 않다. 그런 그가 자신의 첫 문장을 쓰면서그 자신이 만들어낸 '작가로서의 자신'이라는 허구(이자 허위)를 현실로, 삶으로 끌어올리게 된 것이다. 그가 어떤 글을 쓰게 되건 간에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가 했던 과거의 거짓이 진실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문장에서 다비드가 진실을 말하게 될 것이라는 상상도 가능하다.
그 외, 포스트모던의 종언을 외치며 등장한 작가 다비드가 사실은 작가 존재 자체를 모방한, 어쩌면 과도하게 포스트모던적인 인물이라는 작가의 신랄한 유머, 거의 관심도 받지 못한 소설이 한 문학가의 평론과 함게 베스트 셀러가 되는 과정이나, 한 사람의 스타 작가가 만들어지기 위해 연출되는 장면들 (방송국의 작가 인터뷰), 출판계의 '그다지 문학적이지 않은' 분위기를 읽어내는 것 역시 즐거웠다. 극중 야키라는 인물이 주는 혐오감(그의 식탐을 표함해)이나 마리의 사랑에 대한 환상 역시 작품을 풍성하게, 또 좀 더 현실적인 연애를 생각해보게 하는 좋은 요소들 이었지만, 작품을 그대로 옮겨올 것이 아닌 바에야 이만 말을 아끼는 편이 좋을 것 같다.
분명 장르소설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소피와 페터의 이야기가 아닌 다비드의 애기인만큼은 슬프지 않게 끝나길 바란다. 그치만 마리는 그냥 잊는 게 좋을 것 같다. 다비드.